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용품 유통사의 디자이너인 그는 디자이너와 SNS 채널 운영에 콘텐츠 생산에 번역까지 도맡고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이 식상한 문구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한 유통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한주연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회사에서 디자이너 역할은 물론, 일본어를 번역하고 컨텐츠를 제작해 SNS채널에 업로드 한다. 언뜻 들으면 상당히 심플해 보이는 일들인 것 같지만 3가지의 우선순위를 가리는 일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것 같다. 전혀 일 못하는 사람이 아닌 듯한데, 일못이라고 주장하는 한주연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녀는 마니아층이 두꺼운 생활용품 유통사의 디자이너다. 스스로 찌라시 제작자 겸 스팸글 양산자라 소개한다. 자세히 말해달라 재차 요청했더니 디자이너와 소셜네트웍 서비스 채널 운영에 콘텐츠 생산에 번역까지 도맡고 있다고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렇게 다양한 업무를 하다 보면 우선순위를 정하기 어려울뿐더러 분명 실수가 생길 것 같다. 아니 정말 일에 지쳐 하기 싫을 법도 한데, “내가 맡은 일은 다른 분이 대신해줄 수 없다. 오프라인을 담당하는 디자이너는 나밖에 없다!!”며 활짝 웃는다.
그런데 이렇게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 다양한 업무의 퀄리티를 평균치로 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일의 퀄리티를 높이면 내가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 적당한 선으로 맞추고 있다.” 대체 누가 이 사람을 일못이라 할 수 있는가?
그녀는 일못 유니언을 우연히 발견해 가입했다고 한다. 가입 당시 입사 초기로, 회사일로 아주 힘들 때라서 안식처를 찾은 느낌이었단다. 회사에서 신입 그래픽 디자이너를 뽑았기 때문에 디자인 보조 역할인지 알고 입사하니 메인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픽 디자인은 공부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그런 위치가 되어버렸다.
입사 후 바로 메인 디자이너가 덜컥 된 것이다. 신입사원에게는 너무 가혹하다. 밤샘을 밥 먹듯이 하였단다. 회사의 SNS계정을 운영하다 우연히 회사 직원들이 작성해놓은 본인의 뒷담화까지 보게 되었다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된다. 그 뒷담화는 일을 너무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과로에 인한 육체적인 피로감을 토로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회사 내 나의 포지션이 웹 팀과 오프라인 팀 사이에 끼여 있어 소속감이 애매하다. 또 한 명의 선배 디자이너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지만, 디자인을 이끄는 리더가 없어 지금 하는 디자인에 대한 확신이 없다.”
힘들고 고단한 직장생활을 해내는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친구들이 해외 유명 디자인 상을 받았다. 나도 언젠가 자신의 디자인으로 작품을 만들고, 또 이를 통해 인정을 받고 싶다.” 꿈꾸고 있는데 ‘일못’일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중학교 때 미술이 평균 성적을 까먹어서 학원에 갔으나 미술학원 선생님으로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이 아이는 미술에 소질이 없으니 시키지 말아라’라는 평가였다. 하지만 반전은 그 학원 선생이 ‘일못’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학원은 현재 존재하지 않고 망했다고 한다. 진정한 ‘일못’은 미술학원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그 선생님이 저평가한 학생은 일본 3대 미대 중 하나를 졸업해 한 회사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디자이너가 됐다. 그리고 일본계 회사에서 꿋꿋이 생존하고 있다. 뭔가 일본 유학과 관련해 더 질문을 해보았지만 생각보다 밝은 대답은 듣지 못했다. “유학한 사람 학력은 중요하지 않다. 외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전 회사 중역의 한마디에 많은 회의감을 느꼈단다.
누군가의 눈에는 분명 ‘일못’이 아닌 ‘일잘’이라고 느껴지지만 본인 스스로는 ‘일못’이라고 자평하는 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비뚤어진 메시지가 아닐까? 스스로 자신 있게 ‘일잘’이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사회가 오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해본다.
김종수 일 못하는 사람들 유니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