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2월 15일, 쑨원은 임시정부 관료들을 대동하고 효릉을 참배했다. 당시 쑨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격으로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청나라가 무너졌음을 고했다.
난징에 있는 명나라 황제의 능은 단 하나, 바로 주원장이 묻힌 ‘효릉(孝陵)’이다. 홍무(洪武) 15년(1382), 마황후가 세상을 뜨고 이곳에 묻혔다. 16년 뒤, 주원장도 세상을 뜨고 이곳에 묻혔다. 효릉은 마황후의 시호 ‘효자(孝慈)’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이 명칭은 ‘효’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주원장이 세상을 떴을 때 그의 아들은 모두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다들 임지에 그대로 머물고 수도로 오지 말라”는 주원장의 뜻이었다. 일찍이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뒤 자신의 여러 아들을 번왕(藩王)에 봉하여 각지를 지키도록 했다. 주원장은 생전에 26명의 아들을 두었다. 주원장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은 첫째·둘째·셋째를 포함해 모두 7명, 그가 사망할 당시 19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효’를 그토록 중시했던 주원장이 이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의 아들들이 제위에 오를 손자 주윤문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효릉의 ‘치륭당송비’
한족 지도자들 찾아와 이민족 퇴치 다짐
하지만 1402년, 주원장의 넷째아들 주체가 결국 난징을 함락하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다. 효릉의 ‘대명효릉신공성덕비(大明孝陵神功聖德碑)’는 주체가 세운 것으로, 비문의 2746자는 주원장의 일생을 담고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진 1413년은 바로 효릉의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해이기도 하다. 효릉은 명나라의 뿌리를 상징하는 장소로서 명나라 내내 존중을 받았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청나라 역시 효릉을 중시했다. 효릉의 ‘치륭당송비(治隆唐宋碑)’는 주원장이 당시 어떤 지위를 누렸는지 잘 말해준다. ‘치륭당송’이란, 명 태조 주원장의 다스림이 당 태종 이세민과 송 태조 조광윤보다 뛰어나다는 의미다. 치륭당송비를 세운 사람은 강희제다. 그는 여섯 차례 강남 지역을 순시했는데, 그 중 다섯 번이나 효릉을 참배했다. 게다가 신하가 황제에게 행하는 ‘삼궤구고’의 예를 올렸다. 강희제가 주원장을 이토록 받든 이유는 명확하다. 만주족 출신 황제로서 절대다수의 한족을 통치하려면, 고압적 정책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한족의 왕조를 세웠던 주원장을 적대시하는 것보다는 끌어안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효릉은 역대로 ‘참배 정치’의 장이었다. 이민족의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기에, 그가 묻힌 이곳은 한족 지도자에게 더더욱 중요한 곳이었다. 만주족 왕조를 악마로 규정했던 태평천국의 홍수전은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祭明太祖陵寢文’)에서 자신을 ‘불초한 자손’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제문에 의하면, 중국은 ‘한족’의 것인데 이민족이 중국을 차지함으로써 종족이 멸망의 위기에 빠졌다. 홍수전은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이민족을 몰아내고 우리의 신주(神州, 중국)를 되찾겠다”고 다짐한다.
태평천국은 만주족 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한 채 멸망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50년이 되기도 전에 청나라 역시 멸망한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가 퇴위를 선포한다. 사흘 뒤인 2월 15일, 쑨원은 임시정부 관료들을 대동하고 효릉을 참배했다. 당시 쑨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격으로 주원장의 영령 앞에서 청나라가 무너졌음을 고했다. 이날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祭明陵文’)에서 쑨원은 “중화민국의 완전한 통일”을 강조했다. 일찍이 그는 1912년 1월 1일에 발표한 ‘임시대총통선언서’에서 한족·만주족·몽골족·회족·티베트족의 통합을 주장하는 ‘오족공화론(五族共和論)’을 발표한 바 있다. 청나라가 무너진 상황에서 ‘한족’만의 중국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분할을 초래할 터, 쑨원은 발 빠르게 기존의 배만(排滿)에서 오족공화로 급선회했다. 하지만 기존의 배만 의식과 한족주의는 한순간에 떨쳐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효릉에 지어 올린 제문에서 쑨원은 청나라가 지배한 268년을 원통한 시간으로 규정했다. 또한 그는 주원장이 몽골족을 물리치고 명나라를 건국한 것을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진 광복에 빗대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주원장이 원나라를 무너뜨린 것은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선구였던 셈이다.

‘박애(博愛)’라고 적힌 중산릉 패방.
쑨원이 효릉을 참배한 날은 그가 임시대총통 자리를 내놓기 직전이었다. 이날 난징에서는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선거가 열렸다. 여기서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된다.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한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공화제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에 맞서야 했고, 이어서 여러 군벌을 상대해야 했다. 결국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한다.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베이징 벽운사(碧雲寺)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던 쑨원의 유해가 난징으로 옮겨져 묻힌 건 1929년 6월 1일이다. 쑨원이 잠들어 있는 곳을 ‘중산릉’이라고 한다. 일찍이 쑨원은 일본 망명시절에 중산초(中山樵)라는 가명을 썼는데, 이후 ‘중산’은 그의 여러 이름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중산릉은 쑨원이 생전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히길 바랐던 장소다. 광둥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사망한 그가 왜 난징에 묻힌 것일까? 임시대총통에서 사임한 1912년 어느 봄날, 쑨원은 이곳에 사냥을 하러 왔다가 사방을 둘러본 뒤 훗날 자신이 죽으면 이 땅에 안장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쑨원이 난징에서 머문 기간은 오래지 않지만 그에게 난징은 어느 곳보다 의미 있는 곳이었으리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곳, 신해혁명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곳이 바로 난징 아닌가.
베이징에서 죽은 쑨원도 중산릉에 묻혀
중산릉은 쑨원이 서거한 지 1주년이 되는 해(1926)에 기공식을 거행한 이래 1929년 봄이 되어서야 준공되었다. 쑨원의 유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이 해에 난징에는 첫 번째 아스팔트 도로인 ‘중산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명나라 때의 동쪽 성문인 조양문을 개축하고 ‘중산문’이라 개칭했다. 중산릉은 중국 전통의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는데, 가운데 중심선을 따라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에 주요 건축이 자리한다. 중산릉은 산세에 의지해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패방·묘도·능문·비정·제당·묘실로 가는 길이 조금씩 높아진다. 또한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중산릉의 전체 모양은 마치 ‘종’과 같다. 이를 두고 ‘자유의 종’이라고도 하고, 세상을 일깨우는 ‘경세종(警世鐘)’이라고도 한다.
중산릉의 패방부터 묘실까지 모든 것에 쑨원의 정신,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중국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패방에 적힌 ‘박애(博愛)’라는 글자는 쑨원의 일생을 개괄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패방을 지나 설송(雪松)과 향나무가 늘어선 400m가 넘는 묘도가 끝나는 자리에 ‘능문’이 자리하고 있다. 능문의 위쪽에 적힌 글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다. 천하는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쑨원이 평생 분투했던 이상이기도 하다. 능문을 지나면 비정이다. 비정 안의 9m나 되는 커다란 비석에는 다음 24개의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중국국민당이 총리 쑨 선생을 이곳에 안장하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中國國民黨葬總理孫先生於此, 中華民國十八年六月一日)’. 원래는 쑨원의 공적을 담은 비문을 새길 계획이었지만 결국엔 이렇게만 새겼다. 그의 공적을 비문에 제대로 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정을 지나면 제당까지 이어진 돌계단이다. 비정에서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39개, 당시 국민당 의원의 수를 상징한다. 패방부터 제당까지 돌계단의 개수는 392개, 당시 중국의 인구 3억9200만명을 상징한다. 쑨원에 대한 중국인 모두의 존경을 담은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제당이 있다. 제당 입구의 문미에는 ‘민족(民族), 민생(民生), 민권(民權)’이라고 적혀 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제당에는 2.1m 높이의 기단 위에 4.6m에 달하는 쑨원의 좌상이 놓여 있다. 제당 뒤편 묘실에는 묘혈 위로 쑨원의 와상이 놓여 있다. 쑨원의 모습을 일대 일 비율 그대로 재현한 이 와상 아래 5m 지점에 쑨원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제당의 좌상과 묘실의 와상 모두 흰색 대리석 조각이다. 그런데 제당의 쑨원은 중국 전통의 마고자 차림인데, 묘실의 쑨원은 중산복 차림이다. 이는 국민당 우파와 좌파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쑨원의 조각상에 대해 국민당 우파는 전통 복장을 주장한 반면 국민당 좌파는 중산복을 주장했다. 결국 양측은 합의를 보지 못했고, 쑨원의 좌상과 와상의 차림새가 제각각이 된 것이다.

중산릉 제당으로 향하는 쑨원의 운구 행렬.
쑨원의 유해를 중산릉에 안장하는 ‘봉안대전(奉安大典)’이 거행된 1929년 6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의 교통이 3분 동안 멈추었고 전 국민이 3분 동안 애도를 표했다. 국부(國父)에 대한 최고의 예를 표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사후에 중산릉 곁에 묻히길 바랐다. 장제스 역시 중산릉 서쪽에 자신의 묏자리를 봐둔 적이 있다. 만약 훗날에 벌어졌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장제스는 바로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쑨원의 부인과 장제스와의 대립
1929년 6월 1일,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코 장제스였다. 바로 전해에 그는 북벌을 완수하고 군벌 세력을 잠재웠다. 국민정부의 지도자로서 장제스는 쑨원의 이장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관했다. 장제스는 국가 수장이자 쑨원의 동서였으며, 쑨원의 후계자였다.
그런데 봉안대전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장제스를 쑨원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쑨원의 부인 쑹칭링이다. 쑨원이 세상을 떠난 뒤 쑹칭링은 장제스와 대립하며 국민당 좌파를 지지했다. 그녀는 장제스가 쑨원과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에 반대하며 중국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가 나중에는 베를린에서 지냈다. ‘봉안대전’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은 쑹칭링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귀국은 자칫 장제스를 쑨원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인정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쑨원의 아내로서 봉안대전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는 귀국을 결정하는 한편 성명서를 발표한다. 중앙집행위원회의 정책과 활동은 반혁명적이기에 국민당의 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거듭 강조하면서, 자신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결코 기존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게 아님을 밝혔다. 봉안대전이 거행된 당일 저녁, 쑹칭링은 난징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장제스는 그녀가 묵을 곳을 마련해 놓았고, 쑹메이링은 그녀에게 남아 있길 간청했음에도. 장제스가 자신을 이용할 그 어떤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장제스 앞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복잡한 당내 분쟁, 여전히 딴마음을 품고 있는 군벌, 중국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열강, 게다가 눈엣가시인 공산당. 이런 상황에서 쑨원은 그에게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버팀목과 같았다. 그가 봉안대전에 온갖 심혈을 기울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쑹칭링과 장제스, 두 사람은 쑨원으로 인해 서로 대립하면서도 쑨원으로 인해 그날 한 장소에 모였다. 훗날 쑹칭링은 중국 대륙에 남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쫓겨 간다. 이후 중산릉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음은 물론, 2005년에 타이완의 국민당 주석 롄잔(連戰)이 참배한 것을 필두로 타이완 주요 인사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다. 올해 타이완에서는 민진당 주석 차이잉원(蔡英文)이 총통에 취임했다. 그녀는 5월 20일, 타이베이 총통부에 걸린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차이잉원은 역대 그 누구보다 탈중국화와 타이완 정체성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이 내세우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은 매우 견고해 보인다. 쑨원의 유해가 안치된 자동관(紫銅棺)은 시멘트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일찍이 항일전쟁 시기에 국민당 정부는 쑨원의 유해를 충칭으로 옮기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묘혈을 폭파할 경우 유해가 손상되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장제스가 쑨원의 유해를 타이완으로 옮겨가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먼 훗날 타이완 총통이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는지 사뭇 궁금하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