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장동규씨(44)의 집으로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찾아온 것은 2009년 6월 2일이었다. ‘상습시위꾼’ 장씨의 집을 수색한 경찰은 애꿎은 <자본론> 등 사회주의 관련 서적만 압수해 갔다. 이 시각 다른 9명의 시민들도 각자의 집에서 동시에 압수수색을 받았다.
단순한 집회 참여에서 비롯돼 4년째 경찰과 검찰, 법원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이어진 싸움의 시작이었다. 4년이 지난 올해 6월 13일에야 1심이 끝났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이성용 판사는 이들에게 각각 징역 8월에서 2년까지, 집행유예 2년에서 3년까지의 형을 선고했다. 이들을 묶는 열쇠는 용산참사 추모집회였다.

용산참사가 벌어진 2009년 1월 20일 저녁 참사 현장에서 촛불을 밝힌 시민들이 추모 촛불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수사에서 판결까지 4년, 삶에 큰 변화
수사에서 1심 판결까지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들의 삶은 크게 변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고 유한림씨는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12년 3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2년 넘게 이어지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린 유씨는 2011년 10월 병원에서 간암 말기라는 진단을 들었다. 이미 손을 쓰기 힘들 정도로 진행된 병세를 뒤늦게 알게 된 유씨는 5개월의 투병생활 끝에 재판 결과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유씨는 마지막 의식이 남아 있던 때까지도 재판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았다. 부인 강경자씨는 “남편이 간성혼수 때문에 의식이 흐릿한 상태에서도 ‘이 싸움을 꼭 이겨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유씨는 평범한 자영업자였다. 조경업체를 경영하며 한 가정을 꾸리던 그는 2008년 촛불집회부터 적극적인 활동가로 변모했다. 2009년 4월에는 ‘안티 이명박’(이명박 탄핵 범국민운동 본부) 카페의 카페지기까지 맡게 됐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불운이 깃든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용산참사 추모집회를 비롯, 촛불집회와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집회 등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면서 수사선상에 오른 것이다. 장기간의 수사와 재판 때문에 회사를 돌볼 시간이 줄었다. 결국 회사를 정리한 2011년 이후로는 일용직을 전전했고, 건강상태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부인 강씨는 “재판에 출석하고 올 때마다 검사를 욕하는 일이 늘고, 일 마치고 퇴근해서도 피곤하다는 말을 점점 자주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만 해도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인가 했지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김창건씨(46)는 한 외국계 투자회사의 한국지사에 근무하던 직장인이었다. 2009년 6월 경찰로부터 불시에 압수수색을 당할 때도 그는 회사에 있었다. 압수수색은 김씨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무실 전체를 대상으로 했고 직장의 책임자까지 압수수색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난 뒤 김씨가 속한 투자회사는 당분간 한국 내 사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김씨는 어쩔 수 없이 맡은 업무를 놓아야 했다. 해고는 면했지만 업무를 계속할 수 없는 어정쩡한 위치 때문에 김씨는 다른 사업을 준비 중이다.
김씨는 자신의 현재 사정을 덤덤하게 설명했다.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고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재판도 그렇고, 사회적으로 정당한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그만둬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런 김씨에게도 처음 겪었던 경찰 수사는 힘든 기억으로 남아 있다. “경찰에 가서 다섯 번 조사를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매번 열대여섯 시간씩 길고 지겨운 조사를 받았다. 조사 자체야 길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집회의 ‘배후세력’이라고 지목하며 같이 조사받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되풀이해서 캐물을 땐 정말 답답했다. 그저 집회에 나갔다 알게 된 사이고 서로를 잘 모른다고 몇 번을 말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통상적 집시법 위반은 벌금형에 그쳐
함께 수사와 재판을 받는 사이지만 이들은 서로에 대해 별로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았다. 경찰이 이들을 한데 묶은 것은 ‘애국촛불전국연대’라는 이름의 카페 활동과 집회 현장에서 주고 받은 전화·문자메시지 기록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온라인 카페 상의 별명으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이 태반이었다고 주장했다. 함께 재판을 받은 장동규씨 역시 “기존 사회운동 쪽 사람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대부분이어서 정해진 관행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유한림씨와 김창건씨, 장동규씨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운동진영 내에선 비교적 알려진 인물들이지만 나머지 피고인들은 기자의 취재요청에 응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며 거절할 정도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판결문에서도 이들 피고인이 용산참사 집회 등에서 ‘신촌으로 이동’과 같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을 뿐이다. 장씨는 “연락처를 공유하고 있던 사람들끼리 이동경로를 전해준 것은 가두행진을 하는 보통의 집회에서는 당연히 있는 일이다. 기자들도 집회 취재 나오면 주최측에 어디로 이동할 건지 묻지 않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이들은 야간에 진행된 집회·시위에 참석한 사실과 도로를 행진한 사실 등 위법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었다. 이들의 불만은 통상적인 집회 참여 시 적용되는 집시법 위반과 일반 교통방해 등에 대해선 보통 벌금형에 그치는 데 비해 형량이 무거웠다는 점이다. 변호인단에 참여한 송영섭 변호사는 “재판부의 판결 자체가 법으로 정해진 형량 안에서 선고됐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면서도 “다른 집회사건에 비해 과도한 형량이 내려진 것은 시국 관련 사건이었다는 점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촛불집회 이후 잇따랐던 집회 참가자에 대한 재판에서는 집회가 진행 중인 과정에서 도로 위로 나간 행위를 일반 교통방해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온 바 있다. 또 촛불집회에서 집시법 위반과 일반 교통방해 혐의로 약식기소된 피고인들도 150만원에서 300만원 사이의 벌금형을 받는 데 그쳤다.
그 배경에는 경찰 수사 당시 불었던 ‘상습시위꾼’ 검거 바람이 있었다. 2009년 용산참사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다시 반정부 시위가 늘어날 조짐을 보이자 당시 경찰은 폭력시위를 주도하는 상습시위꾼들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들을 일제 검거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2009년 3월 서울지방경찰청이 설치한 ‘상습시위꾼 및 배후세력 척결을 위한 특별수사본부’의 내부문건에는 이번 재판의 피고인 김창건씨와 홍모씨의 이름이 거론돼 있다. 이 문건에는 김씨·홍씨와 관련, 통화내역을 분석하는 한편 “전문 시위꾼들과 상호 공모관계 확인, 주동자와 배후세력 수사”, 온라인 카페의 “가입자 인적사항 확인 및 이들이 작성한 게시물 집중 분석”을 진행했다고 나와 있다. ‘상습시위꾼’이란 이름으로 기획된 수사에 이들이 엮인 것이다.
장동규씨와 9명의 피고인들은 1심 판결에 불복하고 곧바로 상소했다. 또 다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 이어질 것이다. “상습시위꾼이라는 말 자체가 헌법에 보장된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막는 낙인 아닙니까.” 장씨는 “예전 같았으면 거리낌없이 참여했을 텐데 조금 조심스러워진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그래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집회 현장에서건 재판정에서건 끝을 볼 때까지 계속 싸워야지요. 포기할 생각이라면 애초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요.”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