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을 훌쩍 넘긴 단식 농성에도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는 꼿꼿했다. ‘4월 16일’을 의미하는 416인의 동조단식 농성단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긴 기다림 끝에 교황의 시복식 미사에 참여한 유가족들은 다시 특별법이라는 기다림 앞에 서 있다.
선선했던 날씨가 다시 본래의 여름 기온을 회복한 8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 가족과 시민 농성장 천막을 찾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늘기 시작했다. 416명을 염두에 두고 설치한 천막은 금세 비좁아졌다. 오후가 되면서 바닥에서 올라오는 분수에 더위를 식히는 어린이들의 모습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민 농성단의 눈에 일순 비쳤던 부러움이 겹쳐졌다. 다만 한 사람, ‘유민이 아빠’는 지열이 올라오는 천막을 정좌한 채 지킬 뿐이었다.

8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 가족 농성장에서 청소년들이 세월호 가족 지지 집회를 열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의 가슴에 써 있는 단식일수는 30일을 넘어섰다. 광화문 시복식이 열리는 16일이면 34일째다. 당초 김씨와 함께 단식에 나선 15명의 가족들이 건강상의 문제로 병원에 이송되면서 이젠 김씨만 남게 됐다. 강한 햇볕이 내리쬐지만 막아주는 것은 천막 한 채뿐, 후끈한 열기 속에서도 김씨는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이따금씩 찾아오는 시민들을 맞고 있었다. 몸무게는 40㎏대까지 떨어졌다. 초췌한 얼굴은 검은 빛으로 혈색이 좋지 않다. 그러나 잊지 않고 찾아와 인사하는 시민들을 마주할 때마다 김씨의 웃음은 밝게 빛났다.
하루 150여명의 시민들 동조단식
“…고맙습니다.” 낮게 잠겨 흘러나오는 김씨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통역처럼 말을 대신 전할 때도 많다. 사정을 아는 시민들은 물론 취재진들도 대화를 길게 잇진 않는다. 침묵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짧은 대화지만 김씨를 위로하러 온 시민들은 되레 자신이 위로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농성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비장하고 묵직한 분위기일 줄 알았고, 나도 대통령과 국회에 화가 많이 나서 속에 끓어오르는 게 있었거든요. 근데 유민이 아버지 얼굴 보니까 그런 감정은 멀리 가고 반대로 평온하고 또렷한 기분이 드는 게 참 신기했어요.” 부산에서 왔다는 허지연씨(42)는 아픔을 나누러 왔지만 깨우침을 받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사고 발생일인 4월 16일을 의미하는 416인의 동조단식 농성단은 12일부터 꾸려졌다. 동조단식을 시작한 12일부터 시민사회·노동단체를 비롯해 종교인과 영화인 등 다양한 분야의 시민들이 단식 행렬에 동참했다. 12일 오후부터는 농성장 곳곳에 마련된 천막을 일반 시민들이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동조단식 참여인원이 하루 평균 150명에 이를 정도로 계속해서 늘면서 당초 이름이었던 416인의 명목상 의미는 사라졌다. 농성장에는 점차 활기가 돌았다. 신청업무를 담당한 대책회의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신청하지 않고 단식에 참여하는 시민들도 있어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기가 힘들 정도”라고 밝혔다.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시기인데도 농성장을 찾은 중·고등학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친구들한테 말하면 괜히 착한 척하는 것 같아서 혼자만 왔다”는 고교 2학년 김모군(17)은 “자기 나라 국민이 이런 일을 당했는데 정부의 대처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게 너무 이해가 안 가서 직접 한 번 찾아왔다”고 말했다. 12일 오후에는 ‘고교생도 알 건 안다’라는 이름의 집회도 열렸다. 100여명의 청소년들에 어른들까지 합세하면서 청소년만의 신선한 발언들이 호응을 얻었다. 강원도 원주에서 왔다는 최준호군은 “여야가 이번 특별법을 두고 야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정치인들이 중·고등학생들에겐 관심 없다”며 “우릴 깔보지 않고 무서워하도록, 더 이상 중·고등학생들이 당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거리에서 집회와 시위로 알려야 한다”고 발언해 또래와 어른들 모두에게서 큰 박수를 받았다.
수백명의 동조단식 인원과 자원봉사자, 시민들이 모여 있지만 때론 다른 생각을 가진 방문자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14일에는 70대로 추정되는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노인이 김영오씨가 있는 곳에 들이닥쳐 “한 달을 굶었으면 죽었어야지” 같은 폭언을 한 시간 동안 하다 간 일도 있었다. 하지만 농성장을 지키는 세월호 가족들과 동조농성단 시민들을 가장 긴장하게 만든 것은 경찰이 강제철거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강제철거 안 한다는 경찰 못 믿어”
광화문 농성장으로 동조농성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크게 늘어난 12일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가 “광화문광장에서 단식농성 중인 세월호 희생자 가족이 광화문 시복식 행사 때문에 물리적으로 퇴거당하거나 쫓겨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며 농성장 천막 침탈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는 듯 보였다. 경찰 역시 “천주교계와 방한준비위의 입장을 존중할 것”이라며 강제적인 농성장 해산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농성장을 지키는 시민들에게선 불신과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분위기였다. 농성장 주변으로 물대포 차량과 경찰버스가 주차할 때마다 시민들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하루 24시간을 꼬박 새워 청와대 가는 길에 앉아 있었잖아요. (13일) 오전에 기자회견 마친 가족들이 청와대 쪽으로 몇 걸음 떼니까 바로 질질 끌어가고 둘러싸서 오도가도 못하게 한 게 경찰 아닙니까. 그러니 믿을 수가 있겠냐고요.” 13일 세월호 가족들과 시민농성단의 기자회견 이후 경찰이 일방적으로 가족들을 끌어내는 불상사가 재연됐다는 주장이다. 시민 정인주씨가 쓴웃음을 지으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교황님 입국 전에 경찰이 (농성장) 다 치워버릴까봐 몇날 밤을 새운 사람들도 많다. 이게 경찰 때문인지 소심한 우리 탓인지 헷갈리더라. 천주교에선 ‘내 탓이오’ 그러잖아.”
세월호 가족들과 농성단은 14일 오후가 돼서야 시름을 돌렸다. 교황방한위와 세월호 가족 간의 협의 결과 가족 600명이 광화문에서 열리는 시복식 미사에 참여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농성장은 유가족 농성장 천막 2채만 남기고 일시 이동하기로 합의했다. ‘유민이 아빠’도 16일이면 광화문 시복식 미사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장 낮은 곳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에 도착하기까지 천막 속에서 33일간 이어진 유민 아빠의 기다림. 그 기다림은 이제 특별법이라는 마지막 결과를 향하고 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