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도서정가제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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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 오프라인 중고매장 운영… 1년 안 된 신간도 30% 이상 싸게 판매

“책방 접는 김에 10원 한 장이라도 건질까 해서 와봤지.”

전모씨(74)는 헌책방 주인이다. 20년 가까이 책을 사고, 또 팔아왔다. 책방 손님들에게 셀 수 없이 헌 책을 팔아왔지만, 자신이 서점에 책을 파는 건 처음이다. 승합차에 싣고 온 책들을 내리느라 한겨울에도 전씨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온라인서점 알라딘이 운영하는 오프라인 중고서점 앞에 차를 댄 전씨가 여남은 차례나 지하에 있는 서점을 오르내리기를 되풀이하고서야 책 내리기를 겨우 마쳤다. 그동안 서점 점원은 부지런히 전씨가 가져온 책의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그러나 가져온 책을 모두 팔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략 470여권을 실어온 전씨가 서점에 판 책은 고작 100여권에 불과했다. 책값으로 받은 18만원을 손에 쥐고 다시 300여권의 책을 차에 실으며 전씨가 말했다. “그래도 깨끗하게 보관해온 책들을 골라서 왔는데 매입이 안 되면 파지로 넘길 수밖에 없는 게 아까워.” 중고서점 점원이 안내해준 대로 다음부터는 인터넷으로 매입 가능한 책을 확인한 뒤 골라서 실어오면 수고는 덜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갈 곳 잃은 책들이 종잇값으로 넘어가는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헌책방이 사라져가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러나 대형 온라인서점의 중고서점 매장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를 봐선 딱히 헌책의 매력이 사라졌다고 하긴 힘들다. “당연히 우리 책방에 오면 (알라딘 중고서점처럼) 컴퓨터로 책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매끈하게 진열돼 있는 것도 아니지. 그런데 이제는 책을 팔러 오는 손님도 없으니 자연히 사러 오는 손님도 없고…. 남은 책만 먼지 쌓이는 거지.” 애초에 20년 전 고물상에 넘어온 책들이 아까워 모으다 보니 헌책방을 열게 된 전씨의 입장에서는 대형서점이 운영하는 깨끗한 중고서점 매장으로 옮기는 고객들의 발길을 되돌리기 힘들다.

서울 종로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 종로점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종로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 종로점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인터파크·예스24도 오프라인 진출 시도
도서정가제가 전 분야의 도서로 확대 적용된 이후에도 중고도서는 정가제를 피해 살아남았다. 도서정가제 시행 이전부터 출판·서점업계에서는 중고도서 전문매장이 특수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온라인과 오프라인 간 가격 차이가 미미해지면서 오프라인 서점의 경쟁력도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에 인터넷 온라인서점들의 오프라인 진출도 본격화될 조짐이었다.

시장의 전망은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이미 19개의 오프라인 중고매장에다 온라인으로도 중고서적을 판매하는 체계를 구축해 놓은 알라딘은 중고서적 분야에서는 입지를 단단히 굳힌 상태다. 같은 인터넷서점업체인 인터파크와 예스24도 다양한 형태의 오프라인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서점은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분류돼 대기업 서점업체는 오프라인 서점을 열 수 없지만 법의 틈새를 이용한 오프라인 마케팅은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인터파크가 서울 명동에 연 오프라인 서점은 명목상으로는 도서대여점 형태를 띠고 있다. 새 책을 한 권당 2000원에 빌려볼 수 있다. 문학, 여행 및 에세이, 자기계발이나 경제·경영 관련 서적 등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분야의 책을 저가에 대여한다는 점에서 중소 출판사를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게다가 ‘현장 수령’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된 책 외에도 대부분 분야의 책들을 사실상 판매하고 있다. 예스24가 ‘전자책 전시’라는 목적을 내걸고 서울 강남에 연 오프라인 매장에서 현장 수령 방식으로 오프라인에 진출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 동네 중소서점을 살리기 위한 도서정가제의 취지를 무색케 하고 있어 서점업계는 ‘꼼수 영업’을 중단하라고 반발하고 있다.

알라딘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한 중고서점 영업에서도 경쟁은 격해지고 있다. 교보문고, 예스24 등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들까지 중고서적 매입 및 판매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시행한 것이다. “출판업계에서는 이전부터 새책을 알라딘 같은 중고서점 업체에 중고인 것처럼 넘겨 덤핑해 팔던 일부 출판사들의 관행이 있었다. 가격만 낮추는 게 아니라 책의 질까지 떨어뜨리며 전체 시장을 교란시키던 행위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한기호 소장은 일본의 출판업계가 중고서적을 싼 값에 되파는 형식으로 운영된 ‘북오프’ 식의 서점체인이 등장한 이후 크게 침체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고서점 간의 가격 경쟁이 뜻하지 않게 도서정가제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알라딘의 온라인 중고숍에서는 출간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신간이 30% 이상 싼 가격으로 올라와 있다. 중고숍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 1위인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는 지난해 7월 출간됐지만 최상급의 중고서적이면서도 정가인 1만6800원보다 30% 싼 1만1800원에 팔린다. 같은 달에 출간된 중고서적 베스트 4위 <나의 한국현대사> 역시 정가(1만8000원)보다 33% 싼 1만2200원에 팔린다. 하지만 알라딘이 이들 중고도서를 매입하는 가격은 크게 낮다. 독자가 최상급 중고책을 알라딘에 팔 때 받는 돈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가 5000원, <나의 한국현대사>는 8100원으로 알라딘 중고판매가의 50~60%대에 불과하다.

동대문 주변 전통 헌책방은 사라져
출간 후 18개월이 지난 구간의 경우 할인율은 더 크게 올라가는 반면 매입가격은 더욱 낮아진다. 변색이나 낙서가 없는 것은 물론 새책에 근접할 때에 받는 최상 등급의 중고서적도 정가보다 50~60% 낮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스테디셀러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알라딘이 정가의 45%인 4500원에 팔고 있지만 매입가는 1000원이다. 때문에 중소 출판사는 자사에서 펴낸 책이 중고서점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게 하는 방안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래도 뾰족한 대책은 없다. 한 중견 출판사의 영업 담당자는 “도서정가제 이후 가뜩이나 책값이 올랐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늘었는데, 중고시장이 점차 더 인기를 끌어도 손쓸 방법이 없다”며 “정가제 이전 마지막 할인이라며 대량으로 풀었던 책들이 다시 중고서점으로 유입될 시기가 되면 매출은 더 심각하게 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도서정가제 시행 전 일시적으로 크게 몰렸던 도서 수요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시점에서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들은 중고서점이나 오프라인 서점 진출이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알라딘 관계자는 “도서정가제 이후 예상만큼 중고서점의 인기가 크게 늘어나고 매출도 오른 것은 아니다”라며 “새책의 매출이 정가제 이후 소폭 줄어든 만큼 중고책 매출이 크게 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고서점을 앞세운 도서유통업계의 경쟁 뒤편으로 전통적인 헌책방은 사라지고 있다. 서울 동대문의 평화시장 주변에 한때 100곳이 넘던 헌책방들이 지금은 50곳 이하로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인적이 뜸한 거리에서 쌓인 책들만 바람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대형서점의 중고매장에서 ‘오늘 들어온 책’, ‘6개월 이내 신간’ 코너마다 책이 진열되기 무섭게 팔려나가는 모습과 대조됐다. 절판된 책을 찾아 헌책방을 찾았다는 조상희씨(46)는 이날 책방의 첫 손님이었다. 가장 아래 서가에 꽂힌 책들을 보느라 한껏 몸을 쪼그린 채로 조씨가 말했다. “몇 번이나 본 책장에서 전에는 안 보이던 책이 보이기도 하고…. 국회도서관, 대학도서관에서도 못 찾은 책이 여기서 덜렁 나올 때가 있어서 그만 올 수가 없어요.”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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