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의 가슴을 쥐어뜯는 생생한 이야기… 개별의 기억을 사회의 기억으로 남겨
〈금요일엔 돌아오렴〉, 유가족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가득찬 이 책이 나온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기적이었다. 내가 태어난 후 만난 가장 큰 고통을 견디며 기록을 해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이야기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야기하다가 기절할 것 같은 깊은 울음을 토해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도 얼마나 힘들었던가. 한 분 인터뷰하고 와서 이틀간 쓰러져 있으면서 몇 번을 망설였다. ‘아, 우리가 과연 이분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기록해낼 수 있을까.’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 그 고통의 범위와 깊이가 훨씬 크고 깊었다. 단순히 304명의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들이 우리 곁에서 수천개의 사건으로 매일 터지는 것 같았다. 부모에게도, 생존한 사람들에게도, 그걸 지켜보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미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의 고통이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아이들의 마지막을 생각했다. 세상에 살려달라고 절박하게 구조를 요청했으나 외면당해 버린 아이들의 외로운 죽음을. 우리의 기록작업은 그 고통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통과해 온 과정이었다.
부모님들과 작가들 사이에 신뢰 쌓여
2014년 6월에 처음으로 유가족들 총회에 가서 시민기록위 분들과 함께 작가단 단장으로 단상에 올라 많은 부모들 앞에서 약속했다. 무척 떨렸다. 떨려서 혹시나 실수를 할까봐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내겠다고. 고통 속에 놓여 있는 그분들에게 기록 이야기를 한다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갈등을 많이 했다. 평소 좋아하던 기록학자가 나에게 그랬다, “아직 아픔이 통렬히 진행 중인데 무슨 기록을 하려고 하느냐?”고. 그 말 듣고 고마우면서도 아팠다. 부모 중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래도 이게 내가, 우리 작가들이 그분들의 가장 통렬한 고통과 함께하는 방식이었다. 기록의 중요성이 부모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 될 때는 “기록하면 당신들은 명예가 남지만 우리는 뭐가 남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었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 선의가 아니게 되는 상황이 될까봐 겁이 났다.
한번은 MBC 다큐팀이 취재를 하는데 어떤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질문을 하다가 어머니의 아픈 상처를 잘못 건드린 것이다. 그 비명에 취재하던 PD가 도망가고 어머니는 숨을 못 쉬어 119 구급대원들이 출동하기도 했다. 그걸 본 뒤로 부모들 만날 때는 매번 긴장이 되었다. ‘내가 혹시 이분들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작가들이 여러 명 작업을 하니까 그 중 한 명이라도 실수를 하면 어떡하나. 실수를 해서 우리 작가단이 유가족 사이에서 문제가 되어 쫓겨나는 상황이 되면 어떡하나.’ 우려를 많이 했다. 그러나 다행히 작가들이 부모들과 잘 지내주었다. 부모와의 우정이 싹트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선의가 선의로 통했던 것이다. 부모들을 직접 만나보면 정말 평범하면서도 순박하고 좋은 분들이었다. 부모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매일 반성문을 썼다.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분들이어서 내가 기록한다는 명목으로 그분들에게 상처를 주면 안되니까 무엇이든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안 믿겠지만 사실 나는 아이들이 아직 떠나지 않고 늘 내 곁에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죽음과 삶 그 경계지점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우리집에 세월호 참사가 난 달에 들어온 아기고양이가 있다. 누가 버리고 간 고양이었다. 다른 때는 그러지 않는데 희생된 아이들의 편지와 자료를 읽고 있으면 털을 곤두세우고 꼬리를 내 리고 엄청 으르렁거리는 거다, 내가 그 편지를 다 읽을 때까지 쳐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괜찮다, 괜찮아. 형, 누나들이 좋은 사람들이라 너를 해치지 않고 이뻐해줄 거야.” 그러면서 1년을 지냈다.
전국 북콘서트 다니면서 많은 위로 받아
“책에 나온 이야기들이 다 내 이야기 같았어.” 책이 나오고 많은 유가족 분들이 당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왜 개별의 기록이 소중한가, 그리고 개별의 기억은 어떻게 사회적인 기억이 되는가를 <금돌>을 통해서 경험한 것 같았다. 책을 매개로 전국 40여개 지역으로 북 콘서트를 다녔다. 많은 시민들이 호응을 해주었다.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서 부모들도, 작가들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일반사람들도 고통스런 책이지만 다 읽고 많은 이야기를 인터넷에 남기기도 했다. 어떤 독자는 ‘정치에 무관심한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금돌’ 읽기를 권했다. ‘너무 슬퍼서 못 읽겠다는 사람도, 세월호 얘기는 이제 그만 듣고 싶다는 사람도, 모두 다 읽고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어떤 독자는 책을 읽고 나에게 다섯 장에 걸친 긴 편지와 선물을 보내주기도 했다. 자신의 꿈에 어떤 아이가 나왔는데 그 책에 나와 있는 지성이 같다는 것이다. 지성이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예쁜 베개를 선물로 주었다. 책을 통해 나누어지는 이 마음들이 정말 소중하고 좋았다. 그 좋고 선한 마음들이 나에게 세상을 견딜 힘을 주었다. 다음 작업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미래에 유가족들의 모습을 상상할 때 저희 책은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책이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과 연대를 하면서도 나는 괴로웠다. 민간 차원에서의 애도는 어느 정도 있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애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하게 상황이 나아지지가 않았다. 어떤 부모님이 아직 합의도 되지 않은 배상금을 정부가 언론에 터트렸을 때 분노하여 삭발을 했는데, 그걸 본 딸이 눈물을 흘리며 5분 동안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 딸이 대학생인데 학교 가면 친구들에게서 맨날 세월호 돈 얼마 받는다는 이야기만 들으니 정말 비참했다고, 동생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유가족들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문제가 깊어지고 있다. 생존 학생들도 만나보면 친구들이 왜 죽었는지 밝혀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엄청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 내가 죽었으면 먼저 간 친구들처럼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 아니에요” 하면서 오열했다.
며칠 전에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상복 입고 삭발하고 아이들 영정 들고 가는 부모들과 1박2일 함께 걷다 보니 엄청난 슬픔이 몰려왔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도보행진이었다. 그리고 한없이 미안했다.
“우리는 국가로부터 버려졌다. 우리를 지켜줄 곳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유가족이 이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무너진다.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과 닮아 있어 가슴이 덜컥거렸다. 부모들이 지금 구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갈수록 내가 기록하기 위해 그분들 곁에 머무르는 시간보다 외롭지 않게 있어주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아프다…….
<김순천 4·16세월호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