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달려도 몸 가벼워지고 정신 맑아져… 거리 늘리면 성취감과 행복감이
달리기는 나의 삶을 지탱하는 끈이다. 우리나라에서 마라톤대회 참가가 일반 시민들에게도 개방된 때는 1995년이었다. 그 전까지는 마라톤 대회는 엘리트 선수들의 기록 각축장에 불과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가 몰려왔고,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에서 ‘다시 한 번 일어서자!’는 슬로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통해 건강과 자신감을 회복하고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찾고 심리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달리기 열풍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5㎞, 10㎞, 하프코스와 풀코스에 도전했다. 러너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나 역시 한동안은 치과에서 물잔 속에 물과 함께 넣어 사용하는 의치 소독용 발포제처럼, 완주의 순간만 생각해도 행복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와 그냥 웃음이 나는 행복감에 젖어 지냈던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달리기 열풍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 세계적으로 달리기에 관한 관심은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설 때 크게 늘어난다고 한다. 사회학적으로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설 때쯤이면 의식주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된 상황에서 국민들의 관심사 중에 건강과 관련된 항목이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건강을 지키는 데 가장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달리기를 좋아해서 평지나 산에서 달리기를 즐겼고, 아침마다 한강 둔치나 학교 운동장에 나가 10㎞ 정도 달리기를 계속해 왔다. 그러다가 마라톤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1997년 춘천마라톤 대회에 처음 참가하여 30㎞까지는 무난하게 달렸지만, 이후로는 탈진하여 100m 달리고 100m 걷기를 반복하며 3시간47분에 완주를 했다.
짜릿한 ‘주자의 도취감’에 긍정적 중독
명색이 의사이면서도 달리기가 심폐기능의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정도의 얄팍한 지식 이외에 장거리 달리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다. 그리고 엘리트 선수가 아닌 일반 시민들인 마스터스 주자들은 참고할 만한 자료들이 거의 없는 상태였고, 자신의 경험이 최고의 지식이었다. 예를 들어 다리가 묵직하고 전신이 뻣뻣해질 정도로, 소위 알통이 밸 정도로 달려야 근육이 강화된다는 근거없는 조언이 확실한 것인 양 누구나 믿을 정도였다.
먼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의사들의 친목모임(현재의 사단법인 한국달리는의사들의 전신)을 만들고, 함께 운동을 하며 논문을 찾아 읽고 토의하기도 했다. 일반 주자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정기적으로 열어 무료로 달리기 부상 예방 및 치료법, 달리기와 영양 같은 중요한 정보들을 나누고 전파하기도 했다. ‘레이스 패트롤’이라는 주로에서의 응급상황에서 의료진이 올 때까지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봉사활동도 시작했다. 레이스 패트롤이라는 말은 스키 패트롤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말이다. 우리가 만든, 미국에는 없는 한국식 조어로, 일본에 수출까지 했다.
요즘에는 달리기 동호회와 인터넷 사이트들이 많이 활성화되어 있어 초보적인 지식을 얻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체계적이고 스포츠의학적인 내용을 충실히 담고 있는 자료를 구하기도 쉬운 편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 맞는 훈련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주관적인 조언에 대충 의존할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방법을 찾아서 자신의 조건에 맞게 변형하고 스스로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달리기도 중독이 된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마약처럼 몸과 마음을 파괴시키는 질병적인 중독이 아니라 심신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강화시키는 긍정적 중독이라는 차이가 있다. 20~30분이나 4~5㎞ 정도를 달리고 나면 땀이 슬슬 나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유연하게 풀리며, 전신의 감각은 붕 뜬 것 같은 쾌감에 젖어 새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착각에 젖기도 한다. 이런 ‘주자의 도취감(runner’s high)’은 달리기를 할 때 느끼는 짜릿한 쾌감이나 행복감으로, 힘든 달리기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몸 안에서 분비되는 강력한 진통제인 몰핀과 유사한 ‘엔돌핀’이라는 천연 물질 때문이다. 이런 도취감이나 행복감을 경험해 본 주자들은 다시 한 번 그런 상태에 빠지기 위해 달리기를 계속하게 된다. 하루라도 달리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하고 좀이 쑤셔서 어쩔 줄을 모르게 돼 달리기에 빠져든다. 운동 중독, 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즐거운 긍정적 중독 상태에 빠지게 된다.
2~3주의 걷기로 몸의 적응단계 필요
달리기를 통해 자신과 한 번 겨뤄보겠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머뭇거리지 말고 일단 한번 뛰어보자. 뛰다 힘들면 걸으면 된다. 그렇게 걷다 달리다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걷는 거리보다 달리는 거리가 더 길어졌음을 알고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한 주에 10% 전후로 달리는 거리나 시간을 늘리면 된다. 걱정할 것 전혀 없다. 힘들면 걷자. 걷는 것은 움직이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일종의 ‘행동 간 휴식’인 셈이다. 오늘 건강을 위해 나왔건, 자신과의 정신적 경쟁을 위해 나왔건 주로로 나선 사람들은 모두 매우 행복한 사람들이다. 조금만 달려도 몸은 가벼워지고 정신은 맑아지고 기분은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만 주의하자. 뼈와 인대, 힘줄과 근육들은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단계적으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묵혀둔 상태라면 더욱 조심할 일이다. 먼저 2~3주의 걷기를 통해 뼈와 근골격계가 달리기로 인한 스트레스에 적응할 준비를 시켜야 한다. 당장 내 곁을 스쳐 달려가는 주자를 뒤쫓아 내 마음대로 내달리고 싶은 충동이 머리 끝까지 올라오더라도 참아야 한다. 일단 마시기만 하면 마라토너가 될 수 있는 마법의 물약 같은 것은 세상에 없다. 며느리도 모르는 숨은 비법이나 빠르게 질러가는 나만의 지름길은 없다는 말이다. 꾹 참고 4주만 주 4회 정도 달리다 걷다를 하면 10㎞ 대회는 쉽게 완주하고, 8주(2개월)만 훈련하면 하프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으며, 12주(3개월)를 참고 열심히 노력하면 마라톤 풀코스를 제한시간인 5시간 안에 완주할 수 있다. 힘들 때는 그냥 걷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부담 가질 필요가 없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훨씬 더 건강하고 쾌활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달리기는 평생 할 수 있는 운동이다. 제대로만 관리하면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누워 있다가 죽는다는 의미)’가 가능하다. 달리기를 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많이 알게 된다. 내 한계를 알게 되고. 또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도 있다. 계속해서 그런 한계들을 높여나가다 보면, 한계라는 것이 깨지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슴 떨리는 감동도 느낄 수 있다. 달리기를 계속하면 성실성과 의지, 꾸준한 노력과 자존감이 강화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덕목들이 요즘 힘든 세상에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는지 생각해 보자. 잠깐의 유혹을 뿌리치고 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동윤/마라토너. 한국 달리는 의사들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