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독일은 왜 탈핵으로 급선회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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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메르켈 총리는 ‘10년 이내 전부 폐지’라는 윤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탈핵 노선으로 180도 급선회했던 것이다. 핵발전소의 안전성에서 한국보다 우위라고 자타가 인정하던 독일이 탈핵 노선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후쿠시마 사고 3일 후인 2011년 3월 14일, 독일의 메르켈 정권은 노후 핵발전소 8기의 가동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해 5월 30일에는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이하 윤리위원회)의 답신을 근거로 2022년 말까지 국내 핵발전소 17기를 단계적으로 폐쇄하는 탈핵 방침을 재확인하였다.

독일에서 약 20년간에 걸쳐 벌어져 왔던 탈핵 찬반논쟁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후쿠시마 사고와는 다른 의미에서 국제사회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핵발전소의 이용에 호의적이었던 메르켈 총리가 2010년 12월 원자력법을 ‘수정’하여 핵발전소의 수명 연장(평균 12년)을 확정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메르켈의 조치는 심지어 탈핵의 종료기간도 수정 전보다 더 단축하는 등 마치 새 시대의 서막을 여는 듯한 극적인 반전으로 보였다.

독일의 반핵운동가들이 2011년 3월 후쿠시마 사고 나흘 뒤 베를린 의회 근처에서 “원전의 스위치를 꺼라”는 구호를 제시하며 시위하고 있다. | AP 경향자료사진

독일의 반핵운동가들이 2011년 3월 후쿠시마 사고 나흘 뒤 베를린 의회 근처에서 “원전의 스위치를 꺼라”는 구호를 제시하며 시위하고 있다. | AP 경향자료사진

체르노빌 사고 때 방사성 물질의 확산에 따른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핵발전소를 유지했던 독일이 정작 이렇다 할 인적·물적 피해가 없었던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탈핵 방침을 더욱 가속화시킨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핵발전소의 안전성에 대한 불안이었다. 이는 2011년 6월 연방의회에서 메르켈 총리가 “(구소련과는 달리) 일본처럼 기술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도 핵발전소의 리스크를 안전하게 제어할 수가 없다”고 말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독일 핵발전소들도 독일 원자력안전위원회(RSK)가 실시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과했다. 그럼에도 메르켈 총리는 ‘10년 이내 전부 폐지’라는 윤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탈핵 노선으로 180도 급선회했던 것이다. 핵발전소의 안전성에서 한국보다 우위라고 자타가 인정하던 독일이 탈핵 노선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핵산업 수출시장의 기술강국
독일은 원래 핵산업 수출시장의 강국이었다. 1957년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기술을 토대로 개량·개발한 핵발전소를 아르헨티나(1968년)를 시작으로 네덜란드·스위스·브라질·스페인 등에 수출했다. 심지어 1975년에 수출한 브라질의 경우에는 농축·재처리 공장을 포함한 핵연료 주기시설의 수출 계획도 있었을 정도였다.

독일의 탈핵은 핵발전소 사고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반핵운동 ▲녹색당의 등장 ▲지방분권체제의 민주주의 같은 요인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서냉전의 최전선이었던 서독에서는 핵전쟁 가능성에 대한 공포 및 불안 때문에 서독의 핵무장 계획(1958년 3월)과 연합군의 핵무기 배치에 대한 거센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55년 5월에 주권을 회복한 구서독은 핵발전소 개발을 위한 기초적 연구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1963년까지 방사성 폐기물의 최종처분장을 건설하는 방침까지 결정한다. 한편 공업화 및 자동차 사회의 도래 등에 따른 공해·환경파괴 때문에, 사민당(SPD)의 브란트 정권은 다양한 환경대책의 도입과 함께 1971년 세계 최초로 환경교육을 실시한다. 환경교육의 보급으로 환경보호 의식이 높아진 시민들이 환경정책의 충실·강화를 요구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1973년에는 핵발전소(Wyhl) 건설 예정지를 반대파(포도재배 농민)가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독일 최초의 핵발전소 반대운동이었다. 그런데 당시 반대의 주된 이유는 방사선 피폭의 불안보다는 냉각탑에서 나오는 증기가 가져올 기후변화의 영향이었다. 결과적으로 건설허가의 취소판결(1977년 3월)로 이어진 반대파의 승소는 전국 각지의 핵발전소 반대운동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핵발전소의 소송(1977년)에서는 방사성 폐기물 처분 능력의 확보를 건설의 전제조건으로 하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게다가 최종처분장(Gorleben), 고속증식로(Kslkar), 재처리공장(WAW) 등의 관련 시설도 격렬한 반대운동에 직면하게 된다.

독일 정부는 전후의 고도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핵발전소의 적극적인 확대 정책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슈미트 정권(1974~82년)은 석탄산업에 대한 지원 정책을 강화하는 한편, 재정 압박과 반핵운동 때문에 핵발전소의 신설을 사실상 동결했다. 미국 스리마일섬(TMI) 사고로 반핵운동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게다가 풍요한 검은 숲(Schwarzald)에 고사(枯死) 등의 막대한 피해를 가져온 산성비 문제, 고속도로·공항 건설에 의한 자연파괴 등이 시민의 환경의식을 더욱 고취시켰다.

70년대 후반 경제성장 및 핵미사일 배치에 적극적이었던 슈미트 정권에 실망한 진보적 시민들이 환경보호와 군축에 중점을 두는 새로운 정당의 창설을 시도한다. 1980년 1월에 탄생한 녹색당이 그것이다. 그리고 녹색당의 노선이 현실을 우선하는 소프트전략으로 바뀌면서 폭넓은 지지층을 획득하게 된다. 한편 녹색당의 확대를 우려한 사민당(SPD)도 종래의 추진파에서 핵발전소 신설 반대(1984년)로 돌아섰고, 체르노빌 사고 후에는 폐지로 방향 전환을 하였다. 약 1000㎞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사고는 반대운동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독일의 에너지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후쿠시마 사고로 핵발전소 수명 단축
이윽고 1998년 10월에 사민당과 녹색당의 연합정권이 발족하여 ‘핵발전의 조기 철수’를 정부 방침으로 정했다. 그에 따라 2000년 4월 14일 정부·전력회사 사이에 ‘세계 최초의 탈핵 방침’이 합의되었다. 하지만 전력회사와의 법적소송을 피하기 위해 핵발전소의 수명기간(32년)에 다른 핵발전소의 수명(총발전량)을 더할 수 있는 편법을 도입한 탓으로, 실질적으로 폐쇄시점이 2021년보다 몇 년간 더 연장될 수 있는 절충안이었다.

그런데, 메르켈 총리는 2009년 9월 기민당과 자민당(CSU)의 제2차 메르켈 정권 때 탈핵 방침의 수정을 본격적으로 시도한다. 즉, 장기에너지계획의 발표(2010년 9월)로 재생가능 에너지의 확대를 강조하는 한편, 과도기적 에너지라는 명목으로 핵발전소의 연명책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가 발생하면서 메르켈 총리는 수명 연장을 취소했고, 녹색당은 주(州)의 총리까지 처음 배출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하게 된다.

한편 연방국가 독일에서 핵발전소 인허가는 주정부의 권한이다. 연방정부에는 전국적인 원자력정책의 결정·안전규제·방사선방호의 규제권이 있다. 연방정부는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의 선정에는 관여해도 입지 및 건설 중지의 정식 결정은 기본적으로 주의 재량이다. 즉, 주정부가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방정부의 핵발전소 추진을 따라갈 인센티브가 없다는 얘기다. 한국·일본과는 달리 공공시설을 정비하는 특별지원제도(발주법) 등과 같은 금전적 혜택(?)도 없다.

마지막으로, 독일 사회의 특징으로서 에너지정책의 결정 과정에 다양한 이해관계자(시민·지자체·환경단체·전력회사 등)들이 참가하여 투명하게 토론하는 제도(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환경·핵발전소 등에 관한 정보 부족을 메워온 매스컴 및 환경교육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덧붙이면, 핵발전소가 과소지역의 바닷가에 입지한 국내와 라인 강변에 입지한 독일처럼, 입지환경의 가시(可視)화 차이가 시민의 사고(思考)를 변화시켰을지도 모른다.

<일본 마쓰야마대 경제학부 교수>

장정욱 교수의 ‘탈핵을 꿈꾸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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