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민의 당나라 건국을 견인한 여섯 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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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수집광이었던 열강의 후안무치보다 더 무시무시한 건 자국의 문화재 반출에 빌미를 제공하고 심지어는 지대한 도움을 준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다. 소릉육준 석각은 온전한 게 하나도 없다. 반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쪼개졌기 때문이다.

“하늘이 수(隋)나라의 어지러움을 없애려 하시니 상제께서 육룡(六龍)을 보내셨도다.” 송나라 시인 장뢰는 ‘소릉육준(昭陵六駿)’이라는 시에서 당 태종 이세민의 여섯 준마를 이렇게 칭송했다. 시안에서 70㎞ 떨어진 리취안(醴泉)에 태종과 문덕황후의 합장릉인 소릉이 있다. 능 북쪽의 제단에는 말이 새겨진 석각(너비 2m, 높이 1.72m)이 동서 양쪽으로 각각 세 개씩 세워져 있다. 정관 10년(636)에 문덕황후가 병사하자 태종이 소릉을 조성하라는 조서를 내린 뒤 만들어진 이것이 바로 소릉육준 석각이다.

태종의 묘인 소릉에 있는 6개의 석각
“짐이 탔던 전마는 짐을 위난에서 구해주었으니, 그 진짜 모습대로 새겨서 좌우에 두도록 하라.” 태종은 자신과 생사를 함께했던 여섯 준마를 이렇게 돌에 생생히 새김으로써 영원히 함께하고자 했다.

이세민이 여섯 준마와 생사를 함께한 건 618년부터 622년까지다. 618년, 수 양제(煬帝)가 죽고 이연(李淵)이 당나라를 세웠지만 여기저기서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을 평정하는 데 있어서 당나라의 정예 기병부대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연은 수나라 말에 태원유수(太原留守)를 지내면서 돌궐을 상대로 많은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다. 이때 그는 돌궐의 기마전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기병을 양성했다. 당시로서 가장 효율적인 군사술을 도입함으로써 건국의 기반을 다진 셈이다. 이세민은 직접 정예부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해 싸우면서, 당나라의 확고한 기반을 다지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소릉육준’ 석각 복제품. 왼쪽부터 삽로자·권모왜·백제오

‘소릉육준’ 석각 복제품. 왼쪽부터 삽로자·권모왜·백제오

삽로자, 권모왜, 백제오, 특근표, 청추, 십벌적, 이세민과 함께 용감히 적진으로 돌격한 여섯 준마의 이름이다. 돌궐어와 한자를 합성한 이들 명칭에서 마지막 글자는 말의 빛깔과 관련돼 있다. 자는 자줏빛 말, 왜는 주둥이가 검은 말, 오는 검은 말, 표는 누른 바탕에 흰 털이 섞인 말, 추는 검푸른 털과 흰 털이 섞인 말, 적은 붉은 말이다. 거청융(葛承雍)의 연구에 의하면, 삽로·백제·특근·십벌은 돌궐의 고위 관직에 해당하는 단어다. 이처럼 말에 고위 관직의 직함을 붙인 것은 말에 대한 칭송이자 말의 주인 이세민에 대한 칭송이라 하겠다. 권모왜와 청추는 말의 산지와 관련된 명칭이다. 권모는 돌궐어 ‘khowar’에서 유래한 것으로, ‘북사(北史)’에서 권모휘(權於麾, 파키스탄 북부에 위치)로 음사한 나라다. 따라서 권모왜는 권모휘에서 온 주둥이가 검은 말이라는 의미다. 청은 돌궐어 ‘cin’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자로는 ‘秦’ 혹은 ‘靑’으로 음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청추는 대진(大秦) 즉 로마에서 온, 검푸른 털과 흰 털이 섞인 말이라는 의미다.

여섯 준마 중에서 이세민이 처음으로 함께한 말은, 설인고를 평정할 때 탔던 백제오다. 다음은 송금강(宋金剛)을 평정할 때 탔던 특근표, 그 다음은 왕세충(王世充)과 두건덕(竇建德)에 맞서 싸울 때 탔던 십벌적이다. 이후 청추를 타고 두건덕을 평정했으며, 삽로자를 타고 왕세충을 평정했고, 마지막으로 권모왜를 타고 유흑달을 평정했다. 이렇게 해서 당나라의 통일이 온전히 완성됐다.

비림박물관 석각예술실의  소릉육준

비림박물관 석각예술실의 소릉육준

원작 석각 2개는 낯선 미국 땅으로
소릉육준 석각의 여섯 준마는 죄다 세 갈래의 말갈기에 꼬리는 하나로 묶여 있다. 이것은 당나라 전마의 특징인데, 이들 석각은 안장·등자·고삐까지도 모두 당나라 전마의 양식을 핍진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제 여섯 준마 중에서 삽로자와 권모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한다. 왜 하필 이 둘인지는 자연스레 이야기될 것이다.

동서 양쪽에 세워진 석각 중에서 서쪽 첫 번째 말이 삽로자다. 이 석각에는 유일하게 사람이 새겨져 있다. 말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빼내고 있는 그는 구행공(丘行恭)이다. <신당서> ‘구행공전’에 의하면, 621년 당나라 군대와 왕세충의 군대는 낙양에서 결전을 치렀다. 이세민이 수십 기의 기병을 이끌고 적진을 살피러 갔다가 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삽로자를 타고 너무 앞서 달린 탓에 후방과 연계가 끊긴 이세민은 적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삽로자마저 적의 화살에 맞고 위태로운 순간, 구행공이 나타나 화살을 쏘며 적이 감히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 구행공은 삽로자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자신의 말을 이세민에게 준다. 구행공은 한손으로는 부상당한 삽로자를 끌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칼을 휘둘러 적을 벴다. 두 사람은 무사히 본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석각에 새겨질 만한 사연이 아니겠는가.

삽로자, 펜실베이니아대학 박물관 소장

삽로자, 펜실베이니아대학 박물관 소장

소릉육준 석각에서 삽로자 옆에 있는 말이 권모왜다. 두건덕이 이세민에게 죽임을 당한 뒤, 유흑달은 두건덕의 병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한동왕(漢東王)이라 자처했다. 622년 3월, 이세민은 유흑달의 식량 조달 루트를 차단하고 성 안의 양식이 떨어지길 기다리면서 낙수 상류에 제방을 쌓았다. 양식이 떨어진 유흑달의 군대는 싸우러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유흑달의 주력군이 강을 건널 때 당나라 군대는 상류의 방죽을 터뜨렸다. 이만 명 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이가 수천 명이고 만 명이 넘는 이가 당나라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유흑달은 나머지 천여 명을 데리고 돌궐 지역으로 도망쳤다. 권모왜의 몸에 박힌 화살 아홉 대는 이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말해준다. 권모왜는 육준 가운데 전투 중에 죽은 유일한 말이기도 하다.

소릉에서 영원히 이세민과 함께해야 할 여섯 준마는 죄다 제자리에 없다. 지금 소릉에 있는 육준 석각은 복제품이다. 각각의 무게가 2.5톤이나 되는 이 석각들이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넷은 시안 비림박물관 석각예술실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에 없는 삽로자와 권모왜는 1914년에 미국으로 반출돼 현재 펜실베이니아대학에 소장돼 있다. 나머지 넷 역시 해외로 반출될 위기를 겪은 뒤 1918년에 산시성도서관에서 보관되다가 1949년에 비림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이다.

열강이 세계 각국의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열을 올리던 20세기 초, 예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소릉육준 석각 역시 그 마수를 피할 수 없었다. 타국의 문화재를 어떻게든 소유하려는 제국의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이용해 한몫 잡으려는 문화재 중개상의 욕망,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욕망이 아우러진 결과 수많은 문화재가 제자리에서 박리됐다. 수 백 년 수 천 년 지내온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떼내어진 고귀한 문화재들이 머나 먼 이국땅의 아무개 박물관에 강제 이식된 것이다.

권모왜, 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 소장

권모왜, 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 소장

지금은 펜실베이니아대 박물관에
삽로자와 권모왜가 소릉을 떠나게 된 건 1913년 5월 어느 날이다. 프랑스 상인의 밀반출 시도는 다행히 소식을 듣고 달려온 주민들에 의해 저지된다. 이후 두 석각은 산시 정부에서 보관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해외로 반출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당시 중국은 너무나 약한 상태였다. 여기저기 군벌이 난립해 있었고, 이제 갓 탄생한 공화국의 총통은 황제를 꿈꾸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는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차지하고 있었다.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화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에 그의 둘째아들 위안커원(袁克文)은 그곳에 채워 넣을 유물을 수소문한다. 그러다가 그는 산시독군(督軍)이자 위안스카이 총통부 경위군(警衛軍)의 참모관이었던 루젠장(陸建章)으로부터 자신이 삽로자와 권모왜를 갖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후 두 석각은 베이징으로 운반됐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위안스카이의 화원에 자리잡지 못한 채 1914년에 골동품상 루친자이(盧芹齋)에게 넘어간다. 루친차이는 결국 이 두 석각을 미국으로 반출한다.

미국으로 반출된 삽로자와 권모왜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수장고에 임시로 보관되어 있던 어느 날, 펜실베이니아대학 박물관 관장 고든(George Byron Gordon)이 루친자이의 소개로 이 석각을 보게 된다. 이때가 1918년 3월 9일. 중국 컬렉션에 몰두하고 있던 고든은 루친자이가 제시한,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인 15만 달러를 지불하고서라도 이것을 손에 넣고자 했다. 그는 이사장 해리슨에게 간곡한 편지를 쓰는 등 박물관 이사회를 설득하는 한편 사방으로 자금 조달에 나섰다. 1920년 말, 자선가의 기부금을 유치한 펜실베이니아대학 박물관은 최종 협상 끝에 12만5000 달러에 삽로자와 권모왜를 사들였다. 이렇게 해서 두 석각은 해리슨 로툰다(The Harrison Rotunda), 즉 차이니즈 로툰다(the Chinese Rotunda)로 더 잘 알려진 둥근 천장의 중국 컬렉션관에 고이 모셔지게 되었다. 고든과 루친자이의 거래는 펜실베이니아대학 박물관에서 근무했던 주슈친(周秀琴)이 ‘태종 황제와 그의 여섯 전마’라는 글을 2001년에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석각의 입수 과정이 도마에 오르자, 펜실베이니아대학 박물관 측은 합법적 거래였다고 주장하지만 중국인들은 그 거래가 밀반출한 ‘장물’을 구입한 불법이었다고 확신한다.

1907년의 ‘소릉육준’ 석각

1907년의 ‘소릉육준’ 석각

루친자이는 국민당 유력자였던 장징장(張靜江)의 도움으로 골동품 회사를 차리고서 중국의 도자기·서화·청동기·석각을 서구 각 대학 박물관과 골동품 수집가들에게 팔아넘긴 인물이다. 해외로 반출된 중국 문화재의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인이 보기엔 영락없는 매국노가 서양인의 눈에는 동양문화를 전파해준 사자이자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문화수집광이었던 열강의 후안무치보다 더 무시무시한 건 자국의 문화재 반출에 빌미를 제공하고 심지어는 지대한 도움을 준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다. 소릉육준 석각은 온전한 게 하나도 없다. 반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쪼개졌기 때문이다. 청나라도 위안스카이 정부도 국민당 정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샤반(Edouard Emmanuel Chavannes)이 1907년에 촬영한, 방치된 상태의 소릉육준 석각은 앞으로 닥칠 험난한 운명을 예고하는 듯하다.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한 나라 탓에 여섯 준마에는 쪼개진 상처가 남았다. 비림박물관의 삽로자와 권모왜는 복제품이기에 쪼개진 흔적이 없다. 그런데 그 상처 없음이 오히려 더 큰 상처다. 쪼개진 흔적을 품고 있는 여섯 준마를 한곳에서 볼 수 있게 될 날을 기대한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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