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국가인권위원회 10년, 초라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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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부 이후 급격한 신뢰도 추락 존재감 상실

11월 25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설립 10주년을 맞아 두 개의 기념행사가 열린다. 첫 번째는 공식행사다.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10주년 기념식으로 현병철 인권위원장과 인권위 상임·비상임 위원들, 정부 고위 관계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또 다른 하나는 비공식행사다. 인권위 직원들이 자체적으로 준비한 ‘홈커밍데이’다. 지난 10년 동안 인권위에 재직하다 떠났던 이들, 혹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모여 1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다. ‘홈커밍데이’에 참석하는 이들이 인권위의 어제를 말해준다면, 공식 기념식에 참석하는 이들은 인권위의 오늘을 증명하는 셈이다.

지난 2월 8일 국가인권위원회 노조원들이 최근 노조간부로 활동해온 계약직 직원을 해고한 것은 고용차별이라며 인권위 상담센터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있다. / 경향신문

지난 2월 8일 국가인권위원회 노조원들이 최근 노조간부로 활동해온 계약직 직원을 해고한 것은 고용차별이라며 인권위 상담센터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있다. / 경향신문

“인수위 시절부터 인권위 보고 받지 않아”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장, 안경환 서울대 교수,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 유남영 변호사, 김옥신 변호사, 조국 서울대 교수 등은 홈커밍데이에 초대받은 인권위의 ‘어제의 얼굴들’이다. 이들은 모두 임기를 만료하지 못하고 자진사퇴했다. 특히 김형완 소장은 지난해 9월 ‘철밥통’인 공무원 신분을 내던지고 인권위를 떠났다. 2001년 인권위 설립 때부터 인권위에 몸담아온 인권위 1세대 김 소장에게 10주년은 각별한 의미다. 그는 10주년에 맞춰 ‘인권위 10년사’를 발간하려고 했지만 지난 4월 설립한 인권정책연구소의 기틀을 다지느라 내년으로 미뤄뒀다. 

그는 인권위 10년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언제나 10년 전, 인권위가 처음 문을 연 2001년 11월 26일의 풍경을 떠올린다. 그날 서울 종로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는 새벽 6시부터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진정인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길게 줄 서 있었다. 김 소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며 “그들의 보따리에는 해방 이후 오랜 시간 공권력에 시달려 오면서 하소연할 데 하나 없었던 사람들의 억울함과 회한이 다 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새벽의 풍경은 인권을 등한시했던 대한민국의 지난 역사를 보여주는 셈이었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릴 때면 김 소장의 눈시울은 붉어진다. 

그만큼 누구보다 애정을 담아 인권위에 헌신했지만, 지난해 9월 김 소장은 스스로 인권위를 떠났다. 2009년 현병철 위원장이 취임하면서 인권위가 용산참사, 미네르바 사건, 박원순 변호사 사찰 사건, PD수첩 사건 등의 심각한 인권사안들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무원이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도 국민의 혈세를 받아먹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김 소장보다 먼저 인권위를 떠난 사람은 2009년 인권위원장직을 사퇴하고 떠난 안경환 서울대 교수다. 이명박 정부의 인권위 홀대는 대통령 인수위 시절부터 시작한다. 안 교수는 “당시 인수위는 인권위의 보고를 아예 받지 않았다”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권위가 지난 정부 편을 드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 심해졌다. 인권위가 촛불시위에 대해 “경찰 과잉진압으로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의견을 내자 이후 조직 감축이 시작되고 감사원의 감사가 잇따랐다. 

지난해 상임위원을 사퇴한 유남영 변호사는 “촛불집회 건으로 인권위가 정부와 보수세력의 ‘공공의 적’이 됐다”며 “그때부터 인권위의 손발이 묶였고 보수세력으로부터 반국가적 집단으로 낙인 찍히고 공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실 정부와 인권위의 갈등과 마찰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인권위가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최고권력자들이 인권위의 중요성과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라크 파병이다. 당시 인권위가 이라크 파병 반대 의견을 표명하자 열린우리당이 인권위에 대한 비난성명을 내고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사전에 귀띔이라도 해주지 않았다며 인권위에 섭섭해 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왼쪽부터)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장·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왼쪽부터)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장·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원래 인권위는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라고 해서 만든 기구이며, 그게 민주주의다”라고 교통정리를 하면서 갈등은 가까스로 진정됐다. 그밖에도 국가보안법 문제, 사형제 폐지 문제, 호주제 폐지 문제, 나이스 문제 등 대부분의 사안에서 정부와 인권위는 갈등과 마찰을 빚었다. 김형완 소장은 “하루하루가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한 갈등과 마찰 덕분에 인권위는 국민들에게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신뢰감을 줄 수 있었고, 국제사회에서도 바람직한 국가인권기구의 역할모델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뢰도는 2009년 이후 급격히 추락한다. 이는 한때 인권위에 몸담았던 이들이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점이기도 하다. 안경환 교수는 “재임 당시 국제적으로 인권위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세계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의 부위원장직을 맡았고, 2010년부터는 ICC 위원장국으로 한국이 예정돼 있었다”며 “인권위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인 게 나라를 위해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결말을 아직 못맺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현병철 위원장은 2009년 7월 ICC 차기 의장국 출마를 포기했다.

‘정권 눈치’ 운영, 중요 결정 ‘뒷북’
지난해 11월 사퇴한 문경란 전 상임위원도 인권위의 대내외 신뢰도가 추락한 것을 가장 안타까워했다. 문 전 상임위원은 “온 세계가 대한민국 인권위가 잘 만들어진 모델이라며 부러워했는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퇴임 이후 두 달 정도는 인권위만 생각하면 참담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 전 상임위원은 한나라당 추천 상임위원으로 사퇴 당시 보수진영 위원이라는 점이 부각되기도 했다. 그는 “인권이라는 것 자체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라며 “그런 점에서 인권이 보수의 것도 진보의 것도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보수가 더 챙겨야 할 가치”라고 말했다. 문 전 상임위원은 “지난 9월 인권위가 김진숙씨 고공농성에 대해서 다루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는 인권위의 존재 이유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며 “아마 정권 눈치를 보느라 핑계를 대가며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문 전 상임위원은 ‘인권에는 좌우가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북한인권 개선’에 치우친 인권위 업무
이들이 떠난 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고, 그들이 인권위의 ‘오늘’을 말해주고 있다. 2009년 임명된 현병철 위원장은 오늘의 인권위를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다. 현 위원장은 ‘인권 감수성’과 거리가 먼 언행과 ‘정권 눈치보기’식 인권위 운영으로 취임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자격 논란에 휘말려 왔다. 2009년 12월 용산참사에 대한 의견 제시 여부를 결정하는 인권위 전원위원회에서 그가 “독재라도 어쩔 수 없다”라며 일방적으로 폐회를 선언한 일은 유명하다. 그밖에도 현 위원장 취임 이후 PD수첩 사건, 두리반 사건, 미네르바 사건, 민간인사찰 사건 등 중요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인권침해 진정사건에 대해 인권위가 주저하거나 뒷북을 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이러한 사건의 공통점은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명료한 사건이지만, 정부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사안”이라며 “인권위가 독립성을 가지고 판단했으면 어렵지 않게 권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오로지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이유에서 부결되거나 결정이 미뤄져서 적기를 놓친 사건들”이라고 말했다.

뉴라이트 계열인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을 역임한 홍진표 상임위원 등 보수 성향이 강한 인권위원도 잇따라 임명됐다. 한나라당 윤리위원이었던 최윤희 위원, 한나라당 대선후보검증위원 출신인 한태식 위원도 비상임위원으로 임명됐다. 그 결과 인권위의 중점과제는 ‘북한 인권 개선’으로 치우치게 된다. 인권위는 2010년 특별사업으로 북한 인권 개선활동을 발표하고 지난 2월에는 전원위원회를 통해 북한인권침해신고센터 및 북한인권기록관 설치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실효성은 논란이 되고 있다.

한 인권위 직원은 “설립 10주년을 맞은 인권위의 현주소는 주변화·희화화”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인권위가 무슨 말을 할까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이제는 인권위가 무슨 의견을 내는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며 “인권위는 우리 사회에서 존재감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우리 사회도 이제 다문화 사회가 되었다. 깜둥이도 같이 산다’는 등 인권위원장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현 위원장의 발언으로 인권위가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면서 “주변화와 희화화가 지금의 인권위를 설명하는 키워드”라며 씁쓸해했다.

“권고 이행 노력 했다면 ‘도가니 분노’도 없어”

사회적으로 인권위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근본적인 문제점은 내재돼 있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인권위의 문제가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에 갑자기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그 중 하나로 이전부터 인권위의 ‘권고’가 실질적인 변화나 제도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화 <도가니>의 배경이 된 인화학교 사건이다. 2006년, 인권위는 이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를 실시하고 권고조치를 취했다. 만약 이 사건에 대해 인권위가 내린 권고조치가 제대로 실현됐다면 <도가니>가 만든 ‘분노의 신드롬’은 없었을 것이다. 영화가 흥행하고 영화를 본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경찰이 재수사에 착수했고, 보건복지부는 사회복지시설 인권실태를 조사했다. 광주시는 인화학교와 인화원을 운영하는 우석법인의 설립허가를 취소했다.

홍 교수는 “이러한 대책들은 인권위가 내린 2006년 권고에도 대부분 나와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2006년 8월 인권위가 내놓은 직권조사 결과와 권고 내용은 경찰이 밝혀내지 못했던 사건의 실체를 더 밝혀내고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냈다. 홍 교수는 “인권위가 그때 벌여놓기만 했던 일이 무려 4년이 지난 후 ‘영화 한 편’이 계기가 되어 다시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대개의 경우 인권위가 ‘권고’를 했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며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 권고, 사형제 폐지 권고 등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의미 있는 권고를 내놓아도 권고가 이행되도록 충분히 노력하지는 않아 문제가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권고’라는 법적 권한도 중요하지만 그 법적 권한을 이행하게 하는 힘은 ‘법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이라며 인권위가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의지와 신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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