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갑질119’에 3달간 5400건 제보 폭주… 77%가 “노동부 신고 도움 안돼”
설날 연휴를 앞둔 2월 12일, 디자이너 김현우씨는 한 통의 우편물을 받았다. 자신이 진정서를 제출한 서울지방고용노동청으로부터 온 사건 처리 결과 통지서였다. 노동청은 “진정인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다”며 진정사건을 종결시켰다. 4달 만에 1장짜리 통지서를 받게 된 김씨는 “노동부가 기본적인 법도 지키지 않는 기업의 손을 들어줄 줄은 몰랐다”며 억울해했다.

지난해 11월 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직장갑질119 출범식의 모습. / 강윤중 기자
김씨는 지난해 10월 자신이 다니던 한 스타트업 기업의 갑질과 무급노동 실태를 폭로하는 글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다. 그의 사연은 <주간경향> 등 여러 매체를 통해 기사화됐다. 그러나 당사자는 노동부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회사 측으로부터 허위사실 유포·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해 현재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김씨 외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다양한 형태의 직장갑질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2월 13일 국회 입법조사처 토론회에서 발표된 국가인권위의 실태조사에서 응답자 1506명 중 73%가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한 바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들은 본인의 업무능력이 부당하게 낮게 평가되거나, 과도한 업무를 주거나, 일과시간 이후에 업무지시를 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고 밝혔다.
근로감독관들, 노동자 보호막 역할 못해
같은 토론회에서 노동단체 직장갑질119(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직장갑질119’)는 3달간 5400건 이상의 직장갑질 제보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제보내용 중 24%는 임금체불 등 임금에 관한 문제였으며,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은 직장 내 괴롭힘이었다.
직장갑질119를 찾은 노동자들은 고용노동부의 문제 해결과정에 깊은 불신을 드러냈다.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350명 중 77%가 노동부 신고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응답자들은 노동부에 신고한 뒤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거나 노동부가 회사 측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을 주된 불만사안으로 전했다.
김씨 역시 노동부의 일처리가 실망스럽다는 반응이었다. 김씨는 2년 반 동안 무급으로 스타트업 기업에서 일했다. 입사 당시 대표로부터 월급 대신 지분을 받는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별도의 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하루 10시간 이상 일했고, 디자이너 일과 큰 관련성이 없는 건축잡부 일을 하기도 했지만 ‘동업자’라는 이유로 한푼도 받지 못한 것이다. 회사는 그에게 2년 반 동안 일한 대가로 ‘지분’에 해당하는 150만원가량만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린 이후 김씨는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새벽에 일을 시키거나 사생활을 통제하는 등 회사 대표의 여러 가지 갑질 내용은 제외하고 임금체불에 관해서만 진정서에 담았다. 그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자신들이 실제 회사에서 일했던 증거물들을 정리해 노동청에 제출했다.
김씨는 지난 4달간 노동청에서 진정인 조사, 피진정인과의 대면조사 총 두 번의 조사만 받았다고 말했다. 노동청의 1장짜리 통지서는 김씨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는 “저는 18쪽에 걸쳐 진정서를 썼고, 제 노동자성을 입증할 여러 가지 증거도 다 제출했다. 대표로부터 직접 업무지시를 받고, 사용자가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일한 것도 다 이야기했다. 그런데 노동청이 저의 노동자성을 부정한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직장갑질119에서 활동하는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현재의 근로감독관 제도가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풀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부가 노동자의 보호막이 되어야 하는데,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 감독관들이 많다”며 근로감독관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말했다. 또한 윤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노동부가 근로계약서나 4대보험 등 자료만 검토할 게 아니라 사건의 실체를 보길 원한다. 하지만 사건 수가 많은 것에 비해 근로감독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직장갑질119가 운영하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은 직장갑질로 억울한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3월 2일 기준으로 660명 이상이 채팅방에 참여하고 있다. 직장갑질119에서 활동하는 노무사·변호사들이 시간대를 정해 하루 12시간씩 상담을 이어가고 있다. 직장갑질119 활동가들은 노동청에 사건을 진정하는 구체적 방법뿐만 아니라, 직장갑질을 입증하는 자료를 모으는 방법에 대해서도 일일이 답변을 달아주고 있다.
이미 문제제기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피해자들도 마지막 심정으로 직장갑질119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도 있다. 이우진씨(가명)는 직장에서 힘들게 생활하다가 정신병을 얻어 지금도 힘들게 살고 있는 아들의 억울한 상황을 호소하기 위해 직장갑질119의 문을 두드렸다. 40대 초반인 이씨의 아들은 2004년 10월 한 대기업 연구실에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이씨의 아들은 입사 초기부터 매일 새벽에 퇴근할 정도로 과중한 야근에 시달렸다. 근무지 이전도 잦았다. 1년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이씨의 아들은 3개월마다 새로운 근무지로 옮겨졌고, 그때마다 새로운 동료들과 적응하고 거주지를 알아보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이씨의 아들은 회사 상담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회사에서는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만 했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결국 이씨의 아들은 회사생활을 채 2년도 하지 못한 채 퇴직했다. 병원으로부터 우울증과 망상장애 진단을 받은 이씨의 아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살고 있다.
이씨 아들의 경우 산업재해를 신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회사생활에서 온갖 정신적 고통이 심각했던 이씨의 아들은 퇴직 이후 경기도의 한 주택 옥탑방에서 두문불출 생활을 이어갔다. 3년 넘게 밖에 나가지도 않고, 수염도 자주 깎지 않은 채 지냈다는 게 옥탑방 주인의 증언이다. 심지어 이씨가 아들의 방을 찾아도 아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산업재해를 신청할 기회도 놓쳤다. 이씨는 “아들이 대기업에 합격했다는 말만 듣고 어리석게도 무조건 기뻐하기만 했다. 10년 넘게 폐인처럼 살고 있는 아들을 보면 지금도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는 “뒤늦게나마 회사를 찾아가 회사 때문에 병을 얻은 아들의 치료비라도 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 소송을 알아보려고 해도 변호사 상담비가 너무 비싸 엄두도 내지 못했다”며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직장갑질119를 찾게 됐다”고 말했다.
‘직장 내 괴롭힘’ 처벌 규정도 미흡
직장갑질119 활동가들은 임금체불 외에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서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2월 13일 국회 토론회에서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현재 직장 내 괴롭힘을 사법적으로 규율하는 법·제도는 미비한 상태다. 성희롱이나 장애인 차별의 경우 법적으로 규율이 가능하지만, 폭언 등에 대해서는 법적 처벌이 어렵다는 것이다. 윤지영 변호사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욕설을 하면 모욕죄가 성립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하는 폭언 등에 관해서는 법적 처벌이 어렵고 민사소송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윤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제도개선도 중요하지만 직장 현장의 문화가 바뀌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직장갑질119는 방송계 모임, 보육교사 모임 등을 통해 당사자들이 스스로 노동환경을 개선시킬 수 있도록 조직화하는 운동을 함께 벌이고 있다. 그는 “노동부나 시민단체나 외부단체에만 맡겨서는 직장갑질 문화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결국엔 노동조합처럼 노동자들이 직접 직장갑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문제 해결방법”이라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