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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시위가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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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소원은 ‘마지막 수요시위’

12월 14일이면 수요시위가 1000차를 맞는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눈보라가 쳐도 수요시위는 계속됐다. 매주 수요일 낮 12시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어김없이 일본대사관 앞에 모였다. 목소리를 높여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고 책임을 물었다. 그 세월이 20년이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기다. 그만큼 할머니들도 늙었다. 1992년 60대의 나이로 수요시위를 시작했던 그들이 이제는 백발의 80대가 됐다. 남아있는 할머니보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이 더 많다. 그러나 20년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사죄하지 않는 일본과 소극적인 자세로 방관만 하는 한국 정부다.

[표지인물]“수요시위가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어”

“지난 20년간 우리정부는 꿀먹은 벙어리”
“강하게 우리 정부를 때려야 한다.” 수요시위 1000차를 맞는 소회를 묻자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86)는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도 문제지만 지난 20년간 일본에 제대로 된 문제제기 한 번 하지 않은 우리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의 표출이었다. “지금 나이가 90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들이 사죄하라고 아우성치는 것도 할 짓이 아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들을 거리에 방치해두지 말고 정부가 앞장서서 해결해야 하는데,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 

특히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실망감은 더 크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일본에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오늘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며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청와대 측에 몇 차례 면회를 신청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기 어렵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정부가 손놓고 있는 사이에 싸움은 온전히 할머니들의 몫이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1992년부터 수요시위에 참여했다. 1차 수요시위가 1992년 1월 8일에 시작되었으니 초창기부터 참여한 셈이다. 시작할 당시 1000차까지 이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 이렇게 모여 시위를 하면 빨리 해결되겠지 했던 게 1000차를 넘어가고 있으니까 막막해”라고 말했다. 그런 막막함에 가끔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대표에게 “변한 게 하나도 없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네가 해놓은 게 뭐가 있나”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윤 대표와 할머니들이 동분서주하며 고생했지만 아직 일본의 사죄를 받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의 다른 표현이다.

일본의 사과는 아직 못 받았지만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와 의지로 위안부의 존재와 그 참상이 세계에 알려졌다. 1993년 김복동 할머니는 빈 세계인권대회에서 위안부 시절 참혹했던 경험을 증언을 통해 세계에 알렸다. 할머니는 싱가포르,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자바 등 오지로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했다. 저녁이 되면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하루에만 수십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할머니는 세계인권대회에서 이때의 기억을 자세하고 침착하게 증언해 전세계 인권운동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유엔 인권강령에 위안부 문제가 담겼다.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증언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음의 고통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빈에 머무는 16일 동안 몸무게가 4㎏이 빠지고, 스트레스로 얼굴이 부어올라 흉터가 남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후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에는 적극적으로 증언 활동을 했다. 일본, 미국, 캄보디아 등 초청이 오면 마다하지 않고 다녀왔다. 담담하고 침착한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에 청중석은 자주 울음바다가 됐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 한을 풀어주시오”

[표지인물]“수요시위가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어”

해방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김복동 할머니가 혼자만의 비밀로 덮어둔 일을 세상 밖에 내놓기로 결심한 데에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공개증언이 있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정신대 ‘위안부’로 고통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일본은 종군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고 하니 말이나 됩니까. 내가 눈을 감기 전에 한을 풀어주시오”라며 최초의 ‘커밍아웃’을 했다. 당시 부산 다대포해수욕장에서 홀로 횟집을 운영하고 있던 김복동 할머니는 방송을 통해 이를 보고 망설이던 끝에 1992년 1월 17일 위안부 신고를 하게 됐다. 증인으로 서지 않으면 위안부 문제가 그대로 묻혀질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김복동 할머니는 “그때까지는 숨어 살았지만, 나와서 말하지 않으면 지워지고 잊혀지는 일이라는 생각에 증인으로 나서게 됐다. 그리고 나섰으니까 끝까지 가자는 생각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장거리 투쟁이 이어졌다. 서울에서 집회나 회의 일정이 잡히면 전국 각 지역에 있는 할머니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는 정대협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라 할머니들은 각자의 주머닛돈을 털어 차비며 여관비를 댔다. 일본대사관 앞뿐만이 아니라 국회와 청와대에서도 집회를 했다. 그간 자신들의 잘못으로만 돌리며 억눌러왔던 고통과 한은 할머니들의 절규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수요집회에 나와 고개를 숙이고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할머니들이 많았다. 그러나 수요시위를 하면서 할머니들은 점차 ‘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부끄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할머니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삼엄한 긴장 속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경우도 많았다. 김복동 할머니는 “지금은 우리가 구호만 외치며 신사적으로 시위하지만 그 때만 해도 굉장했다”며 “각 지방에서 몸빼바지 입은 할머니들이 올라와서 대사관 앞에서 욕하고 계란도 던지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많은 할머니들이 아직 생존해 있을 때라 50여명의 할머니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국회든 청와대든 대사관이든 경찰들이 막아서면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경찰들은 그대로 할머니들을 둘러메고 차에 태워 서울역 광장에 내려놨다. 할머니들은 다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내려갔고, 일정이 있으면 다시 또 올라와 시위를 반복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그렇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 짓을 얼마나 하며 살았는데”라고 말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함께 노래하고 춤도 추는 지금의 수요시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열심히 시위에 참여했지만 주변의 시선은 여전히 신경쓰였다. 김복동 할머니는 부산에서 활발하게 장사도 잘 했고 이웃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할머니는 “그때 부산 다대포 양산상회 할매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니 친구들을 만나기가 싫었다. 괜히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한동안은 아예 바깥출입을 안 했다.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연락을 끊은 친척도 있었다. 할머니는 “바깥출입을 하도 안 하니까 말도 잊어버리고 텔레비전만 상대하다 보니까 꿈에도 텔레비전에서 본 사람만 나오더라”고 말했다.

“우리가 힘을 합쳐 끝을 봐야겠다”
용기를 내어 증언을 했지만 삶은 더욱 쓸쓸해졌다. 할머니가 1995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거처인 광주 <나눔의 집>으로 옮겨간 것은 그래서였다. 그 곳에서 위안부 할머니들끼리 친동기처럼 정을 나누며 살았다. 그림을 잘그렸던 고 강덕경 할머니도 친동기처럼 가까이 지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게 친했던 이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그때 서로 언니 동생하면서 의논하고 위로해가면서 살았었는데 지금은 전부 다 죽고 없다”고 말했다.

[표지인물]“수요시위가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어”

친구들이 세상을 떠난 후, 김복동 할머니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홀로 생활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자 지난해 3월, 서대문구에 있는 쉼터로 거처를 옮겼다. 많은 이들이 떠나간 지금, 할머니에게는 담배가 좋은 친구다.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친구 같아 끊을 수 없다. 할머니가 술·담배를 배운 건 열여섯, 위안소 생활을 하면서부터다. 위안소로 끌려온 이튿날, 지옥같던 첫날의 공포를 끊어내기 위해 자살을 결심했다. 위안소 청소를 해주는 중국남자에게 손짓, 몸짓으로 먹고 죽는 시늉을 하며 약을 구해달라고 했다.

집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비상금으로 준 1원을 중국사람에게 주었다. 중국사람은 얼마 후에 무엇인가 담긴 병을 주면서 큰 양동이에 물도 떠서 같이 주었다. 병에 든 것을 입에다 대니 따가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독약이 아니라 중국술 배갈이었다. 술도 많이 먹으면 죽는다는 소릴 들어 먹기로 했다. 목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지만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리고 사흘 동안 의식불명상태로 있다가 깨어났다. 그렇게 술을 시작한 후 술을 끊기 전까지 하루에 2홉들이 소주를 한 병 반 정도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상에 컵이 2개 놓였다. 하나는 물잔, 하나는 소줏잔이었다. 컵에 소주를 가득 채워 한 잔 마시고 그 다음에 물 한 잔 먹고 그리고 밥을 먹었다.

김복동 할머니의 소원은 ‘마지막 수요시위’다. 일본의 사죄를 받고 마지막 수요시위를 한 후, 단 얼마간이라도 마음 편히 살다 고단한 생을 마치는 것이다. 지금은 그 끝을 보기 위해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수요시위에 나간다. 김복동 할머니는 “학생들이고 국민들이고 수요시위한다고 하면 모두 오잖아. 그 사람들이 누구를 위해서 오나. 우리들을 위해서 오는 건데 우리가 어디까지나 힘을 합쳐서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마지막 수요시위’를 넘어 ‘전쟁 없는 세상’을 소원한다. “전쟁 나면 다 당한다. 안 당할 수가 없다. 희생자도 많고 여성들이 특히 그렇다.”

김복동 할머니가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에 1000만원을 기부한 것도 그런 이유다. 김복동 할머니는 “우리들은 죽고 나면 그뿐이다. 그러나 박물관은 과거의 역사고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비극이 있었구나라고 깨닫는 공부방이 되는 거지. 앞으로 후세들이 살아가면서 과거에 우리나라가 어떠했다는 걸 잊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야 죽고 나면 아무 쓸 데 없는 거고”라고 말했다.

1000차 수요시위 이후에도 1001차, 1002차 수요시위는 이어질 것이다. 안선미 정대협 팀장은 “수요시위가 최장기 집회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하루라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며 “고령의 할머니들을 거리에 나서게 하는 게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할머니들 스스로가 운동가가 되어 쉬라고 말려도 안 들으시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싸움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이어온 게 1000차였고, 또다시 희망이 있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참고: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한국정신대연구회 엮음, 한울

<글·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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