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은 실패했다. 이로 인해 연나라는 위험해졌다. 노한 진왕은 연나라를 공격했다. 수도는 함락되고 연나라 왕과 태자는 요동으로 달아났다. 연왕은 희단의 목을 베어 진나라에 바친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진나라는 다시 연나라를 쳤고, 5년 뒤 연나라는 멸망한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 왕 영정은 중국을 통일한다. 시황제(始皇帝), 그는 제국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했다. 수도 함양에서 제국의 동서남북으로 뻗은 치도(馳道)를 따라 시황제는 천하를 순행하면서 곳곳에 자신의 공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태산 석각에서부터 낭야·지부·동관·갈석·회계 석각에 이르기까지 한 목소리로 진시황의 공덕을 칭송하고 있다. 이 칭송을 관통하는 논리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켰기에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천하가 태평해졌다는 것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전해지는 석각의 글을 꼼꼼히 읽다보면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2002)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진나라가 육국을 차례대로 접수해나가던 전국시대 막바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는 진왕의 야욕을 꺾기 위한 자객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진시황을 칭송하는 석각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진왕을 죽이고자 했고 죽일 수 있었던 잔검(殘劍)은 마지막 순간에 그 기회를 포기한다. 몇 년 뒤 그는 진왕을 죽이고자 하는 또 다른 자객 무명(無名)을 만류한다. 이때 잔검이 무명에게 건넨 두 글자가 ‘천하’다. 무명은 결국 진왕을 죽일 수 있는 가까운 거리(10보)까지 접근하게 되지만 마지막 순간 그 기회를 포기한다. 천하를 통일해 백성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이가 바로 진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진시황의 상. 시안 병마용박물관 앞
연나라 태자 희단이 자객 보내
진시황이 통일 후 세운 비석과 21세기의 영화 <영웅>에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천하’의 논리는 결코 전국시대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후적으로 재해석된 논리다. 그 논리의 근거는 ‘통일’된 현재의 상황이다. 전국시대는 ‘전국(戰國)’이라는 말에 걸맞게 진·초·제·위·한·조·연의 전국칠웅이 치열하게 다투던 시대였다. 진왕 영정 당시에 이미 초강대국이었던 진나라는 육국에 사신(死神)과 같은 존재였지 평화를 가져다 줄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여섯 나라는 사신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약한 나라끼리 힘을 합치든지, 강한 나라에 빌붙든지. 당시에 전자의 구도가 합종(合從)이었고 후자의 구도가 연횡(連衡)이었다. 여섯 나라가 진나라에 대항하는 합종이든, 여섯 나라가 진나라에 사대하는 연횡이든 그 중심은 진나라였다. 진왕 영정은 서른이 되던 기원전 230년, 여섯 나라 가운데 처음으로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위기는 고조됐다. 강국이 약국을 병탄하기로 작정한 이상 약한 나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항복하거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뿐이다. 그것도 안 될 경우에 개인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객을 쓰는 것이었다.
기원전 227년, 함양궁에서 그 유명한 형가(荊軻)의 암살 사건이 벌어진다. ‘진왕 암살 프로젝트’를 기획한 사람은 연나라의 태자 희단(姬丹)이다. 그는 어린시절 영정과 사이가 좋았다. 두 사람 모두 조나라의 볼모로 지내던 시절이었다. 이후 영정은 진나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고 희단은 진나라의 볼모가 된다. 그런데 영정은 옛 친구를 박대했고 희단은 이를 원망하며 연나라로 도망쳐왔다. 이런 개인적 원한이 있는 데다가 진나라가 곧 연나라를 침략할 것이라는 근심이 더해져 희단은 결국 암살을 기획하게 된다. <사기> ‘자객열전’에서는 이 일을 아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함양궁에서 암살 사건이 발생한 당일 이전의 몇 가지 장면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 장면은 연나라에서 펼쳐진다. 먼저 주인공 형가가 등장한다. 그는 본래 위나라 사람이었는데, 진나라의 공격으로 위나라가 멸망 상태로 전락하자 이곳저곳 유랑하다가 연나라로 오게 됐다. 그리고 축(筑)을 아주 잘 타는 고점리(高漸離)와 막역지우가 된다. 형가가 연나라에서 지내게 된 지 얼마 뒤 태자 희단이 진나라에서 연나라로 도망쳐 돌아온다. 진나라로 인해 연나라까지 위험해지자 희단은 대책을 고민한다. 이러던 차에 진나라 장수 번오기(樊於期)가 연나라로 망명한다. 진나라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번오기를 흉노에 보내라는 신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희단은 그를 받아들인다. 이어서 희단은 연나라에서 은거하고 있던 전광(田光)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의논한다. 전광은 희단에게 자신의 노쇠함을 말하며 대신 형가를 추천한다. 전광은 형가를 찾아가 희단을 찾아가라고 한 뒤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죽음으로써 비밀을 지키고자 함이었다. 자신을 찾아온 형가에게 희단은 당부한다. 진왕을 위협해 여러 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 최상이며,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찔러 죽여야 한다고.

<형가자진왕>을 촬영한 헝뎬의 진왕궁 세트
함양궁에서 암살 실패한 형가
이후 진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하고 연나라 남쪽 경계까지 이른다. 시간이 촉박했다. 진왕이 기꺼이 만나고자 하도록 할 수 있는 미끼가 필요했다. 바로 번오기의 목과 연나라의 가장 기름진 땅인 독항(督亢)의 지도. 형가는 직접 번오기를 찾아간다. 번오기는 일가족이 진왕에게 몰살되고 목에 황금 천근이 걸린 상황이었다. “장군의 목을 바치면 진왕이 기뻐하며 만나줄 것이니 그때 진왕의 가슴을 찌르겠다”는 형가의 말을 듣고 번오기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떠나기 직전 희단은 형가의 조수로 진무양(秦舞陽)을 선택하는데, 열셋에 살인을 했을 정도로 담이 큰 인물이었다. 사실 형가는 함께 가려고 했던 친구가 따로 있었기에 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희단은 형가가 혹시 마음이 변해서 후회하며 시간을 끄는 게 아닌지 의심하며 진무양을 먼저 보내려 한다. 이에 화가 난 형가는 바로 떠나게 된다.
두 번째 장면의 배경은 역수(易水) 강변이다.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구나. 장사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고점리가 축을 타고 그 반주에 맞춰 형가가 노래한다. 이는 장송곡이자 출정가다. 진왕을 죽이고자 떠나는 이 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전송하러 나온 이들이 모두 눈물 흘리며 우는 가운데 형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세 번째 장면은 드디어 진나라의 함양궁이다. 진왕은 연왕이 진나라의 신하가 되길 원하며 번오기의 목과 독항의 지도를 바치고자 사자를 보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뻐하며 형가 일행을 함양궁으로 불러들인다. 운명의 순간이 드디어 다가왔다. 형가는 번오기의 목이 든 상자를 받들고 진무양은 독항의 지도가 든 상자를 받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진무양은 안색이 변한 채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그럴 만큼 피를 말리는 순간이다. 하지만 형가는 태연하다. 그는 진무양이 북방 오랑캐 땅의 비천한 사람이라 천자를 뵌 적이 없어서 떠는 것이라고 둘러댄다. 진왕은 아무 의심 없이 형가에게 지도를 가져오라고 한다.

형가가 진왕을 암살하려는 장면을 묘사한 화상석
이제 사건의 하이라이트다. 진왕이 지도를 펼친다. 둘둘 말린 지도가 다 펼쳐지는 순간, 비수가 보인다. 형가는 왼손으로 진왕의 옷소매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쥐었다. 비수가 몸에 닿기 전에 진왕은 놀라 일어나고 형가가 붙잡고 있던 소매는 뜯어진다. 진왕은 칼을 차고 있지만 너무 길어서 뽑을 수가 없다. 궁실 안에 있는 기둥을 돌면서 달아나던 진왕을 살린 건 시의(侍醫) 하무저(夏無且). 하무저는 약주머니를 형가에게 던져 잠깐의 시간을 벌었다. 이때 누군가 외친다. “왕께서는 칼을 등에 지십시오!” 이렇게 하면 긴 칼을 뽑을 수가 있다. 칼을 뽑은 진왕은 형가의 왼쪽 다리를 잘랐다. 형가는 쓰러지면서 비수를 진왕에게 던진다. 비수는 빗나가 구리기둥에 박힌다. 진왕은 형가를 다시 여덟 번 찌른다. 형가는 구리기둥에 기댄 채 울분을 터트린다. “일이 실패한 건 너를 사로잡고자 했기 때문이다. 너를 위협해 약조를 얻어내어 태자에게 보답하고자 했다.” 몰려온 신하들이 형가를 죽인다.
희단이 진왕을 그냥 죽이라고 주문했다면 형가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단은 진왕을 위협해서 빼앗긴 땅을 돌려받고 앞으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희단이 선택한 진무양 대신 원래 형가가 함께하고자 했던 인물이 사건 현장에 있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암살은 실패했다. 나라를 위해 도모한 일이건만 결국 이로 인해 연나라는 위험해졌다. 노한 진왕은 연나라를 공격했다. 수도는 함락되고 연나라 왕과 태자는 요동으로 달아났다. 이때 조나라 왕이 연나라 왕에게 서신을 보내온다. 태자를 바치면 진왕이 용서할 것이라고. 연왕은 희단의 목을 베어 진나라에 바친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진나라는 다시 연나라를 쳤고, 5년 뒤 연나라는 멸망한다.
연나라가 멸망한 이듬해 진왕은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가 된다. 그는 더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또 있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형가의 지음(知音) 고점리다. 형가의 사건 이후 숨어살던 그는, 어느 날 다시 축을 연주하며 자신의 소문이 진시황의 귀에 들어가게 한다. 고점리의 정체를 알게 된 진시황은 그의 눈을 멀게 만든 뒤 곁에 두고 축을 타게 한다. 고점리는 점점 진시황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어느 날 그는 축 안에 납덩어리를 감춰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진시황을 내리쳤다. 하지만 진시황을 맞히지 못했고 진시황은 고점리를 죽였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진시황은 이전의 육국 출신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웅>에서 무명의 최후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
형가의 암살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로 <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1997)이 있다. 이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천카이거 감독은 진나라 왕궁 세트 설계에 4년, 제작에 8개월을 쏟았다고 한다. 진왕궁 세트는 중국의 할리우드라고 불리는 저장(浙江)성의 헝뎬(橫店) 영화촬영소에 있다. 이곳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은 진왕궁 세트를 보며 그 옛날 함양궁에서 벌어졌던 암살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형가·희단·고점리·전광·번오기·진무양, 그리고 하무저와 진왕, 누구에게는 진왕이 반드시 죽여야 할 인물이고 누구에게는 진왕이 반드시 살려야 할 인물이었다. 또 누구에게는 통일이 선이었고 누구에게는 그 통일이 악이었다. 통일이 선이었던 입장에서는 진왕이 영웅이고, 통일이 악이었던 입장에서는 형가가 영웅이었을 터. 그래서 장이머우의 영웅이 누군지 궁금해진다. ‘천하’가 궁극의 지향점인 이상 영웅은 진시황이 될 수밖에 없다. <영웅>에서 무명은 자발적으로 진왕 암살을 포기하고 밖으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 그를 향해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진다. 온몸으로 그 화살들을 받아내는 무명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장함 그 자체다. 그 비장미에 도취돼 잠시 착각하게 된다. 무명이 영웅이라고. 어쩌면 장이머우가 말하는 영웅이 그일 수도 있다. 대아(大我)인 천하를 위해 소아(小我)를 기꺼이 희생하는 영웅이라는 의미에서. 진시황이 영웅이든 형가가 영웅이든 <영웅>의 논리는 국가주의 그 자체다.
지난 9월 3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리 70주년 대회’는 56문의 대포가 발사하는 예포로 시작됐다. 중국의 공식 행사에는 중국의 56개 민족을 상징하는 56이라는 숫자 상징이 빠지지 않는다. 일찍이 전국칠웅은 진시황에 의해 통일제국이 됐다. 진나라는 통일의 위업을 이룬 것이지만 여섯 나라에는 망국의 통한이었다. 그 어떤 사후적 논리로도 이를 부인할 수는 없다. 하나만 더 생각해보자. 일본에 이토 히로부미는 영웅이고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토 히로부미가 원수이고 안중근이 영웅이다. 만약 내가 일본인으로 태어났다면? 또 만약 내가 중국의 소수민족인 티베트인이나 위구르인으로 태어났다면? 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이 필요 없는 시대, 우리에겐 그런 시대가 필요하다. 누군가를 내 발밑에 둬야 하거나, 누군가를 찔러 죽여야 내가 살 수 있거나, 누군가를 위해 내가 빗발치는 화살을 맞으며 죽어야 하는 그런 시대는 아웃시켜버리는 모두가 바로 진정한 영웅일 터. 그런 영웅들의 사회에서는 히틀러도 스탈린도 무솔리니도 호찌민도 나올 수 없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