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고소로 해결하려는 사회, 범죄자만 양산하는 국가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우리사회 일상의 분쟁들이 최근 들어 범죄로 처벌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개인 간의 다툼에 수사기관이 개입하는 ‘민사의 형사화’는 처벌의 위협으로 시민들을 겁준다. 특히 권력기관은 업무방해죄와 명예훼손죄를 ‘전가의 보도’ 처럼 사용하며 사회를 통제하려 든다.

2009년부터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에서 피자집을 하던 김모씨는 2011년 장사가 어려워지면서 자금사정이 나빠졌다.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김씨는 대출업체에서 500만원을 빌렸다.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일용노동자로 전업했다. 그 사이 빌린 500만원과 이자도 갚지 못했다. 어찌할 줄 모르던 김씨에게 검찰에서 연락이 왔다. 수원지검은 돈을 안 갚은 김씨가 형법 347조 사기죄에 해당한다며 기소했다.

화장품 회사에 다니던 이모씨는 2010년 회사에서 퇴직했다. 이전까지 월수입이 1000만원이었지만 형편이 나빠져 돈을 빌려야 했다. 2010년 대출업체에서 1150만원을 빌렸고, 113만원까지 갚았다. 하지만 다른 빚까지 있던 이씨는 모두 갚지 못했다. 의정부지검 역시 이씨가 사기범이라며 기소했다. 이후 콜센터에 취직한 이씨는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씨의 국선변호인은 법정에서 “돈이 없어서 못 갚은 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했다.

2009년 YTN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사장실 앞에서 피켓을 들고 사측에 해고자들의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김종욱 전 전국언론노동조합 YTN지부장 등 3명은 업무방해 등 혐의로 지난해 기소됐다.  / 김창길 기자

2009년 YTN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사장실 앞에서 피켓을 들고 사측에 해고자들의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김종욱 전 전국언론노동조합 YTN지부장 등 3명은 업무방해 등 혐의로 지난해 기소됐다. / 김창길 기자

채무불이행에 대한 유죄와 무죄의 차이
똑같이 돈을 갚지 못한 두 사람이지만 피자집을 하던 김씨는 무죄였고, 화장품 회사에 다니던 이씨는 유죄였다. 무죄를 선고한 수원지법은 “차용 당시에는 변제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다면 그 후에 차용금을 변제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단순한 민사상의 채무불이행에 불과하다”고 했다. 유죄를 선고한 의정부지법은 “변제능력이 없음에도 변제하겠다고 말한 행위는 기망행위에 해당하므로 유죄”라고 했다. 법률가들의 말이라 듣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원래 돈이 없는 사람이 돈을 빌리게 마련인데,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김씨에게 무죄가 선고됐다고 빚 500만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평생에 걸쳐 독촉당하고 돈을 갚아야 한다. 반대로 이씨에게 유죄가 선고됐지만 대출회사가 얻은 이익도 없다. 계속해서 독촉하지 않으면 나머지 1000만원을 받을 수가 없다. 오히려 대출회사는 민사 판결을 받아서 그 판결문을 가지고 두 사람의 재산을 압류해 처분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재산이 없었다. 그러자 대출회사는 검사가 전화를 걸면 이들이 겁을 먹고 다른 빚을 얻어 갚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이씨가 전과자가 된 것뿐이다.

돈을 안 갚거나 못 갚는 것을 법률용어로 채무불이행이라고 한다. 국가가 개입되지 않은 사인 사이의 일이어서 민사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에 사기죄라는 형벌권을 동원해 국가가 개입하면 형사가 된다. 법률가들이 그럴 듯한 이유를 만들어서 이론을 구성해내지만 근본은 ‘돈 못(또는 안) 갚은 죄’인 셈이다. 법과대학 교수들은 ‘민사의 형사화’라고 말하는데, 풀어서 말하면 개인 사이의 일에 감옥을 운영하는 국가가 끼어드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월 형법 241조 간통죄를 위헌으로 결정해 없앴다. 부부 사이에 일어난 일을 해결하는 데 검사와 감옥을 동원하지 못하게 했다. 간통죄의 위헌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던 일부 사람들은 간통이 합법화됐다고 오해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여전히 민사상 불법행위이기 때문에 이혼사유이고, 금전으로 배상해야 한다. 달라진 것은 검사와 감옥이 동원되지는 않는다는 것뿐이다. 이른바 ‘간통의 비범죄화’다. 간통죄의 폐지는 시민들에게 “불법과 범죄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표지이야기]고소로 해결하려는 사회, 범죄자만 양산하는 국가

헌재는 지난 9월 24일에도 ‘폭력행위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 등이 과잉 처벌이라며 위헌을 결정했다.

형벌 관련법에 대한 헌재의 잇따른 위헌 선고를 계기로 우리 일상의 분쟁이 너무나 많이 범죄로 정해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도 범죄이고, 부동산을 팔겠다고 중도금까지 받았다가 마음이 바뀌어도 범죄다. 500만원을 받지 못한 손해도 곧바로 범죄로 만들어야 속이 풀리는 사회가 된 것이다. 더욱 문제는 이런 민사의 형사화가 우리 의식을 지배하면서, 정치권력이 자신을 비판하는 시민의 작은 잘못도 범죄로 처벌하는 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는 점이다. 수사기관이 개인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게 되고, 처벌 위협으로 사회가 통제되는 것을 당연시한다.

민사분쟁을 범죄로 만드는 데는 대법원도 한몫해왔다. 국회가 처벌이 가능한 범죄를 늘리는 사이 사법부도 사회를 처벌로 통제하는 데 앞장서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동산 계약해지 범죄’다. 사회가 계약을 지키도록 감옥을 동원하는 것이다. 2012년 경남 거제시에 사는 이모씨는 자신이 소유한 잡종지 661㎡를 3억2000만원에 팔기로 하고, 계약금 5000만원을 받은 다음, 중도금 7000만원을 받았다. 더 좋은 상대방이 생겨 다른 곳에 팔았다가 지난해 창원지법 통영지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계약금만 받았다면 두 배만 물어주고 끝났을 일이다.

불법과 범죄 차이 깨우쳐준 간통죄 폐지
부동산 계약해지 범죄는 대법원의 판례로 1986년 시작된 것인데, 법률가들도 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처벌조항은 형법 355조2항 배임죄다. 법학 교과서를 보면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로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범죄’다. 왜 부동산을 파는 사람이 자신의 사무가 아니라 타인의 사무를 담당한다는 것인지, 거래를 중단해 상대방이 손해를 입었다고 해도 그게 왜 처벌 대상인지 학계의 의문이 잇따른다. 이 판례에 비판적인 법원 관계자는 “시골 노인들이 부동산 업자에게 속아 헐값에 계약을 하고도 처벌이 두려워 되돌리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인정 판결로 다시 논란이 된 한국의 동성애 처벌법은 국가의 지나친 간섭으로 지적받는 대표적인 조항이다. 군형법 92조의6에 따라 군인은 영내외를 불문하고 동성과 성관계 또는 애무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을 받는다. 이 조항은 군인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며 위헌제청됐지만 2011년 헌법재판소는 합헌으로 결정했다. 당시 소수의견은 “당사자 간의 자발적 합의에 의한 음란한 행위가 처벌되는 불합리성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 조항은 ‘군이라는 공동사회의 건전한 생활과 군기’를 이유로 남아 있다.

국가의 개입과 분쟁의 범죄화는 정치권력이 시민들을 겁주어 사회를 통제하려는 목적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의 파업을 업무방해로 처벌하는 것이다. 헌법 33조가 보장하는 핵심 기본권인 파업권은 그 속성이 업무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가는 그동안 형법 314조1항 업무방해죄를 동원해 처벌해 왔다. 5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중죄다. 회사의 노조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는 물론이고, 국가가 적극 개입해 형사처벌까지 한다. 이 때문에 국제노동기구(ILO)도 파업에 대한 업무방해죄의 적용을 중단하라고 꾸준히 권고해 왔다.

2011년에 와서야 대법원이 업무방해죄의 요건을 까다롭게 했다. 이 판결도 2010년 헌법재판소가 업무방해죄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합헌을 결정하면서 “쟁의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밝힌 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행위가 전격적이고, 혼란이 심대하고, 손해가 막대한 경우에만 처벌토록 했다. 하지만 이 추상적 선언은 이후 판결에서 구체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고 허물어졌다.

대표적으로 2014년 8월 대법원은 코레일의 운송업무를 방해했다며 기소됐다가 무죄를 선고 받은 철도노조 조합원 22명에 대해 유죄 취지로 파기해 대전지법에 돌려보냈다. 2011년 판결에 비추어봐도 불법이라며 축소해석했다. 그러더니 지난 7월 부산고등법원은 집회에 참가해 사회를 보거나 기자회견을 열고, 농성장에서 지지발언을 한 것에 대해 업무방해 방조죄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다. 2010년 11월 현대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시위에 동참한 금속노조 미조직비정규직 최병승 사업국장의 사례다.

[표지이야기]고소로 해결하려는 사회, 범죄자만 양산하는 국가

중도금 치른 부동산 매매 해약도 범죄
소비자 불매운동도 처벌 대상이다. 2008년 5월 촛불집회 이후 생긴 ‘조중동 폐간 국민캠페인’ 회원들이 조선·중앙·동아일보 광고주들에게 광고를 중단하라고 운동을 벌였다. 검찰은 이들을 공갈 및 강요 혐의로 기소해 대법원에서 유죄를 받아냈다. 조국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이 판결에 대한 논문에서 “2000년 가수 서태지 팬들이 SBS ‘한밤의 TV연예’ 광고주 불매운동을, 2005년 황우석 사태 당시 황 교수 지지자들이 MBC ‘PD수첩’ 광고주 불매운동을 벌였지만 처벌받지 않았다”며 “소비자 불매운동은 헌법적 기본권이며 독점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는 무기”라고 비판했다.

정치권력이 전가의 보도처럼 빼드는 것이 명예훼손 처벌이다. 형법 307조의 명예훼손죄는 1항에서 진실 적시의 경우를, 2항에서 허위 적시의 경우를 각각 처벌토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치인에 대한 진실을 공개했는데도 명예감정을 훼손했다며 유죄로 처벌된 사례도 부지기수다. 박경신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진리의 발견과 알권리를 제한하고, 허위 적시에 대해 반론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적시해야 하는데 이를 막고, 민사상 손해배상으로 해결할 문제인데도 불필요하게 처벌을 동원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이사국인 유엔인권이사회는 2011년 일반논평 34호에서 “모든 가입국은 명예훼손의 비형사화를 고려해야 하며, 형법은 가장 심대한 사안에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가토 다쓰야(加藤達也)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에 대한 마지막 공판이 10월 19일로 예정돼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일본 한 신문사의 서울특파원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면 그런 식으로 기사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가토 전 지국장을 처벌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만약 한국 기자가 아베 총리에 대해 그런 기사를 써도 처벌될 가능성이 없다. 일본에도 명예훼손죄가 있지만 한국과 달리 친고죄인데, 아베 총리가 정치적 부담을 안고 고소할 리가 없어서다.” 한국의 강력한 명예훼손 범죄화는 우리 모두의 정치적 자유를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는 셈이다.

채무재조정과 신용회복 상담을 받으려는 서민들이 서울 명동 신용회복위원회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나라 신용불량자 상당수는 사기 전과자이기도 하다. 경제사정이 안 좋아진 상태에서 돈을 빌리면 갚을 뜻이 없다고 법원이 보기 때문이다.  / 김영민 기자

채무재조정과 신용회복 상담을 받으려는 서민들이 서울 명동 신용회복위원회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나라 신용불량자 상당수는 사기 전과자이기도 하다. 경제사정이 안 좋아진 상태에서 돈을 빌리면 갚을 뜻이 없다고 법원이 보기 때문이다. / 김영민 기자

“국가형벌권은 마지막의 마지막이어야”
국가가 나를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끼지만, 채무불이행에 대한 사기 처벌처럼 내 손해를 해결해주는 데 유혹을 느낀다. 국무회의는 지난 9월 30일 고용부 장관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근로자의 임신·출산 정보를 받게 하는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국회를 통과하면 내년부터 임신·출산 중인 여성 근로자 정보를 건보공단으로부터 통보 받아 해고·이직 여부와 출산휴가 사용 여부를 추적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은 피해 당사자가 직접 신고를 하지 않으면 위법행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이유다. 고용노동부는 “임신·출산을 이유로 근로자를 해고할 경우 자체적으로 적발해 처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개정안은 다수의 지지를 받지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겠느냐는 반론이 나온다.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서울고법 산하의 한 판사는 “차라리 민사소송을 통해 복귀명령을 받아내고, 이행강제금을 부과하는 것이 신속하고 효율적이다. 형사처벌은 시간이 걸리는 데다 벌금 등 처벌을 감수하고서라도 해고해서 얻는 이익이 큰 사업자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 한 공익위원도 “어느 사업주가 출산 때문에 해고했다고 쉽게 인정하겠느냐. 각종 이유를 댈 것이고, 형사처벌은 법관에게 80~90%의 확신을 줘야 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우리도 부당노동행위 여부를 판단할 때 결과가 행정처분을 넘어 형사처벌 대상일 때는 더 많은 증거를 요구하게 된다”고 했다. 사용주에 대한 형사처벌이 반드시 노동자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처럼 형사처벌이 반드시 손해와 불이익을 구제해주는 것은 아니다. 특히 시민들이 사인 간의 분쟁에는 형벌권이 개입해주기를 바라면서, 정치권력이 형벌권을 동원해 국민을 억압하는 것만 반대하기는 어렵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처벌권은 일정한 수준에서 이뤄져 둘은 완전히 다르게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인 간 분쟁과 정치적 통제가 쉽게 구분되지도 않는다. 헌법재판소 연구관 출신의 노희범 변호사는 “개인의 재산과 신체를 국가가 함부로 억압하는 것은 현대국가가 아니다. 국가형벌권은 마지막의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마지막 선이 어딘지, 다시 말해, 국가의 한계가 어디인지는 그 사회 시민의 결단에 달려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처벌 만능이 되었나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형사처벌이 얼마나 더 많은지 통계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외국에서는 범죄가 아닌 것이 범죄인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가 꾸준한 것으로 미뤄볼 때 상당한 수준인 것은 분명하다. 명예훼손, 모욕, 파업처벌, 간통, 혼인빙자간음 등이 외국에서는 보기 힘든 대표적인 범죄다. 이들 상당수는 일제강점기에 이식됐지만 일본은 법개정을 통해 없애거나 적용하지 않아 사문화됐다.

우리 사회가 분쟁의 범죄화에 관대한 것은 시민사회가 부실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한 부장판사는 “서양에서도 근대 이전에는 제대로 된 민·형사 구분도 없이 국가가 나서서 모든 일을 해결했다.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는 원칙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는 근대를 식민지를 통해 이식 받으면서 그런 경험을 갖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더욱 문제는 그런 범죄화가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대기업 내부문제의 경우 주주가 문제를 제기해서 민사소송을 거는 것이 맞지만 한국 재벌을 상대로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경영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게 올바르지만 한국에서는 한계가 명백하다. 검찰이라도 나서 배임으로 처벌하고 빼돌린 회삿돈을 찾아내지 않으면 경제질서가 잡히지 않는 세월을 보내 왔고, 여전히 달라진 게 없다는 얘기다.

또 형사절차가 가장 값싸고 신속한 분쟁해결 수단이라는 점도 시민들의 분쟁 범죄화 지지의 원인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서양에서는 한 번 재판을 시작하면 쉽게 끝나지 않는다. 검찰과 법원은 효율적인 분쟁해결 수단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변호사를 동원해 계약서를 촘촘하게 작성한다. 영국 유학 중에 집을 빌리는 데 작성한 계약서가 100쪽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이런 나라에서는 검찰을 동원하고 정답 없는 재판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과 사회 신뢰도가 다른 한국이 하루아침에 사적 분쟁의 비범죄화로 이전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법무법인 민의 주두수 변호사는 “재판을 해본 사람들은 민사로 가서는 신속하게 해결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검찰에서 처벌을 하겠다고 겁을 줘야 자백하고 끝이 난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처벌이 강해지길 바라고, 무슨 일만 있으면 양형을 높이라는 주장이 쉽게 나온다”고 했다. 한국의 양형이 전반적으로 상당히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비범죄화와 함께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 제도 등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영미권 제도인 징벌적 손해배상은 사적인 분쟁에서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손해배상을 물린다. 최근 불거진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과 관련해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판결이 전망되는 것도 미국이 채택하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 때문이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