제작 현장 프리랜서들 ‘근로자성’ 인정 못받으면 부담 고스란히 떠안아야
130~150시간. 한국 드라마 제작 현장의 일주일 평균 노동시간이다. 밤샘 촬영, 하루 20시간에 이르는 노동은 드라마 제작진에게 ‘보편적’ 일상이라 할 만큼 근무환경이 열악하다. 오죽하면 ‘생방송 드라마’라는 말이 나왔을까. 한류의 첨병이자 가장 대중적이고 화려한 문화 장르인 드라마의 외피 뒤에 처참한 현실이 숨겨진 셈이다. 이 같은 살인적 노동강도는 제작인력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사고로 수차례 이어졌다.

고 이한빛 pd를 추모하는 플래시몹. / 이준헌 기자
주당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는 개정 근로기준법은 드라마 제작과 같은 방송 현장에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1년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내년부터 사업장 규모에 따라 순차적으로 적용된다고 하지만 당장 올 7월부터는 68시간을 초과해 근무할 수 없다. 현재의 노동시간을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이야기댜.
방송사의 메인 상품인 미니시리즈 드라마는 회당 67분 분량으로 주당 2회 방송된다. 68시간 노동시간에 맞추려면 1회를 제작하기도 빠듯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방송사와 제작사 등 관계자들은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교대근무가 가능하도록 촬영팀을 늘리고 제작인력 확대, 사전제작 비율 제고 등 다양한 방안을 논의하고 있지만 원론적인 수준의 이야기다. 제작사의 한 관계자는 “일반업종과 비교할 때 노동시간의 격차가 심한 데다, 장기간 굳어진 관행이라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범법을 할지, 방송사고를 낼지 사이에서 고민해야 할 것 같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소속 직원들의 노동시간도 문제지만 실상 제작 현장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계약직 프리랜서들의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 방송사나 외주제작사, 협력업체 등 드라마 제작과정의 위계구조에서 해당 업체의 정규직들은 근로기준법의 적용대상이 되지만 프리랜서인 대부분의 인력들은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고용노동부는 드라마 제작 현장의 노동실태에 대해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들의 ‘근로자성’ 여부에 대해 판단할 계획이다.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더라도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방송 제작 현장의 비인간적인 환경을 지적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고 이한빛 PD의 유지를 이어 방송 제작환경 개선을 위해 설립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한솔 이사는 “방송 제작 현장에서 초장시간 노동을 떠받쳐 온 수많은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근로자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부담은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드라마 촬영 중인 스태프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방송계에서는 제작 관행의 변화와 함께 드라마의 분량과 횟수를 줄이는 근본적인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연간 방송되는 드라마는 130여편으로 해외에 비해 월등히 많다. 주 1회씩 방송되는 외국과 달리 국내에선 주 2회(미니시리즈 기준)가 정착돼 있고 방송시간도 더 길다. 늘어나는 방송 분량은 더 높은 제작비, 더 많은 노동시간과 직결된다. 올 초 지상파 3사 드라마 책임자들은 회당 드라마 방송시간을 60분으로 맞추는 등 장기적으로 줄여 나가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 같은 움직임에 따른 드라마 산업 위축 우려도 나오고 있다. SBS 김영섭 드라마본부장은 “드라마 제작환경의 근본적인 변화와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면서도 “일괄적인 규제 대신 다양한 형태의 탄력근무제도 도입, 광고정책 개선 등을 통해 드라마 산업이 활력을 잃지 않도록 하는 보완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