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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20년간의 분투, 앞으로 20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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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개혁 어젠다의 중심엔 늘 참여연대가 있었다. 대응할 이슈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기대하는 쪽에선 팔방미인을 원한다. 집중과 선택은 쉽지 않다. SNS가 발달하고 뉴라이트가 등장해 시민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면서 활동 공간도 좁아졌다. ‘권력을 감시하고 시민주권을 옹호한다’는 깃발을 걸고 달려온 지 20년,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운동 방향과 정체성에 대한 참여연대의 고민이 깊다.

다크호스였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성공회대 교수라는 직함 이외에도 참여연대 초대 사무처장을 역임했었다는 경력은 지난 서울시교육감 선거 이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참여연대 사무처장 경력은 비교적 알려진 일이었다. 참여연대. 1994년 창립. 창립 당시 정식 이름은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였다. 참여연대는 약칭이었다. 올해로 20년이다.

1994년 창립한 참여연대는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이했다. 참여연대 상근자들이 서울 통의동 참여연대 사무실 앞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1994년 창립한 참여연대는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이했다. 참여연대 상근자들이 서울 통의동 참여연대 사무실 앞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464. 176. 236. 참여연대가 내놓은 수치다. 각각 지난해까지 참여연대가 고소·고발. 헌법소원을 제기한 소송, 입법청원 및 발의활동, 행정심판·감사를 청구한 횟수다. 참여연대가 지난 20년간 발표한 보고서와 의견서는 2373건, 토론회나 기자회견을 통해 공론화를 시도한 건수는 1958건이다. 내놓은 단행본이나 정기간행물 숫자도 514권에 달한다.

밖에서는 여전히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와 박원순 서울시장의 관계를 주목한다. 하지만 내부의 시각은 다르다. 박 시장이 참여연대에서 모든 직책을 내려놓은 것은 2000년대 초·중반 무렵이다. 그 후로도 벌써 10년이 넘게 흘렀다. 희망제작소 상임고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운영위원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있던 그는 지난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2000년 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중심에 있었던 박원순이라는 인물을 기억하겠지만, 2011년 서울시장 보선 출마를 결심할 당시 그의 지지도는 5% 내외에 머물렀었다. 기적과 같은 당선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올해 지방선거와 교육감 선거에서 재연되었다.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차병직 변호사가 최근 펴낸 <사건으로 보는 시민운동사>는 참여연대 역사의 비화를 다루고 있다. 책에 따르면 참여연대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사람은 박원순이 아니라 김기식(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었다. 학생운동권(서울대 인류학과 85)이었던 그는 진로를 모색하다 사회학·정치학 서적에 나오는 ‘참여민주주의’, 그리고 ‘연대’라는 단어에 ‘꽂혔다’. 그는 운동권 친구들을 모아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연대’, 줄여서 ‘참사연’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24쪽짜리 시민운동에 대한 글을 써서 재야운동가 김근태를 만난다. 그런데 김근태는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라는 단체를 만들어 정치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역사문제연구소를 찾아간 그 앞에 또 한 명의 만만치 않은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조희연이다. 조희연은 자신이 쓴 <진보적 시민운동론>이라는 논문을 아예 200페이지짜리 소책자로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토론하고 있었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이른바 ‘좌실련’. 풀어 이야기하면 당시 새로운 운동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보다 조금 더 왼쪽에 있는 시민운동’이었다.

다크호스로 떠오른 참여연대 출신들
여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며 번 돈을 역사문제연구소에 쏟고 있던 박원순이 결합한다. 영국과 미국 등에 다녀와 진보적 사회개혁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던 차다. 그 후 파란만장한 역사가 시작된다. 확실히 박원순 변호사의 역할은 2000년대 초반까지 절대적이었다. 역시 차 변호사의 책에 실려 있는 총선시민연대의 결성 후일담을 살펴보자. 총선시민연대가 정식 발족 전 참여단체는 30개 미만이었다. 제안서를 보낸 단체도 50여개에 불과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실무자들에게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정면승부다. 500개 이상의 단체가 참여하지 않는다면 발족할 생각도 말아야 한다”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해 1월 12일 정식 발족할 당시 참가단체는 412개였다. 500개에는 못 미쳤다. 그리고 본격 활동이 시작될 때 모인 단체 수는 1024개였다.

9월 15일 창립 20주년 행사를 앞두고 주간회의에서 검토하고 있는 참여연대 상근자들. | 이상훈 선임기자

9월 15일 창립 20주년 행사를 앞두고 주간회의에서 검토하고 있는 참여연대 상근자들. | 이상훈 선임기자

‘포스트 386’ 90년대 학번으로 세대교체
드라마와 현실의 역사는 다르다. 절정 이후에도 역사는 계속된다. 박 시장의 이야기는 초창기 역사다. 그 후 역사는 누가 만들어 왔을까. <주간경향>은 과거 여러 차례에 걸쳐 참여연대의 리더십을 분석하는 기사를 썼다. 2009년 참여연대의 ‘위기’가 거론될 때 전면에 나선 인사들은 이른바 참여연대 2세대 활동가들이었다. 연수 등으로 해외에 나가 있던 앞의 김기식, 김민영, 이태호 등의 복귀다. 이들은 80년대 학생운동 출신이다. 이태호(서울대 서양사 86)와 김민영(서울대 인류학 86)은 1989년 서울대 총학생회에서 각각 1·2학기 사무국장을 했던 특이한 관계(?)이기도 하다. 88학번으로 1991년 민자당사 점거투쟁을 했던 박원석, 그리고 김기식은 지난 총선에서 국회로 들어갔다.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던 김민영 전 처장도 참여연대를 떠났다.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태호 사무처장이다. 참여연대가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는 조직표에서 상근자들의 조직인 사무처의 인적 구성을 보면 그 후 확연하게 세대교체가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경제개혁연대 상근자로 나갔다가 복귀한 이승희 사무처장(서울대 언어학과 87학번)을 제외하고 협동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박정은, 박근용, 안진걸은 모두 91학번이다. 각각 이대 화학과, 서울대 외교학과, 중대 법학과 출신이다. 9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경험한 포스트386세대다. 사무처를 구성하고 있는 팀장급 인사 대부분도 90년대 학번으로 채워져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참여연대 리더십의 교체도 일어난 셈이다. 참여연대의 사업을 책임지는 협동사무처장들 사이에는 역할 분담이 이뤄져 있다. 행정사법은 박근용 처장, 사회경제·복지 분야는 안진걸, 정책기획·미디어홍보·평화군축은 박정은 처장이 맡고 있다. 실무간사들은 어떨까.

참여연대는 올해 3월 13명의 신입간사를 뽑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위기’에 비춰보면 대대적인 시도다. 전체 사무처 직원은 50여명. 참여연대의 재정구조는 나름대로 탄탄하다. 1만4500여명이 내는 회비(월 1억4000여만원)로 재정자립 구조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업해본 사람은 저 수입구조를 듣기만 하면 바로 되묻는다. 인건비 충당도 어려울 텐데 어떻게 굴러가냐고.” 박정은 처장의 말이다.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는 수입지출 내역표를 보면 대부분 인건비로 지출된다. 신입간사의 월급 수준은 4대 보험 등을 제외하고 130만원 수준. 15년차 정도 되는 팀장급 선임들의 월급 수준이 200만원을 넘긴 것이 불과 2~3년 전이다. “그나마 급여 부분은 시민사회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요. 기사가 나가면 ‘왜 이렇게 많이 받냐’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재근 정책기획팀장의 말이다. 설혹 회원 참여가 더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사업비로 돌리지, 급여 인상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헌신 없인 버티기 힘든 워커홀릭 구조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는 참여연대의 고민은 ‘전문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로 모아진다. 어떻게 보면 항상 할 수밖에 없는 운동 방향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다. 참여연대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휴지기를 갖고 있는 한 간사는 말한다. “참여연대에 들어오기 전 대부분 간사들이 갖는 생각은 역동적이고 전문적이라는 이미지다. 그런데 막상 들어오면 쉽지 않다. 엄청난 업무분량에서 자신만의 전문성이나 실력을 쌓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요즘에 들어오는 간사들은 실력을 쌓아 대학원에 진학하는 등의 개인적 비전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은 소진될 수밖에 없는 높은 업무강도가 문제다.” 시민단체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워커홀릭 구조는 박원순 시장이 사무처장을 하던 시절 만들어진 전통이다. 참여연대 상근자에게 ‘태호리’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이태호 처장이나 협동사무처장들도 마찬가지다. 앞 간사의 말. “밤 새는 구조가 일상화되어 있다. 물론 개인별로 편차가 있지만, 직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오버해서 일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참여연대 팀장은 별도의 직급수당이 없다. 따라서 개인의 열의나 헌신 없이는 버티기 힘든 구조라는 것이다.

지난 2010년 참여연대가 유엔 안보리에 천안함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 이후 보수단체들이 참여연대에 몰려와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 김기남 기자

지난 2010년 참여연대가 유엔 안보리에 천안함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 이후 보수단체들이 참여연대에 몰려와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 김기남 기자

“참여연대 2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한 책 <감시자를 감시한다>에 실린 조희연 교수의 글을 읽다가 무릎을 쳤다. 참여연대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운동방식은 ‘탐사취재형 활동’이라는 내용이었다. 특히 ‘우리가 주목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목하는 일을 잘하기 위한 것’이라는 대목에 감동했다. 너무 감동스럽다고 메일로 회람을 했더니 “지금 시간이 새벽 4시 26분”이라는 항의성(?) 답장이 왔다. 이틀 지나고 이태호 처장에게 답신이 왔는데 ‘정말 강추’라는 것이다. 그 시간도 새벽 4시였다.” 박정은 처장이 전하는 일화다. 출퇴근 시간은 오전 9시 30분에서 오후 6시로 정해져 있지만 사실상 퇴근시간은 없는 구조다.

기존의 시민운동이 전문가 의존형이라면 참여연대는 의외로 상근자 중심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정태석 전북대 교수의 개념 규정을 빌리면 ‘비판적 협력’의 시기였던 DJ·참여정부 시기를 지나 ‘비판적 대항’ 시기가 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 들어서 더욱 뚜렷해졌다. 대부분 사안에 대한 대응은 상근자가 마련한다. 통상적으로는 협동사무처장 권한으로 스크린되지만, 민감한 사안은 각 위원회의 실행위원이나 집행위원회에 이메일로 회람된 후 승인을 받아 대외적으로 발표되기도 한다. 월요일 오전에는 상임집행위원회가, 금요일에는 상근자들이 다 모여 사업을 검토하고 토론하는 주간회의가 열린다. 매 분기별로는 운영위원회가 열려 사업을 검토, 결정한다. 회원 참여가 부족하다는 내외부의 비판에 추첨식으로 운영위원들을 뽑아, 실제 운영위원회에서는 80%의 일반회원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상근자들이 느끼는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한다. 박정은 처장의 말이다.

[표지이야기]참여연대 20년간의 분투, 앞으로 20년은?

“매번 나오는 것이 선택과 집중을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모든 이슈를 다 포괄할 수는 없다. 세월호 사건만 하더라도 관피아, 산업안전, 외주화 문제 등 고장난 한국 사회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이것을 패키지로 준비하자고 해서 스물 몇 개의 보고서를 냈고, 법을 누가 바꾸려 했는지 조사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런데 민생에서는 제2롯데월드, 화상경마장 문제도 현안 이슈다. 하나의 이슈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계속 나온다. 사법도 모니터링을 하는데, 청와대나 법무부에 보낸 검사 문제도 정말 중요하다. 항상 선택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른바 ‘진보정권 10년’과 함께 시민운동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시각이 있다. 지난 9월 1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가한 전문가 분석에 따르면 확실히 영향력 지표에서 감소하는 데이터가 확인된다. 조철민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위원이 사회운동 행위양식이라는 지표로 참여연대의 활동을 카테고리화해본 결과, 참여연대의 사회적 공론화와 운동방식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영향력’은 2004년을 기점으로 둔화되었다. 영향력과 신뢰도도 전반적으로 줄어들고 있는데, 핵심은 언론 특히 보수언론들의 참여연대에 대한 공격적인 보도가 급격히 늘어나면서였다.(이승희, ‘참여연대 20년 운동 평가와 운동방식 개선을 위한 제언’)

시민운동 전성기는 과연 끝났는가
내부에서 평가하는 참여연대의 가장 큰 위기는 2008년과 2009년의 촛불시위 때였다. 개혁적 시민운동을 지향하던 참여연대에서 첫 구속(박원석, 안진걸)과 압수수색까지 당했다. 보수매체와 단체들의 공격으로 홍역을 치렀던 2010년 천안함 유엔 안보리 서한 발송 때는 오히려 회원이 2000여명 늘어났다. “정권의 탄압이 외부적인 문제라면, 내부적으로는 이제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시민들이 직접 SNS 등을 통해 의견을 표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을 역임했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이다. 박정은 사무처장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 직후 휘청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로서는 비용과 상근자 파견, 조직 전체가 집중을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비판뿐이었습니다.” SNS 덕분에 이슈의 전파 속도가 달라진 것도 고민이다. “사실은 속도가 엄청 짧아졌어요. 기존의 의사결정구조를 거쳐 발표하면 이미 늦을 때가 많고, 성명·논평을 발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SNS 작업을 위해 여러 IT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것도 결국은 과중한 부담으로 돌아옵니다.” 이재근 팀장의 말이다. 대응할 이슈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팔방미인이 되기를 강요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지난 서울시교육감 선거 직후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당선자와 자리를 같이한 참여연대 초창기 활동가들. | 오광진 페이스북

지난 서울시교육감 선거 직후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당선자와 자리를 같이한 참여연대 초창기 활동가들. | 오광진 페이스북

“권력을 감시하고 시민주권을 옹호하는 것은 참여연대의 한결같은 사명이고 지난 20년 동안 활동과정에서 확인된 존립 근거다.” 9월 15일 발표된 ‘참여연대 창립 20주년 선언문’의 한 대목이다. 사실 미묘한 문제다. 2009년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에서는 창립 15주년을 맞아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 행사의 주제가 ‘시민정치’였다. (박정은 처장은 <주간경향>과 인터뷰에서 ‘시민정치’는 한번도 참여연대의 공식 어젠더로 결정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심지어 2009년 행사의 결론도 “시민정치를 잘하자” 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권력감시가 중요하다였다” 라고 말했다.)

일상 속에서 생활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정도의 이야기였지만, 사실상 정치일정을 앞두고 시민사회에서 리더십을 차출해가는 구조였다. 박원순도, 조희연도 제도정치의 위기에 구원등판으로 나선 셈이다. 조 교수는 올해 초만 하더라도 참여연대 20주년 비전과 성찰위원회 활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교육감에 출마하지 않았더라면 앞서 언급한 <감시자를 감시한다> 책 발간사업을 주도했을 것이라는 것이 주위의 전언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다. 예를 들어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7년 대선에 출마한다면? 참여연대 활동으로 시민운동을 시작한 오광진 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정책팀장은 현재 서울시 대변인실에서 일한다. 그는 지난 교육감 선거를 지난 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 장의 모임 사진을 공개했다. 선거 후 조희연 교육감과 자리를 함께한 참여연대 초창기 활동가들이다. 참여연대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학계, 시민사회, 사회적 기업 등의 지도적 인사로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선이나 총선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특정한 정치적 국면에서 이들의 네트워크는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까.

시민정치서 권력감시로 복귀 전망
참여연대가 이번에 발표한 20주년 선언은 2009년 제기된 시민정치 노선의 전면 폐기와 권력 감시의 복귀로 보인다. 이승희 처장은 9월 1일 토론회에서 “참여연대가 본래 해왔고,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밝혔다.

김호기 교수는 “두 보수정부가 집권하면서 참여연대와 같은 진보적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며 “SNS 등으로 시민들이 직접 나서게 된 것과 함께 뉴라이트가 등장해 시민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면서 참여연대의 활동공간이 좁아진 것도 한 원인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운동도 크게 보면 거시와 미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국정원·세월호 사건과 같은 대표적인 권력감시운동은 일종의 거시운동에 해당한다”며 “본래부터 모호했던 시민정치라는 개념 대신 생활정치적 의제에 대한 천착이 보다 필요하다고 본다”고 덧붙여 주문했다. 지난 20년간 ‘고장난 한국 사회’에 대한 개혁 어젠다의 중심에 참여연대가 있었다는 점은 확실히 부인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20년은? 영향력 정도는 앞으로의 활동에 달렸더라도 적어도 한국의 진보적 시민사회 및 리더십에 대해 ‘참여연대’라는 키워드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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