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세월호 유가족 단식농성장 찾은 만화작가 엠마뉘엘 르파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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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오씨 진실함이 마음을 움직였다”

“분노는 진실을 요구하게 합니다. 진실을 요구하며 싸우는 이곳에서 그들과 강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8월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세월호 유가족 단식농성장을 한 프랑스인 작가가 찾았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단식농성 중인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있는 천막이었다. 세월호 희생자를 상징하는 소녀의 얼굴을 그려 건넨 그는 이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플래시몹 대열에도 합류해 대형 인간 리본을 만드는 데 동참했다.

엠마뉘엘 르파주. 2008년 두 달에 걸쳐 체르노빌 현지를 탐사한 경험을 그림과 함께 르포 형식으로 풀어내 2012년 출간한 <체르노빌의 봄>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한국에서도 지난해 부천만화대상 해외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르파주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소련은 물론 작가가 살고 있던 프랑스가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 데 실망했다. 22년 만에 직접 찾아간 체르노빌에서 작가는 그곳에 자리 잡고 실제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잊혀진 진실과 마주했다. 13일부터 열린 제17회 부천국제만화축제 참석차 한국에 온 그가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으로 먼저 발걸음을 향한 이유도 똑같았다. 바로 “인간성과 진실에 대한 추구”였다.

8월 12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단식농성장을 찾은 르파주 작가가 유가족인 김영오씨에게 직접 그린 그림을 전하고 있다. | 김태훈 기자

8월 12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단식농성장을 찾은 르파주 작가가 유가족인 김영오씨에게 직접 그린 그림을 전하고 있다. | 김태훈 기자

세월호 농성장을 직접 찾은 느낌은 어떤가.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이 가슴에 와닿았다. 과거 체르노빌에서처럼 국가가 은폐한 진실을 요구하는 현장을 직접 와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오게 됐다. 딸을 잃은 김영오씨의 모습에서 가족을 잃은 아픔과 그 진실한 목소리가 나라의 경계를 넘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김영오씨에게 그려준 소녀의 얼굴은 누구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인가.
“유민이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었다. 그림의 소녀는 어느 한 희생자의 얼굴이 아니라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상징하는 뜻으로 그린 얼굴이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그리고 세월호에서 공통된 인상을 찾을 수 있나.
“체르노빌 당시 10대였는데 그때 프랑스 정부는 체르노빌의 방사능 위험이 프랑스까지는 미치지 않는다며 진실을 숨겼다. 단지 아이들에게 하듯 시민들을 안심시키려고만 한 것이다. 2년 전 일본 후쿠시마를 방문했을 때도 같은 것을 느꼈다. 인류가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 말이다. 세월호 사고도 비슷하다. 사고가 난 이유와 대처방법에 대한 진실은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어른답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민들을 애들처럼 보는 정부는 진실은 숨기고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만 늘어놓는다.”

한국은 원자력발전소의 밀집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후쿠시마 이후 국가 정책의 전환은 없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는 가장 많은 원전을 갖고 있는 나라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노후해 설계수명을 지나서까지 연장가동하는 비율도 높다. 그럼에도 원전의 전력공급을 대체할 방안을 못 찾았다며 계속 가동 중이다. 그 이면에는 원전을 수출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는데, 결국 원전문제는 어느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 체르노빌의 여파가 유럽 전체로, 후쿠시마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문제가 확산된 것처럼 핵문제를 비롯해 수많은 사회문제가 인류 전체의 문제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체르노빌의 봄> 작가 엠마뉘엘 르파주 | 이상훈 선임기자

<체르노빌의 봄> 작가 엠마뉘엘 르파주 | 이상훈 선임기자

국가가 진실을 감췄다는 점 외에 인간이 만든 재앙으로 인간의 삶을 앗아간 사건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체르노빌에 가기 전 그곳이 온통 잿빛의 음울한 곳일 거라는 막연한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서 본 봄의 풍경은 작품에서도 표현한 것처럼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놀라웠다. 다만 그런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높은 방사능 수치 때문에 인간은 겉으로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월호 사고 같은 경우도 역시 결국은 인간이 스스로를 땅에서, 삶의 공간에서 추방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작품에서는 그런 재앙 이후에도 삶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의 생명력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동이 멈춘 발전소 건물이나 금지구역의 시가지 건물은 흑백 톤의 직선을 써서 죽어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면,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은 부드러운 곡선에 따뜻한 색조를 써서 대비시켰다. 죽음의 공간이라는 그곳에서도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하려고 표현기법을 달리한 것이다. 이곳(세월호 농성장)에서도 은폐된 진실 때문에 죽어가기는커녕 오히려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생명력이 넘치는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여러 작품을 통해 국제적 차원의 문제에서 그 중심에 선 예술가로 참여해 오는 동안 어떤 목표가 있었나.
“어려운 질문인데, 우선 나의 창작이 단순한 메시지 전달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밤중에 화살 쏘기’란 프랑스 속담처럼 쏜 화살을 어디서 찾을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내 작품이 불러올 결과가 어떤 것일지도 내다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예상 못한 놀라운 결과를 만난다. 이번에 한국에 오게 된 것, 세월호 농성장까지 와서 투쟁하는 사람들과 연결된 것 모두가 그렇다. 체르노빌도, 세월호도 하나의 특수한 사건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고 서로 떨어져 있는 이들을 연결시키는 것을 경험했다.”

체르노빌에서 경험한 현지 주민들의 삶이 세월호 유족을 포함한 한국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서로를 갈라놓는 차이보다 서로를 연결해주는 공통분모와 연대감이 더 중요하다. 체르노빌에도 비극과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소와 행복도 있었다. 우리가 친밀감과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누군가의 불행이나 행복을 나와 가깝게 공감하는 데서 온다. 진정한 인간성이란 삶의 모든 모습들을 함께 추구하는 싸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팔을 떨어뜨리지 말라’는 표현이 있다. 포기하지 말고 힘을 내라는 뜻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이 기회에 오히려 한국의 사회문제들이 그저 잊히지 않고 새롭게 관심을 일깨울 수도 있을 것이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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