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국민성금 모금 ‘군사정권 풍경’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정부 여당 걸핏하면 제안하고 방송이 앞장 ‘구태의연’

정운천 한나라당 최고위원(전 농림부 장관)은 지난 1월 24일 원내 최고위원회에서 “(구제역 피해와 관련해) 한나라당 구제역 대책특위에서 근본적인 대안책을 마련했다”며 구제역 피해 농가를 위한 의연금 모금을 제안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직간접 피해를 입어 실의에 빠진 주민들을 위한 범국민적 관심과 위로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한나라당에서 먼저 기금을 모금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KBS 발열조끼 모금은 군사정권 시절 방위성금 모금을 떠올리게 한다. | 경향신문

KBS 발열조끼 모금은 군사정권 시절 방위성금 모금을 떠올리게 한다. | 경향신문

정 최고위원의 발언이 보도되자 한 트위터 사용자(@borabay)는 “구걸 정부? 국민이 낸 세금은 어디로 쏟아붓고?”라고 비꼬았다. “구걸 정부”라고 비꼰 이 트위터 사용자의 반응은 과민한 것일 수 있다. 한나라당은 최고위원회 직후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공개회의 때 정운천 최고위원께서 구제역 관련 특위에서 결정한 사항을 보고했는데, 그것은 특위의 안이고 아직 당론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정부·여당에서 성금 모금을 제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인 시절인 2008년 1월 12일 화재로 불타버린 숭례문 복원을 위해 국민성금을 모금하자고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복원 예산이 1차 추정으로 200억원이라고 하는데 이 복원을 정부 예산으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이 십시일반 성금으로 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당시 강금실 민주당 최고위원은 “이 당선인이 모금을 제안하는 것은 동원정치다. 전두환 전 대통령처럼 평화의 댐 건설기금 모금을 하겠다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공적 차원의 문제 해결 노력이 선행돼야 할 사안에서 모금이라는 사적 해결 방식을 사용하자는 주장은 이후에도 반복됐다. 지난해 4월에는 국방부가 천안함 유가족 지원을 위해 장병들의 월급이나 국민들의 성금을 모으는 방안을 검토한 사실이 알려져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같은 해 4월 20일에는 행정안전부가 공무원들을 상대로 천안함 유족들을 위한 성금 모금을 직급별로 액수까지 정해 독려한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빚었다. 지난해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진 후에는 경찰청이 구설수에 올랐다. 경찰청은 지난해 12월 6일 각 지방경찰청에 연평도 주민을 위한 성금 모금을 독려하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공문에는 행안부의 천안함 모금 지침과 마찬가지로 직급별 모금 액수가 정해져 있었다.

새해 벽두에 “국군장병에 발열조끼를”
예산을 두고 국민 성금을 모금하는 행태는 2011년 벽두에 재연됐다. KBS는 지난 1월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국군, 우리가 응원합니다’라는 제목의 특별방송을 진행했다. 모금의 목적은 “국군장병에게 발열조끼를 보냅시다”라는 것이었다. 방송의 ‘자발성’에 대한 의심이 깊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는 1월 19일 낸 성명서에서 “이 같은 뜬금없는 모금 방송은 김인규 사장의 지시로 급조됐다”고 밝혔다. 김인규 사장이 교양국 PD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모금 방송 아이디어를 내고 콘텐츠본부장에게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방위성금 모금 방송은 공영방송이 할 짓이 아니다”며 “차라리 구제역 피해 농가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고 함께 생각해보는 방송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KBS는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에도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해 모금 방송을 했다.

모금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피한 사정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경향신문이 2011년도 국방부 예산을 분석해 지난 1월 24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국방부가 피복 예산으로 책정한 돈만 2174억9800만원이다. 이중 10억원은 육군 및 공군 간부들에게 스웨터를 지급할 목적으로 편성된 예산이다. 예산이 모자란 건 아니란 소리다.

이뿐만이 아니다. 1월 21일에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한강예술섬을 시민 기부금으로 짓자는 제안을 했다. 오 시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국제경영원 주최로 열린 조찬 강연에서 “시의회가 (한강예술섬을) ‘부자들만 이용할 게 뻔하다’며 예산을 깎았다”면서 “위기는 항상 기회이며, 기왕 이렇게 됐으니 시민들이 낸 1만~2만원을 모아 건물을 짓고 이름을 ‘도네이션 센터’로 붙이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강예술섬 시민기부금으로” 제안
시민들이 자신의 성의를 모아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성금 모금을 바라보는 시각은 곱지 않다. 군사정권 시절 성금 모금이 ‘강요된 헌금’이나 다를 바 없었던 한국에서 성금 모금은 어쩔 수 없이 권위주의 정권의 동원 정치를 떠올리게 하는 까닭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군사정권 시절의 방위성금이다.

방위성금은 1973년부터 조성됐다. 1973년부터 1983년까지 10년 동안 480억5300여만원이 방위성금 명목으로 조달됐다. 이 금액에 정부 예산은 한푼도 포함돼 있지 않다. 1983년 6월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방위성금 중 39.8%에 해당하는 191억3300만원은 일반 국민들이 냈다. 148억9700만원(31%)은 기업인이 기탁했다. 129억8900만원(27%)은 초·중·고교생들이 냈고 나머지 10억3400만원(2.2%)은 해외 교포들이 냈다.

군사정권 시절 국민들이 부담해야 할 성금은 방위성금만이 아니었다. 법률로 규정되지 않은 임의적이고 반강제적인 성격의 준조세는 80여종에 달했다. 6월 항쟁 1년 뒤인 1988년 7월 2일 정부가 ‘준조세 폐지 및 개선 지침’을 확정하면서 폐지 대상으로 거론한 50여종의 항목들을 보면 다채롭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하다. 모기향 보내기, 휴지통 설치, 수재민들에게 시멘트 보내기, 체육대회 후원, 농촌에 송아지 보내기, 못줄 보내기, 택시기사 합동결혼식 지원, 군경위문, 하수도 설치 지원….정부 예산을 써야 할 사업 경비를 국민성금으로 충당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성금을 거둬 ‘성금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였다. 당시 정권이 사용한 방식은 기업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 일단은 1988년 ‘5공 청문회’를 통해 드러났다. 청문회 과정에서 기업들은 일해재단이 설립된 1984년부터 1987년까지 3년 동안 모두 598억5000만원을 낸 것으로 밝혀졌다. 이름은 ‘기부’였지만 실제로는 강제성을 띠었다. 1988년 12월 14일 국회 5공특위가 주관한 일해재단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한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은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강제성은 없었으나 분위기상 내지 않을 수 없었던 정신적 강제성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같은 자리에서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1차 모금은 자발적이었으나 2차 연도부터는 어쩔 수 없이 냈다”고 강제성을 시인했다.

정부 여당이 걸핏하면 국민성금 모금을 제안하고 방송이 모금에 앞장서는 것은 구태의연한 풍경이다. 모금 전문가인 예종석 한양대 경영대학장은 KBS 발열조끼 모금 방송에 대해 “군인들이 불우이웃도 아닌데 성금을 모아서 발열조끼를 사준다는 건 어이없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발열조끼를 지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국방예산으로 하는 게 맞다. 방위성금 모금은 군사정권 때나 하던 일이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성금으로 운영된다는 건 서글픈 일”이라고 비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