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10월 20일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온 여성을 만났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오스트리아 빈 국립도서관 대외관계 및 마케팅 담당 매니저 ‘수지 왕(Suzie Wong)’이라고 돼 있었다. 명함을 받은 기자는 고개를 흔들며 “왕이 아니라 서(Sue)”라고 말했다. 기자의 말에 수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웃었다.
20세기 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얘기할 때 보통 러시아 연해주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수지(47)의 사례 역시 매우 특이하면서도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수지의 사연은 한·중·일 동양사뿐 아니라,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까지 포함된 매우 ‘글로벌’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수지는 10월 17일 생애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말을 못하지만 한국은 할아버지의 나라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결혼한 지 꼭 80년 만에 핏줄을 찾아 서울에 온 것이다. 어떻게 멀고 먼 오스트리아 국적의 여성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를 수 있었을까. 참 질기고 극적인 운명의 연속이었다. 수지의 가족사를 간단히 요약해 보자.

수지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할아버지의 저서 「거울, 비극의 시작」을 들어보고 있다.
상해 임시정부서 파리 유학간 할아버지
수지의 할아버지 서영해는 1902년 부산에서 태어난 키 160cm의 지극히 토속적인 조선인 남자다. 그는 부산 초량동에 있던 중국영사관 부속중학을 졸업해 일본어와 중국어를 능통하게 했다. 1919년 17세에 3·1운동에 가담했던 그는 경찰의 수배를 받자, 아예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혼자 상해 임시정부를 찾았다.
그러나 불과 17세에 불과한 어린 서영해를 본 상해 임정의 김규식·장건상 선생은 그를 프랑스로 유학 보냈다. 당시 국제외교의 중심인 국제연맹이 파리에 있어 파리 외교가 중요했지만 프랑스어를 능통하게 하는 사람이 귀했기 때문이다. 1920년 12월 혼자 프랑스에 도착한 서영해는 리세(유치원부터 고교까지 정규교육과정)에 입학해 12년 과정을 6년 만에 졸업했다. 프랑스 정규교육과정을 기초부터 마친 한국인은 당시 드물었다. 그는 1929년 파리 신문학교(에콜 드 주르날리즘)까지 졸업하고 파리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했다.
1934년 임정은 국무위원회를 열어 외무행서(지금의 대사격) 규정을 의결하고 파리 외교행서에 서영해, 미국 외교행서에 이승만을 임명했다.(한시준 단국대 교수 논문) 서영해는 국제연맹에 일제의 한국 침략 부당성을 알리고, 1937년 벨기에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대표단으로 참석해 “동양평화는 한국 독립에 있다”고 역설했다.(<한민> 1937.10.15) 1945년 임정의 대일 선전포고서를 파리 주재 일본대사에게 두 번이나 통보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고려통신사>를 통해 한국의 실상을 유럽에 알리는 작업을 했다. 1929년 <어느 한국인 삶의 주변>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어 소설을 쓰고, 소설 말미에 3·1독립선언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실었다. 그는 또 프랑스 언론에 일제의 ‘한국인은 야만스럽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문을 쓰고, <심청전> <흥부와 놀부>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서영해는 이런 가운데 파리에 유학 온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 엘리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1937년 빈 시청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1938년 독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침략하고,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서영해는 프랑스 망명정부를 따라 영국으로, 아이를 가진 엘리자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불 학술세미나 서영해 코너에 이승만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려통신사」 보고서가 전시돼 있다.
할머니의 재혼, 아버지 성이 바뀌다
1939년 서영해와 엘리자 사이에 아들 ‘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서’가 태어났다. 6년이나 지속된 제2차 세계대전은 서영해와 엘리사를 영원히 갈라놓았다. 1945년 5월 유럽에서 전쟁이 끝났지만 두 사람은 재결합하지 못했다. 이 해 10월 엘리자는 중국인 ‘식닝 왕’과 재혼해 서영해의 아들 스테판 서도 ‘스테판 왕’으로 성이 바뀌고 말았다.
서영해는 1946년 한국에 돌아와 대학(연세대, 이화여대)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에게 프랑스어를 배운 사람이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과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등이다. 그리고 1948년 스무 살 아래 경남여중 교사였던 황순조와 재혼했다.
한편 서영해는 정치활동에 나섰는데 그는 이승만보다 김구 편에 섰다. 서영해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차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1948년 1월 1일 김구가 서영해에게 준 <백범일지> 초판본에는 서영해를 ‘지제(志第)’ 즉 뜻을 같이하는 아우라고 썼다. 그러나 1948년 8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실망한 서영해는 부부가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 (1948년 통일독립촉진회(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가 유엔총회에 파견한 대표단 선발대로 파리로 출발했다는 설도 있다)
중국 상해를 거쳐 파리로 가려던 서영해 부부는 또 한 번 운명적 반전을 맞는다. 상해에서 프랑스 비자를 기다렸으나 부인의 비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때 중국은 심각한 국공내전을 겪고 있었고, 결국 공산화가 됐다. 상해에 있던 한국인은 모두 억류됐다가 1949년 모두 본국으로 귀환조치됐다. 그때 중국에서 살았고, 중국어를 잘한 서영해는 상해에 남았다. 아마 프랑스로 가기 위한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부인 황순조와 영원한 이별이 됐다.
이후 서영해는 중국에서 ‘실종’됐다.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에는 1953년 6월 30일 ‘실종’이라고 돼 있다. 그러나 1956년까지 상해 인성학교 교사를 했던 것까지 확인된다. 이후 서영해의 행적은 사라졌다. 계획대로 프랑스로 갔다는 설도 있고, 월북해 김일성대학 교수를 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모두 간접 증언뿐이다.
중국에서 돌아와 부산에서 혼자 살던 부인 황순조는 1989년 세상을 떠나기 전 남편의 책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1995년 사촌이 그의 독립운동 기록을 모아 서훈 신청을 했고,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서영해의 이런 삶은 <경향신문> 2005년 4월 19일자 ‘다시 쓰는 독립운동 열전-서영해 파리대사의 외교투쟁’으로 소개됐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서영해의 아들 스테판은 빈 응용예술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해 건축가가 됐다. 스테판은 같은 대학에서 만난 독일 출신의 ‘헨리에테 스텝케 비에센더’와 결혼, 수지(1970년)와 스테파니(1981년) 두 딸을 낳았다. 스테판은 자신의 아버지가 ‘한국인 저널리스트 서영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스테판과 수지는 주한 오스트리아대사관, 빈대학 한국사 교수 등에게 문의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한국어도 모르고 인터넷도 없던 당시 할아버지 뿌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스테판은 2013년 세상을 떠났다.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손녀들. 왼쪽부터 정정화·김의한 선생 손녀 김선현 임정기념사업회 이사, 김진아 전주대 교수, 김규식 선생 손녀 김수옥씨, 윤봉길 의사 손녀 윤주경 독립기념관장, 수지, 조소앙 선생 손녀 김상용 국민대 교수, 수지 6촌 친척 내외, 맨 오른쪽은 김규식 선생 증손녀 김신희씨.
80년 만에 독립유공 후손으로 인정받아
수지는 빈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박물관과 골동품 복원사업 등을 하다 2005년부터 빈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수지는 2009년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에 ‘저널리스트 서영해’에 대한 자료를 문의했다. 아마 같은 국립도서관이라 협조 요청이 수월했을 것이다. 그때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은 2005년 <경향신문> 보도 내용을 보내줬다. 그러나 한국어를 모르던 수지는 이 신문 자료를 보관만 하다 2015년 마침 빈에 교환교수로 온 전주대 김진아 교수를 만났다. 김 교수는 <경향신문> 기사를 영문으로 번역해 설명해줌으로써, 비로소 수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수지는 <경향신문>에 연락, 한국에 사는 친척을 확인하고 또 서영해의 직계로 국가보훈처에 보훈신청까지 했다. 보훈처는 2017년 수지와 스테파니가 서영해의 직계임을 확인하고 보훈대상자로 지정했다. 1937년 서영해와 엘리자가 오스트리아 빈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린 지 꼭 80년 만에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혈육이 확인된 것이다.
10월 17일 바로 그 서영해의 큰손녀 수지가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고향에 왔다. 서울에서 6촌 친척(서혜숙씨 등)을 만나고 부산에 있는 할아버지의 고향과 증조할아버지 산소도 둘러봤다. 친구 김진아 교수가 있는 전주도 방문하고,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천안 독립기념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았다. 지난해 파리에서 동생과 만난 독립운동가의 손녀들이 환영해 줬다. KBS 라디오방송 인터뷰도 했다. 20일간 할아버지 고향에서의 일정은 그의 페이스북에 고스란히 남았다.
-생애 처음으로 할아버지 친척을 만난 소감은.
“6촌 친척을 처음 만났다. 솔직히 처음에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금방 친해지고 진짜 가족임을 느꼈다.”
-할아버지가 쓴 책과 평소 보던 책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국립중앙도서관 ‘영해문고’에 보관된 <백범일지> 첫장에 쓰여진 ‘徐嶺海 志第 惠存(서영해 지제 혜존)-戊子元旦(무자원단) 白凡 金九(백범 김구)’라는 글의 의미를 기자에게 물었다. 이에 기자는 ‘뜻을 같이하는 동생 서영해에게 이 책을 드리니 간직해 달라, 1948년 새해 아침’이라는 의미라고 말해줬다)
“가만히 할아버지의 숨길을 느껴보려고 했다. 할아버지의 유산을 이렇게 만지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책을 도서관에 기증한 할아버지의 부인(황순조 여사)이 놀랍고 고맙다.”
-할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인상은.
“많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할아버지의 행적을 들어보니 돌아가신 아버지와 비슷한 공통점을 느꼈다. 전반적으로 서울은 너무 큰 도시다. 서울에 비하면 오스트리아 빈은 작은 마을 같다.”
-앞으로 할아버지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이 있는가.
“그렇다. 더욱 할아버지에 대해 연구해볼 생각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한국 독립운동사가 아닌, 우리의 가족사에 대해 쓸 생각이다.”
수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주고, 가족을 찾게 해준 <경향신문>에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수지는 11월 2일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그리고 임시정부기념관이 세워지는 2020년 동생 스테파니와 함께 다시 한국에 올 예정이라고 했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