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작심삼일 극복 프로젝트

(3)·끝-외국어… 부끄러움은 버리고 어학친구를 사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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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마이니치신문 서울특파원 “나는 이렇게 한국어를 공부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진행됐고 아쉬움이 많은 회담이었다, 이렇게 저는 평가합니다…. 40분에서 45분 정도 계속해서 위안부 문제를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011년 12월 18일 일본 교토에서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 두 나라 외교사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원활하지 못했다는 그 현장에 나도 있었다.

한국 청와대 측의 브리핑을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은 나는 도쿄발 교토행 신칸센에 올랐다. 하지만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겨우 5개월째. 브리핑을 제대로 이해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차라리 청와대가 언론 브리핑을 거부하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음이 정말로 무거웠다.

청와대 대변인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무려’ 15분에 걸쳐서 일본 언론을 상대로 브리핑을 했다. 나는 대변인 바로 옆에 있었지만 대변인의 설명은 물론, 일본 기자들의 한국어 질문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녹음기를 들고 서 있는 것뿐이었다.

서울의 한 어학원에서 원어민 강사로부터 영어수업을 받고 있는 직장인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의 한 어학원에서 원어민 강사로부터 영어수업을 받고 있는 직장인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지만 교토까지 출장을 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도쿄로 돌아가는 신칸센 안에서 대변인이 나눠준 간단한 보도자료를 사전과 번역프로그램을 동원해 해석했다. 하지만 단어든 문법이든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A4 2장이었지만 도쿄까지 가는 2시간 동안에도 마치지 못했다.

이 한심한 사건은 이후 내가 한국어를 공부해야만 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이날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을 녹음한 파일은 이후에도 몇 번 들었는데, 들을 때마다 아는 부분이 늘어나 있었고 나름 기뻤다.

한·일정상회담 취재 계기로 한국어 공부
한국어와 처음 만난 것은 교토 한·일 정상회담 5개월 전인 2011년 7월이다. 정치부 기자이던 나에게 회사에서 난데없이 서울특파원을 제안했다. 한국어를 잘하는 기자들의 독차지라고 생각했던 자리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외교담당 기자로서 특파원은 꿈이었지만 “어학연수를 보내줄 시간 여유가 없으니 부임할 때까지 1년 반 안에 어학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에는 초조해졌다.

우선 NHK 라디오의 한국어강좌 교재를 구입했다. 의원회관에서 정치인들의 사무실을 돌면서도 한국어강좌 방송시간이 되면 벤치에 앉아 교재를 폈다. 휴일에 가족과 함께 외출해서도 차 안 옆자리 아이가 잠들면 녹음한 강좌를 틀었다.

특파원 부임을 앞두고 정치부에서 외신부로 이동하면서는 일본 거주 20년이 넘은 한국인 여성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는데, 내 상황을 설명하고 뉴스 듣기도 함께 연습했다. 뉴스를 모두 알아들을 수준은 아니었지만 업무에 필요한 단어·표현·발음에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1분 정도 되는 리포트를 들으면서 받아쓰기를 했다. 거듭해서 들어도 알아듣기 어려운 곳이 많았고, 그럴 때면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있나 싶어 짜증이 치밀기도 했다.

한국어가 확 늘어난 계기는 한국 드라마였다. 주로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들을 보는데, 처음에는 자막을 켰고 두 번째는 자막을 껐다. 사전과 문법책을 옆에 두고 모르는 단어나 표현을 노트에 적어두었다. ‘알면 알수록 무서운 사람이었다’ 같은 표현도 알아듣게 되고, 입으로 직접 말하면서 통째로 외우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운 표현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가능한 한 자연스러운 표현을 익히기 위해, 한국어 선생님이나 한국 신문의 도쿄특파원들과 주고받은 이메일과 카카오톡 메시지를 출력해 노트에 붙여두었다. 밑줄을 긋고 소리를 내어 읽기를 반복했다. 서울특파원으로 오기 전에 실력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한국어능력시험을 봤다. 중급인 4급에 합격하고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2013년 4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신고식’을 치렀다. 앞으로 살게 될 용산 아파트까지 택시요금이 2만원 정도 나왔고, 나는 도쿄에서 환전한 5만원 지폐를 내밀었다. 중년의 택시기사는 “이렇게 큰돈을 내면 어떡해요. 은행에서 잔돈을 바꿔오세요”라고 했다. 택시는 나를 태워 은행 앞으로 갔다.

은행으로 들어가니 오후 4시 영업시간이 끝나기 직전이었다. 잔돈으로 바꿔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표현이 나오지 않았다. 어찌어찌해서 돈을 바꿔 택시로 돌아오니 그 사이 요금은 더 올라가 있었다. 기사에게 항의 한마디 못하고 암담한 기분으로 서울에서의 첫날을 마쳤다.

오누키 특파원이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노트.

오누키 특파원이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노트.

친구에게 몇 번이고 물어 노트에 정리
나의 상사로 함께 일하는 서울지국장은 학생시절부터 한국어를 공부한 베테랑이었다. 일본 언론사 서울특파원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창한 사람이었다. 그밖에 다른 일본 언론사의 기자들도 대부분 1년간 어학연수를 거쳐 어느 정도 한국어 실력이 있는 상태에서 부임했다.

나는 지국장 옆에서 말하기가 매우 부끄러웠다. 취재 전화를 할 때도 서툰 한국어 실력 때문에 상대방에게 면목이 없었고, 이 때문에 미리 사전을 찾아가며 질문을 준비했다. 상대의 얘기에 별달리 반응하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하면, 전화를 거는 것조차 힘들 때도 있었다.

이런 나에게 지국장은 “너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거리낌 없이 질문하지 않냐. 언어가 유창해지는 데는 적극성이 아주 중요하다. 앞으로 움츠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활해라”고 했다. 나는 부끄러움과 싸웠다. 기자회견, 인터뷰, 회식 등의 이런저런 자리에서 가능한 한 말을 하면서 익숙해지려고 했다.

학원의 경우 처음에는 일주일에 4일까지도 갔지만, 업무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숙제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이 바빠지면서 학원은 더욱 멀어졌고 나의 선생님은 서울지국의 옆자리 한국인 직원, 한국인 친구들로 바뀌었다. 되도록 자연스럽게 말하고 싶었기에 문법수업보다는 실생활에서 얻는 것이 많고 즐거웠다. “이럴 때는 한국어로 뭐라고 해요”라고 몇 번이고 물어, 노트에 적어두었다.

서울특파원에게 가장 중요한 한·일관계나 북한문제 관련 단어나 표현은 신문이나 방송 스크립트 등의 문장을 보고 외웠다. 하지만 마감시간이 있는 직업의 특성상 들리지 않는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항상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듣기만으로도 이해가 되었고 지난해 1월에는 한국어능력시험 6급에 합격했다. 더 이상 ‘나는 어학연수를 거치지 않았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어 기뻤다.

영어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내가 왜 한국어는 포기하지 않았을까. 물론 혼자서 취재가 가능한 수준에 단시간에 이르러야 한다는 압력이 가장 큰 이유다. 그리고 한국어의 울림에 대한 동경이다. 남자든 여자든, 장소가 어디든, 직업이 무엇이든, 한국인이 말하는 한국어를 들으면 ‘발음이 깨끗하고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였으니 교과서가 아닌 한국인 친구와의 대화를 공부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여러 번 포기했던 영어와 달리 기초부터 시작한 한국어는 공부할 때마다 실력이 늘었기 때문에 성취감이 컸던 것도 이유다.

아직도 택시에 오르면 “한국어를 잘하시네요”라는 말을 듣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언젠가 “일본인이세요? 전혀 모르겠네요”라는 말을 듣는 날이 올 때까지, 즐겁게 공부해 나갈 것이다.

<오누키 도모코/일본 마이니치신문 서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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