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은 중국의 역대 도읍지 중에서 단연코 각별하다. ‘중심’의 클리셰로 각인되어 있는 자금성과 그 정문인 톈안먼, 21세기 중국은 이를 다시 부활시키는 중이다.
“위대한 민족만이 이처럼 위대한 장성을 세울 수 있다!”
1972년 2월 24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만리장성에 올라 이렇게 감탄했다. 만리장성에 바친 닉슨의 찬사는 다분히 전략적인 것이었다. 당시 소련 견제라는 공동의 목적이 중국과 미국을 손잡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이는 오늘날 G2 시대를 탄생시킨 씨앗이었던 셈이다.
역사적 운명이 빚어낸 ‘거대한 비극 장성’
닉슨이 올랐던 곳은 만리장성의 정화라는, 베이징 근교의 바다링(八達嶺)장성이다. 이곳에서 닉슨은 “오늘 장성에 왔으니 마오(毛) 주석이 말씀하신 ‘진정한 남자’가 되었군요”라고 말했다.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진정한 남자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 바다링장성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이 말은 오늘날 중국의 대표적 관광자원인 만리장성의 캐치프레이즈다. 일찍이 마오쩌둥이 1935년에 육반산을 넘으면서,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진정한 남자가 아니지. 이미 2만리를 행군했다네”(‘淸平樂·六盤山’)라고 읊은 바 있다. 당시는 공산당 홍군이 국민당의 추격을 피해 서북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고난을 극복하고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장성’을 언급했다. 결국 1만2500㎞의 장정(長征, 1934~1936)을 통해 공산당은 살아남았으며, 힘을 키워 국민당을 무찌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2015년 톈안먼 광장에서 거행된 열병식.
1949년 10월 1일, 톈안먼 광장에서 거행된 개국대전(開國大典)에서 오성홍기가 올라가는 가운데 국가 ‘의용군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일어나라!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여!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의 새로운 장성을 쌓자!”로 시작되는 이 노래 역시 1935년에 만들어졌다. 여기서 장성은 정신적 차원으로 전이되는 동시에 ‘민족’이라는 코드로 치환된다. 그 옛날 외적을 막기 위해 쌓았던 장성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은 채.
“위대한 민족만이 이처럼 위대한 장성을 세울 수 있다!”라고 닉슨이 찬사를 보낸 지 16년이 지난 1988년, 다큐멘터리 <하상(河傷)>은 장성을 ‘거대한 비극적 기념비’로 고발한다.
“사람들은 장성이 달에 간 우주인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 여기며 자랑스러워한다. 심지어 장성을 통해 중국의 강성함을 상징하고자 한다. 하지만 장성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화하 자손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것이다. 자신은 역사적 운명이 빚어낸 거대한 비극적 기념비라고. 장성은 강대·진취·영광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단지 폐쇄와 보수, 무능한 방어와 공격 회피의 비겁을 상징할 뿐이다. 그 거대함과 유구함 때문에 장성은 자만함과 기만성을 우리 민족의 가슴에 깊이 새겨 놓았다. 아, 장성이여! 우리는 왜 아직도 그대를 찬미하려 하는가?”
<하상>의 제작진은 전통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민주’를 외쳤고, 지식인의 현실참여를 촉구했다. <하상>이 방영된 이듬해(1989)는 5·4운동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해 4월 15일,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추도 시위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으로 확대되고 일반 시민도 참여했다. 당국은 이를 ‘폭동’으로 규정했다. 공교롭게도 고르바초프와 덩샤오핑의 회담이 바로 이 시기에 있었다.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선포(5.16)한 이튿날 고르바초프는 바다링장성에 올랐다. 베이징에는 폭풍전야의 위기감이 감돌았다. 고르바초프가 돌아간(5.18) 다음 베이징에는 계엄령이 내려진다(5.20). 6월 4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의 유혈 진압으로 민주화의 염원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70년 전 5·4운동의 현장이었던 톈안먼 광장, 그때 이곳은 민중의 힘을 확인하는 공간이었다.
고르바초프가 바다링장성을 구경하던 시각, <하상>의 작가인 쑤샤오캉(蘇曉康)은 톈안먼 광장의 시위대와 함께하고 있었다. 시위가 진압된 뒤 당국은 지명수배자 명단을 배포했다. 쑤샤오캉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하상>이 ‘6·4 톈안먼 사건’을 촉발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 정권 지도자들의 판단이었다. 6·4 톈안먼 사건의 주역들은 중국에서 무탈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쑤샤오캉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톈안먼 학생시위 3인방 왕단·우얼카이시·차이링, 톈안먼 4군자 류샤오보·허우더젠·가오신·저우둬, 이들 가운데 류샤오보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이나 타이완으로 망명했다. 류샤오보(劉曉波)는 2008년 중국의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08헌장’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그는 2009년 12월 국가전복 선동죄로 11년형을 선고받고 투옥 중이다. 201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노벨평화상을 톈안먼 희생자에게 돌린다”고 했다. 2015년 12월 28일, 류샤오보는 감옥에서 환갑을 맞았다.
바로 몇 달 전인 2015년 9월 3일은 전승절(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 70주년 행사가 있던 날로, 전 세계의 이목이 톈안먼 광장에 집중되었다. 이날 이곳에서는 역대 15번째 열병식이 거행되었다. 49개국에서 축하사절을 보냈고, 그 중 24개국에서는 국가원수가 참석했다. 이날 열병식에서 중국은 자체 개발한 최첨단 무기를 선보였다. 1만2000명의 병사와 500점이 넘는 최신형 무기가 동원된 이 열병식을 두고, <워싱턴포스트>는 “20세기의 추한 유물(ugly relics)”이라고 비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열병식이 “히틀러와 스탈린, 침략과 독재를 환기시킨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열병식에서 공개된, ‘둥펑(東風·DF)-31A’의 존재를 감안하면 미국 언론의 이런 반응도 이해가 간다. 미국까지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니! 그런데 열병식이 “정치적 권위를 군사력과 동일시하는 이데올로기를 환기시킨다”는 <워싱턴포스트>의 비판은, 중국만을 겨냥하기에는 매우 비논리적인 언사다. 미국이야말로 ‘군사력 만능주의’의 전형적인 케이스 아니던가. 미국에 의해 세계질서가 유지되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맞서며 ‘팍스 시니카(Pax Sinica)’를 추구하는 중국, 바야흐로 양자의 힘겨루기가 본격화된 지금이다.
전승절 70주년 행사가 열린 톈안먼 광장에는 ‘장성’을 주제로 삼은 입체 화단이 설치되었다. 장성은 전승절 70주년 로고에도 등장한다. 숫자 70, 1945~2015, 다섯 마리의 비둘기, ‘V’ 형태의 장성으로 이루어진 로고. 다섯 마리의 비둘기는 오대주를 상징한다. 중국의 상징으로 선택된 ‘장성’은 물리적 장성이자 정신적 장성이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장성은 외부세계와 중국의 경계면으로서 중국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1972년, 바다링장성에 오른 닉슨 대통령
일찍이 진시황은 흉노를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고, 이를 통해 중국과 비중국의 세계를 나눔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확보했다. 장성은 역대로 중국이 자신의 세계를 바깥 세계와 구분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다. 명나라가 그러하듯, 장성을 쌓는 데 열을 올린 시기는 방어심리가 팽배한 때였다. 그 방어심리에는 이질적인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멸시가 뒤섞여 있다. 장성이야말로 ‘야만’의 비중국으로부터 ‘문명’의 중국을 보호해주리라는 믿음, 이 ‘장성 심리’의 뿌리는 매우 깊고 그 깊이만큼이나 질긴 생명력을 지닌다. 중국의 인터넷 검열 시스템 ‘장성방화벽(防火長城, the Great Firewall)’은 그 깊이와 생명력의 완벽한 체현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단어는 검색조차 불가능하고, 중국 당국이 유해하다고 판단한 사이트는 차단·삭제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물론 정부의 감시 아래 있다. 중국에서는 구글·페이스북·트위터를 사용할 수 없다.
광장에 모인 민주화의 염원 끝내 짓밟혀
올해 3월 18일, 페이스북의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톈안먼 광장 앞을 달리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가 조깅하던 이날 오전 베이징에는 스모그 황색경보가 발령되었다. 사진 속 저커버그는 해맑은 표정이다. 그의 눈과 목에 어떤 방어막이 작동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09년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발생한 유혈 진압에 항의하는 세력이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알린 이후, 중국에서는 페이스북 서비스가 중단된 상태다. 지난해 10월, 저커버그는 베이징 칭화대에서 22분간 중국어로 강연했고, 시안(西安)을 방문해 성벽 위에서 조깅하는 사진과 진시황 병마용갱을 관람하는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요컨대 중국 시장으로의 재진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역시 지난해 10월, 애플의 최고경영자 팀 쿡은 베이징에서 130㎞ 떨어진 진산링(金山嶺)장성에 올랐다. 그는 여기서 찍은 사진을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 올리면서 “감탄스럽다”고 했다. 이날 새벽 베이징 일대는 스모그로 가득했고, 진산링장성도 스모그에 휩싸여 있었다. 압도적 성장세를 보이는 중국 시장을 잡기 위해서라면 이쯤이야 뭐가 대수랴. 이날은 마침 중양절(음력 9월 9일)로, 높은 곳에 오르는 풍습이 있는 날이다. 중국의 풍습을 이해하고 중국이 자랑스러워하는 장성에 경의를 표하는 팀 쿡의 태도가 중국인에게 호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사실 베이징에서 며칠간 연속으로 맑은 하늘을 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2015년 전승절 행사 즈음에 이 어려운 일이 실현되었다. 당국의 강력한 규제 덕분에. 차량 홀짝제를 운영하고 공장 가동을 중단시키고 건축 공사장의 작업도 중단시켰다. 임시적이나 전면적인 조치 덕분에 이례적으로 파란 베이징 하늘이 연출되었다. 이를 가리키는 ‘열병식 블루(閱兵藍)’라는 용어는 2015년 중국의 10대 신조어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4년 11월에는 아펙 정상회의를 맞아 베이징에 파란 하늘이 펼쳐져 ‘아펙 블루(APEC藍)’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국제적 행사를 앞두고 하늘의 색깔까지 좌우할 정도로 중국 당국이 공권력을 행사하는 건 일찍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목도한 바 있지 않은가. 당시 우리가 지켜봤던 베이징의 파란 하늘은 그렇게 연출되었던 것이다. 2022년에는 베이징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된다. 개최 신청을 하면서 중국 당국은 ‘올림픽 블루’를 약속했다. 이번에는 대기환경 개선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한 만큼 ‘반짝 쇼’에 그치지 않길 바라마지 않는다. 문득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바다링장성에 오르기 전날의 일화가 떠오른다. 1972년 2월 23일 저녁, 베이징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이튿날 닉슨은 예정대로 장성에 오를 수 있었다. 밤새 100여대의 차량과 70만명이 동원되어 제설 작업을 했던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그 엄청난 일을 가능하게 만든 건 저우언라이 총리의 전화 한 통! 장성에 오른 닉슨의 모습, 냉전체제의 와해를 상징하는 이 장면은 이렇게 해서 가능했다.

톈안먼 광장 앞을 달리는 마크 저커버그
봉건왕조와 공산주의 상징의 조우
베이징은 중국의 역대 도읍지 중에서 단연코 각별하다. ‘중심’의 클리셰로 각인되어 있는 자금성과 그 정문인 톈안먼, 21세기 중국은 이를 다시 부활시키는 중이다. 일찍이 명나라 영락제는 베이징으로의 천도를 단행한 뒤, 1421년 자금성에서 열린 새해 행사에서 세계 각지의 사절단으로부터 삼궤구고두를 받았다. 자금성(紫禁城)은 천제(天帝)가 머무는 자미궁(紫微宮)을 지상에 재현한 것이다. 황제가 머무는 그곳은 당연히 금지 구역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무너지고 마지막 황제 푸이는 1924년에 자금성에서 쫓겨난다. 이듬해 10월 10일, 자금성은 고궁(故宮)박물원이 되어 모든 이에게 개방된다.
자금성 정문의 명칭은 본래 ‘승천문(承天門)’이었다. 승천이란 “하늘의 명(命)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다. 청나라 순치제 때 바뀐 ‘천안문(天安門, 톈안먼)’이라는 명칭은 기존의 의미에 “오래도록 편히 다스린다”는 의미가 더해진 것이다. 이제 그 톈안먼 성루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중국의 봉건왕조와 공산주의 상징이 기묘하게 조우하고 있는 모습이다. 양자를 관통하는 것은 ‘세계의 중심이고자 하는 중국’이 아닐까. 6월 23일, 영국은 국민투표로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했다. 이로써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지각변동이 예측되는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는 전례 없는 친밀함을 과시하고 있다. 6월 25일 톈안먼 광장 서쪽에 자리한 인민대회당 앞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위한 환영의식이 열렸다. 이날 시진핑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추진하는 ‘사드’의 한반도 배치에 반대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72년의 중국과 미국은 오늘날 중국의 이런 모습을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바야흐로 중국으로의 파워 시프트가 진행 중인 지금이다.
베이징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일, 그 일을 겪은 사람들, 그 사연이 깃든 장소, 베이징의 영광과 오욕의 순간, 그리고 희로애락의 역사…. 이것들을 숙제로 남긴 채 베이징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지난해 6월 16일(1130호) 시안부터 시작해서 뤄양·카이펑·항저우·난징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한 ‘중국 도읍지 기행’도 이제 작별인사를 드린다. 총 55회에 걸친 기행, 아쉽고 부족하지만 흘린 땀만큼 감회가 남다르다. 그동안 함께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