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서 생각하는 지나간 100년, 다가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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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세대는 어떤 나라를 남길 것인가

영재 이건창(1852~1898). 매천 황현(1855~1910), 창강 김택영(1850∼1927)과 함께 구한말 조선의 3대 문장가로서 문명을 떨친 지식인이다. 영재는 서세동점의 물결에 맞서 양명학에 기반을 둔 자주적 개혁노선을 추구했으나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한 차례 서양에서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고 있는 지금, 강화도 영재 생가를 찾은 김호기 교수는 격변의 시대에 지식인됨의 괴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편집자 주>

강화도 사기리 영재 이건창 선생 생가.

강화도 사기리 영재 이건창 선생 생가.

그동안 다뤘던 한일병합 100년도 어느덧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도달한 듯하다. 캠퍼스 안 윤동주 시비를 둘러보고, 상해 임시정부와 훙커우 공원을 찾아가고, 지난주에는 강화도에 다녀왔다. 강화도를 찾은 것은 필자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명의 지식인 때문이었다. 영재(寧齋) 이건창(1852~1898)과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이 그들이다.

영재와 매천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 아니다. 영재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매천은 한일병합이 되던 1910년에 순국했다. 그럼에도 식민지 전사(前史)를 살아온 이 두 지식인의 삶은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이며, 또 식민지가 끝난 지 60여년이 지난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영재 이건창에 대한 추억
영재 생가와 묘소가 있는 강화도는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91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나는 강화도를 자주 찾아갔다. 영재의 생가가 있는 사기리와 묘소가 있는 건평리를 찾아가기도 했고, 지난번 한국전쟁을 다룰 때 언급했던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에 나오는 양사면 일대를 둘러보기도 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유학을 시작한 1985년 늦가을 어머님이 쉰여덟 나이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리움으로 바뀌고, 그리움은 다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이른바 존재의 ‘고향 없음’(homelessness)과 같은 상실감으로 이어졌다. 그리움은 결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채울 수 없기 때문에 그리움은 부재의 현실을 자각하게 하고, 그것은 다시 ‘고향 없음’의 쓸쓸함을 안겨준다.

귀국 후 영재의 무대인 강화도를 자주 찾아오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었다. 비언표적 영역에 놓인 그리움과 ‘고향 없음’의 감정은 쇠잔하는 국가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영재의 회한에 대한 심사와 중첩되고, 이런 복합 감정을 마음 한편에 품은 채 강화도 이곳저곳을 혼자 쏘다니면서 위안 아닌 위안을 얻곤 했다.

당시 강화도를 배회할 때 즐겨 듣던 노래들이 몇 곡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피트 시거(Pete Seeger)가 부른 ‘모든 꽃들은 어디로 갔나’(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다.

“모든 꽃들은 어디로 갔나…. / 모든 소녀들은 어디로 갔나….
모든 남편들은 어디로 갔나…. / 모든 병사들은 어디로 갔나….
모든 무덤들은 어디로 갔나…. / 모든 무덤들은 꽃들이 되었네….”

이 노래는 미하일 숄로호프의 대하소설 <고요한 돈강>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0년대 반전운동과 신사회운동에서 적잖이 불렸던 이 노래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역사의 위대한 서사시다. 필자에게 이 노래에는 어린 시절 살던 시골의 풍경과 10대에 처음으로 만난 서울의 풍경, 그리고 20대에 이국 땅에서 대면한 낯선 풍경의 기억, 무엇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살아있다.

자주적 근대화의 좌절과 식민지 시대
고려 후기 대몽항쟁에 이어 강화도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부상한 것은 조선 후기다. 강화읍내에는 철종이 재위 전에 살던 집이 용흥궁이란 이름의 유적지로 남아있는데, 바로 이 철종 때부터 강화도는 열강들의 함선과 포성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있던 고종 재위 초기에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로 절정에 달했다.

바로 이때가 영재가 활동했던 시기다. 영재는 매천, 창강(滄江) 김택영과 함께 구한말 한시 3대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이기도 하다. 초지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 선두포구를 지나서 쪽실 수로에서 동막 해수욕장 쪽으로 조금 더 가면 사기리가 나오는데, 바로 이 마을에 영재가 태어난 생가가 있다.

영재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민영규 교수의 <강화학(江華學) 최후의 광경>을 읽고서였다. 영재가 대면한 상황은 서구의 물결이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데 전통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는 풍전등화의 조선사회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재가 선택한 길은 강화학, 즉 양명학에 기반을 둔 자주적 개혁노선이다.
영재의 길은 전통과 근대로의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당시의 서세동점은 감당하기 결코 쉽지 않은 거대한 물결이었다.

김호기 교수가 영재 생가 문학비 앞에 서있다.

김호기 교수가 영재 생가 문학비 앞에 서있다.

선비로서의 지조와 절개를 지키면서 자주적인 개혁을 모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역사의 흐름은 이미 근대로 넘어오고 있다는 것, 과거는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는 것, 연속보다는 단절이 시대의 대세라는 것, 이런 도도한 흐름 앞에 선 비서구사회의 지식인이 가져야 할 진리의 좌표를 찾기란 참으로 지난한 일일 터였다.

영재가 홀연 세상을 떠난 후 동료와 후학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 땅에서, 어떤 이들은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품 있는 고투(苦鬪)를 이어 갔다. 민영규 선생에 따르면,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게 양명학의 가르침이라 한다. 결과의 대소고하(大小高下)를 물을 게 아니라, 질(質)의 참됨만이 지식인의 갈 길이라 한다. 참으로 치열하고 무섭기조차 한 진리에 대한 열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의 이런 용기는 영재와 평생을 교유했던 매천의 최후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영재가 세상을 떠난 후 매천은 고향에 은거해 저술에 몰두했다. 매천이 남긴 역사서 <매천야록(梅泉野錄)>은 말 그대로 ‘들에서 쓴 기록’이다. 들에서 썼다는 이 표현이야말로 역사의 한가운데서 역사에 맞서온 매천의 삶을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1910년 나라가 결국 패망하자 매천은 “나는 죽을 마음이 없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순국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전라남도 구례에서 절명시 네 편을 남긴 채 자결했다.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나라는 이미 사라졌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을 돌이켜보니
문자 안다는 사람 인간되기 어렵구나”

매천의 절명시 가운데 한 부분이다. 필자는 아직까지 이보다 더 비장한 시를 읽어보지 못했다. 혹자는 매천 역시 봉건시대 지식인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필자 역시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역사를 모두 현재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망국이란 당대의 현실 속에서 매천이 선택한 길은 적어도 자신에게는 최선의 길, 다름 아닌 진리에의 길이었다. 나라의 패망을 죽음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동기의 순수성, 바로 그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창과 평생 교유한 매천 황현은 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사진은 매천이 자결하기 전 남긴 절명시. |사진작가 황헌만

이건창과 평생 교유한 매천 황현은 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사진은 매천이 자결하기 전 남긴 절명시. |사진작가 황헌만

매천마저 세상을 떠난 후 일제 식민지배는 더욱 강화됐다. 그리고 36년이 지난 다음에야 무궁화의 나라는 해방을 이뤘지만 국토는 이내 분단됐다. 참혹한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격렬한 산업화를 경험한 다음 민주화의 도정에서 이제 우리 사회는 또 하나의 거대한 서양의 물결 앞에 망설이고 서성거리고 있다.

2010년 올해 한일병합 100년을 맞이해 새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지나간 100년과 앞으로의 100년이다. 우리에게 지난 100년은 식민지, 분단,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로 숨가쁘게 이어진 역사였다.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역사는 비약하지도 않는다. 반복과 비약으로 중첩된 도도한 역사 속에서 이제 우리 사회는, 우리의 집합의지는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다음 세대에게 어떤 나라, 어떤 사회, 어떤 미래를 남겨줄 수 있을까.

강화도를 오가면서 오랜만에 ‘모든 꽃들은 어디로 갔나’를 다시 들어봤다. 초지대교를 건너 좌회전해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영재 생가가 있는 사기리로 향했다. 계절은 늦가을로 향해 가는데 산야는 아직도 푸르렀다. 저 멀리 마니산이 눈에 들어오니 오래 전 이곳을 찾았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모든 꽃들은 어디로 갔나’
벌써 십년도 한참 지난 어느 여름날 나는 사회학과 후배와 함께 이른 아침에 사기리를 찾았다. 캠퍼스를 오가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적지 않은 나이 차이가 났지만, 시와 소설, 음악 등 취향이 비슷한 친구였다. 무엇보다 사라져가는 것들과 버려진 것들에 대해 다소 쓸쓸하나 더 없이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우리는 영재 생가 옆의 버스 종점에서 내려 흥왕리로 가는 비포장 길을 걸었다. 오른편엔 마니산 끝자락이 놓여 있고, 왼편엔 썰물이 남겨놓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동막해수욕장까지 걸어가서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다소 무료하게 산책을 하다가 다시 영재 생가로 돌아왔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나는 영재와 매천, 좌절된 자주적 근대화 노선에 대해 두서없이 얘기하고, 후배는 길섶에 핀 야생화들이 만들어놓은 버려진 아름다움과 고향 부산과 다른 서해 바다 풍경에 대해 역시 두서없이 얘기했다. 그리고 잠시 버스를 기다리던 정적의 시간, 아직도 그 초여름 풍경을 나는 잊지 않는다.

저 멀리 선두포구 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후텁지근한, 기다리던 버스가 결코 도착하지 않을 것 같은 적막감이 흐르는, 어느새 따가워지기 시작한 7월의 햇볕 아래 한갓진 풍경 속에, 커졌다 작아지고 다시 커지는 흔들리는 그 풍경 속에 한 여자가 다소 외롭게 서있었다.

‘고향 없음’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고향은 풍경이 아니라 마음 속에, 타자의 영혼 속에 살아있는 것 아니겠는가. 진정한 사랑이란 “소녀가 꽃을 꺾어 그녀의 남편에게로 가고, 그 남편은 병사가 되고, 그 병사의 무덤에 꽃이 다시 피는” 영겁회귀(永劫回歸)하는 시간의 궤도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타자 곁으로 조금씩 다가서는 것 아니겠는가.

7월 햇볕이 따가운지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이마를 찡그린 채 엷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나 역시 다소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 곁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내와 떠난 첫 번째 여행이었다.

<글·김호기 연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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