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과 정진우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다시는 누구라도 혼자 외로운 고공으로 오르지 않아도 되게 만인의 연대가 굳건한 그런 세상이 그립다.”
2006년 포항건설노조 조합원의 장례식. 시인이 조용히 추도시를 읽어내려간다. 갑자기 시인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터져나온다. 강렬한 분노에 시인의 목청이 갈라지고 마이크에선 쇳소리가 울린다.
“추도시 낭송 중 분을 참지 못해 두 번이나 그 비싸다는 무선 마이크를 내동댕이쳐버린 후부터” ‘깡패 시인’으로 불린다는 송경동 시인(45)은 어린 시절 말을 더듬었다. 그의 친구인 오도엽 작가의 전언에 따르면, 송경동 시인이 심하게 이질을 앓자 시인의 어머니가 이질에 효험이 있다는 풀을 달여 먹였는데 과용한 탓에 혀가 마비됐다고 한다. 시인은 반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소리내어 책을 읽었다. 그것이 그의 첫 문학수업이었다.

지난해 11월 15일 송경동 시인(왼쪽에서 두번째)과 정진우 실장(오른쪽 첫번째)이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송경동 시인에게 시는 늘 너무 멀리 서 있는 연인 같은 존재였다. 고향인 전남 벌교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음울했다. 그는 교실보다는 담배나 당구장과 더 가까웠다. 그런 그도 잘하는 게 있었다. 고교 시절 문예반에서 글을 썼다. 그러나 어느날 문예반원들의 시구에서 제멋대로 광주항쟁의 비유를 떠올린 교사들에게 잡도리를 당한 후 이전보다 더한 탈선의 길을 갔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식장 대신 소년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2년을 보냈다.
민중시인들 만나면서 노동문제 고민
졸업장 대신 징역을 받은 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경로는 많지 않았다. 그의 삶은 공사판 잡부의 그것으로 강제편입됐다. 현장 일은 20대의 혈기로 감당하기에도 버거웠다. 그는 배관기술과 용접기술을 배워 광양제철소 건설현장과 충남 서산 종합화학단지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뒷날 공권력은 그에게 ‘전문시위꾼’이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그는 이론이나 시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제 몸으로 노동을 배운 사람이다.
“소유만이 허기진 영혼을 달래줄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악착같이 모은 돈을 교통사고로 날려버린 그는 인생의 방향타를 문학을 향해 돌리기로 결심했다. 신문에서 문학교실 수강생 모집 공고를 보고 아버지에게 차비를 빌려 서울로 왔다. 1991년의 일이다. 낮에는 지하철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김남주·이시영·정희성 시인 등이 있던 한국문학학교에서 시를 배웠다. 민중시인 ‘김남주’와 서정시인 ‘김남조’를 구분하지 못했던 청년은 진보적인 시인들을 만나면서 노동운동을 고민했다. 그 뒤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노동시를 쓰면서 운동가의 삶을 시작했다.
김소연 시인은 지난해 11월 송경동 시인이 구속된 후 쓴 글에서 “송경동 시인의 죄목은 시인들의 안이한 양심을 자꾸만 건드린다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의 행보가 일상의 안이함을 자꾸만 반성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인은 2008년 기륭전자 농성과 2009년 용산참사 대책위 활동을 할 때도 이미 세 차례 구속영장을 받은 전력이 있다. 전국의 투쟁현장을 오가는 사이에 그는 어느덧 ‘거리의 시인’이 됐다.
그가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실장(44)을 만난 것도 2008년 5월 거리에서다. 당시 정진우 실장은 전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교선국장이었는데, 서울광장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던 기륭전자 해고자들을 지원하러 간 자리에서 송 시인을 만났다.
정진우 실장과 송 시인 사이에는 또다른 인연도 있다. 송 시인은 지난해 12월 구본주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제1회 구본주예술상을 받았는데, 2003년 작고한 조각가 구본주씨가 학창시절 홍익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부총학생회장 후보가 정 실장이었다.
전북 전주가 고향인 정 실장은 1988년 재수를 하면서 서울에 올라왔다. 이듬해 봄 그는 홍익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긴 했지만, 그가 처음부터 적극적인 현장활동가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몸담고 있던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은 1990년대 초까지 유지됐던 전투적 학생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노선을 취했다.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은 민족해방 노선과 민중민주 노선으로 대립하던 학생운동의 양대 노선을 지양하고 투쟁보다는 전문성과 대안 제시를 강조했다.
병역특례자 인권탄압 문제 제기
현장활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병역문제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정 실장은 군복무를 IT계열 병역특례업체에서 했는데, 그는 당시 병역특례자들에 대한 기업의 인권탄압 문제를 제기하며 노조를 결성했다. 이후 민주노총 전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를 거쳐 2009년부터 진보신당 비정규노동실장으로 일하게 됐다. 한때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해고자 자원봉사를 다니는 동안 해고자 문제에 더 깊이 관여하면서 직업적인 활동가의 길을 걷게 됐다. 정 실장은 2008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갈라질 때 진보신당을 선택했는데, 그는 “사회적으로 배제된 이들을 위한 정당으로서 더 적합한 당이라고 생각한 쪽으로 간 것”이라고 말했다.
송 시인과 정 실장은 같은 길을 가는 여성들과 가정을 꾸렸다. 송 시인의 아내 박수정씨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기록하는 르포 작가다. 대학 졸업 후에는 구로노동자문학회 회원이었다. 정 실장의 아내 김선아씨는 진보신당 부대표다. 김선아 부대표는 본래 진보신당 평당원으로 별다른 대외적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정 실장이 구속돼 있던 지난해 11월 진보신당 지도부 선거에 나가 부대표가 됐다.
송경동과 정진우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온 후 출간된 송경동 시인의 산문집에 단서가 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다시는 누구라도 혼자 외로운 고공으로 오르지 않아도 되게 만인의 연대가 굳건한 그런 세상이 그립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