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치페이’ 남자만 선호? 여자도 마찬가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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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남’에게 밥 얻어먹고 찻값 내느니 차라리 각자 내고 헤어지는 게 속 편해

연애는 사람마다, 건마다 전혀 다르다. 이른바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원칙이 강하게 적용되는 영역이다. 만나고 좋아하다 싫어져서 헤어지는 사연도, 이유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개인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같은 세대 미혼 남녀들의 연애 경험을 공유하는 지점들을 여러 군데 가지고 있다. 소개팅 자리에서 ‘각자 내기’(더치페이)를 요구하는 남자가 늘어나는 현상도 그 중 하나다.

‘모태솔로’ 김덕현씨(32·가명)는 가명을 써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한 그에게 붙은 ‘모태솔로’라는 꼬리표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대학 졸업 후 번듯한 대기업에 취직해 남부럽지 않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지만, 연애나 결혼 얘기만 나오면 김씨는 입을 다문다. 절치부심하며 ‘이번만은 꼭’이라는 심정으로 소개팅에 나가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는 참담하기만 했다.

서울 남산에서 연인 한 쌍이 사랑 고백을 담아 자물쇠를 걸어둔 열쇠나무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서울 남산에서 연인 한 쌍이 사랑 고백을 담아 자물쇠를 걸어둔 열쇠나무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식사비는 남자, 커피값은 여자가 관행
얼추 세어보니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소개팅 횟수만 50번은 충분히 넘긴다. 처음 소개팅에 나갔던 대학 신입생 때나 지금이나 절차는 관행처럼 굳어져 있다. 김씨는 식사를 대접한다. 답례로 상대편 여성은 찻값을 낸다. 물론 술을 마시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는 등 예외도 있었다. 하지만 여성이 요즘처럼 아예 찻값조차 내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밥 먹은 뒤에 아예 차를 마시거나 하러 가지도 않는다는 게 맞죠. 전에는 (내가) 맘에 안 들었어도 커피 한 잔은 하고 헤어졌는데 요즘은 다들 밥만 먹고 바이바이니까.” 김씨는 인터넷에서 본 소개팅 경험담이 떠오른다고 했다. 상대편 여성에게 밥값을 각자 내자고 한 그 누리꾼은 다른 누리꾼들에게 ‘장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상대방이 밥만 먹고 냉정하게 돌아설 때마다 김씨도 밥값을 나눠 내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게 인지상정이죠. 그런 대접 받으려고 길바닥에 돈 내버리고 왔냐 싶은 기분이 들어요.” 그런 날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못 만나 아쉽다기보다는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 김씨가 생각하는 ‘인지상정’을 연구한 학자가 있다. 마르셀 모스는 사회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그의 저서 <증여론>에서 “총체적인 주고받음의 체계에서는 받은 선물에 답례를 해야 하는 의무가 포함돼 있다. 이러한 의무는 선물을 줘야 하는 의무와 그것을 받아야 하는 의무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썼다. 모스에 따르면 소개팅 자리에서 식사를 대접받고도 답례를 하지 않으면 사회를 유지시킬 의무를 저버린 셈이 된다. 그가 관찰한 원시부족사회에서 의무를 지키지 않은 결과는 명확했다. 전쟁이었다.

여성이라고 해서 이 ‘전쟁’에 응할 정도로 더치페이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 사용자 비율이 높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남성이 일방적으로 밥값을 내는 관행은 여성에게도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얻어먹기만 한 소개팅 후기를 쓰면 지탄의 대상이 된다. “맘에 안 드는 사람이면 금방 나오고 싶은데 그 사람이 돈을 다 내면 빚진 셈이잖아요. 커피값을 내더라도 액수로는 못 미치고….” 대학원생 서지혜씨(27)는 소개팅 주선자에게서 상대방 연락처를 받으면서부터 싫어도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고 말했다. 카카오톡 친구 명단에 올라온 상대방의 프로필 사진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까지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소개팅 자리에 나오기 전부터 상대방을 향한 ‘스캔’은 적잖이 진행된 것이다. 밥 먹은 뒤 차를 마실지 말지에 대한 결정도 그만큼 빨라질 수밖에 없다. 서씨는 “‘진상’ 소개팅남을 만났는데 빨리 헤어지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서 시간 허비하는 건 여자들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라며 “차라리 처음부터 반반씩 내면 미안함 없이 집에 갈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결국 남녀 모두 각자 내는 것을 선호하는데 현실의 관행은 인식이 바뀌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박정호 대구대 교수(사회학)는 “선물과 답례로 이어지는 관계는 서로간의 교류가 계속 이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데이트를 계속할지 말지에 대한 판단 자체가 급속하게 빨라진 최근에는 전통적인 증여와 교환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한편에서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남녀 성비 불균형, 시장가치 우세해져
여자친구와 지난해 가을 홍콩 여행을 다녀온 뒤 헤어진 직장인 허인씨(29)의 경우는 ‘선물’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여행 중 허씨는 유명 시계 제조업체의 여성용 시계를 샀다. 여자친구에게 몰래 선물로 주려고 산 것이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허씨는 정품 대신 모조품, 이른바 ‘짝퉁’을 살 수밖에 없었다. 꽤나 정교하게 만든 나름 ‘A급’이었기 때문에 모조품인데도 30만원 가까이나 냈다. 그러나 예쁜 시계를 선물하려는 허씨의 계획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입국하면서 공항 세관에서 ‘짝퉁’ 시계가 적발되며 물거품이 됐다. 실망한 여자친구는 허씨에게 미련 없이 이별을 통보했다.

원시부족사회의 선물경제에서는 먼저 선물을 주는 사람이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남녀 각자 1대 1의 관계에서라면 그렇다. 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의 남녀관계에서는 단순히 선물만으로 남성이 그 위상을 차지하기 힘든 요인이 하나 있다. 20~30대 여성이 귀한 것이다. 여성은 다른 남성의 ‘선물’과 비교하고 더 나은 선물을 주는 남성을 고를 수 있는 입장에 있다. 모스의 표현대로라면 ‘감정가치’에 비해 ‘시장가치’가 우세해지는 상황이다.

1982년생인 ‘모태솔로’ 김덕현씨의 동년배 남성 인구는 41만8504명(추계)이다. 여기에 남성의 초혼 평균연령이 여성에 비해 약 3세 높다는 점을 감안해 1982년생 남성의 평균적인 배우자로 1985년생 여성을 짝지어 보자. 32만3418명(추계)의 여성이 모두 한국 남성과 결혼한다고 쳐도 9만5086명의 남성은 짝을 찾지 못한다. 22.7%, 적어도 수치상으로는 5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이 한국인 여성을 짝으로 맞을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씨는 연애, 나아가 결혼을 못하게 되더라도 ‘시대를 잘못 태어나서’라는 슬픈 변명은 할 수 있게 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평균 초혼연령은 남 32.2세, 여 29.6세였다. 한국 남성들의 결혼대란은 김씨 또래의 1982·1983년생이 평균 초혼연령을 맞이하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셈이다. 결혼 연령대의 성비 불균형은 1982년생 남성에게서 가장 극심하지만 그 전후 연령대도 비슷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29세에서 35세까지의 결혼적령기 남성인구에 비해 24세부터 30세까지의 여성인구는 42만4701명이 적다. 이 연령대 남성들 가운데 15.2%는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기 어려울 수 있다.

결혼대란의 근원은 이들이 태어난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부터 남아선호에 따른 선택 출산이 극심해짐에 따라 1986년에는 성비가 최초로 110을 넘어서 111.7을 기록했고, 성비가 높아지는 추세는 계속 이어져 1990년 116.5를 찍었다. 2002년 110.0을 기록한 뒤로는 성비가 차츰 감소하는 추세지만 1980년대 초반부터 누적된 성비 불균형은 올해를 기점으로 결혼대란이 더욱 악화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게다가 여성의 미혼율이 높아지는 경향은 결혼대란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혼인동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 44세 남성의 미혼 비율은 23.8%, 44세 여성의 미혼 비율은 18.9%에 이를 것으로 예측됐다. 2010년의 44세 남녀 미혼자 비율이 남 10.1%, 여 4.6%였던 점과 비교하면 급격한 상승세다.

남성 미혼 청년층에게 코앞에 닥친 연애·결혼대란에 대해 뾰족한 대책은 없는 실정이다. 국제결혼이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연애와 결혼마저도 매매와 유사하게 흘러가는 세태에 대한 경고가 나오는 정도다. “아직 모든 관계가 구입과 판매라는 점에서만 분류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시장가치 외에 감정가치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모스의 결론처럼 현대 한국의 연애 현상에도 감정가치가 유지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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