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는 전모, 희생자 유족들 “진실규명” 목소리
"마을과 그 주변 거주민 모두가 죽어 있었다. 정확히 네이팜에 모두 당한 채였다. 한 남자가 자전거에 타려는 채로 죽어 있었고, 고아원의 아이들 50여 명도 죽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한 가정의 어머니는 한 손에 백화점 카탈로그의 한 페이지를 쥐고 있었다. 이 페이지는 no 3811294번, ‘붉은색의 화려한 부인용 실내복’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반도 전역에 걸친 미국 공군의 폭격은 한국전쟁 기간에 가장 큰 민간인 피해의 원인이었다. 사진은 한 철도역이 미 공군의 공습을 받는 모습. |경향신문
1951년 1월 20일 안양 고아원 폭격 사건을 목격한 미국 뉴욕타임스 종군기자 조지 배럿의 증언이다. 미국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2005년 프랑스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한 글에 이 증언이 실려 있다. 커밍스는 이 기고문에서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인 딘 애치슨은 이런 종류의 ‘선정적인 기사’를 검열, 못 나가게 통제했다”고 덧붙였다.
‘한양고아원 폭격사건’의 진실
미군의 안양 고아원 폭격 사건은 국내에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에도 잊혀진 사건이다. 안양 지역 원로로서 한국전쟁 당시에도 그곳에 있었던 변원심씨(77)조차 “1·4후퇴 당시 안양역에서 피란민을 싣고 가다가 폭탄이 터져 안양역 근처가 불바다가 된 사건은 기억하지만 고아원 폭격은 이야기도 못들었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을 추적하던 기자는 뜻밖의 곳에서 실마리를 발견했다. ‘한국천주교사회복지역사’를 다룬 책에서 재인용한 한 수녀회 역사서였다. 이 책에 따르면 수녀회가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서울시 사회과의 지시로 10세 미만의 아이들을 안양으로 소개시켰는데 “1951년 1월 20일 유엔군 비행기의 오폭으로 안양에 소개돼 있던 50명의 어린이들이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기자가 수녀회에 연락을 취했다. 당시 사건 현장에는 없었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할머니 수녀의 증언을 수녀회 관계자가 전해 주었다.
“저녁이 되고 추우니까 어른들이 불을 지폈다. 당시 아이들은 미군 군용 담요를 두르고 있었는데 비행기 소리가 나니까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고 다 뛰어나갔다. 그런데 위에서 보기는 군용 담요를 두른 아이들이 회색으로 보이니 인민군인줄 알고 오폭했을 것이다.”
증언자 소재 아직 파악 안돼

한국전쟁 당시 공습에 대한 두려움이 북한 인민군과 민간인에 대한 심리전에서 활용됐다. 사진은 폭격을 경고하는 한국 측의 삐라. |경향신문
죽은 아이들은 인근 야산에 매장했다고 한다. 당시 수녀원에서 일하던 벙어리 아저씨가 살아남은 아이들을 인솔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수녀원 건물은 인민군이 점령해 본부로 쓰고 있었다. 이들이 다시 북으로 퇴각할 때 똑똑한 아이들은 북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안양에서 살아 돌아온 아이 가운데 유일하게 한 여자 아이가 화장실에 숨는 바람에 남을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미국으로 입양됐다. 이 마지막 증언자의 소재는 현재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한국전쟁 중 미군 폭격 사건은 아직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게 많다. 한국전쟁 시기에 미군 폭격을 연구한 김태우 박사(서울대 규장각)는 “노근리 사건처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수없이 많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의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더라도 전쟁 초기 3개월 동안 서울시민 사망의 가장 큰 이유가 공중 폭격이었을 정도다.
미군 폭격 문제는 노근리 사건 이후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다며 유족회 등이 결성됐지만 그다지 사회적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경북 경주시 기계천 미군 폭격 사건의 경우 지난 4월 희생자에 대한 첫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이리역 폭격 사건’의 경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최근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안양 고아원 폭격 사건처럼 한국전쟁 60주년이라는 화려한 조명의 그늘에서 지워지거나 잊혀지고 있다.
“전세계서 가장 많이 폭격당한 장소가 한반도”

정용인 기자
김태우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2008년 ‘한국전쟁 시기 미 공군의 폭격’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논문에서 김 연구원은 “한국전쟁에 투입된 미 공중폭격기들은 애초엔 ‘군사 타깃 정밀 폭격’이라는 목표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농촌과 도시 자체를 주요 폭격 대상으로 간주했으며, 그 와중에 수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폭격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고향이 강릉이다. 초등학교 때 할머니한테 가장 충격적이고 무서웠던 경험이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할머니께서 대답하길 미군 폭격이 가장 무서웠다는 것이다. 할머니께선 당시 살던 집의 앞집과 옆집이 다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는데 그게 밥을 해먹으려고 불을 피워 굴뚝에 연기가 났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논문을 쓰면서 공군비행사 인터뷰 자료를 보니 민가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대부분의 조종사에게 폭격의 주요 준거였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소름 끼치게 놀랐다.”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막심했는데도 그동안 연구 대상이 되지 못했는가.
“이를테면 해외의 저명한 학자들도 ‘폭격’이 주요한 관심사였다. 노엄 촘스키도 그렇고 얼마 전에 사망한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도 그렇다. 최근 한두 달 전에 그의 유고작이 미국에서 출간됐다. 제목이 ‘폭탄(the bomb)’이었다. 놀랍게도 20세기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폭격당한 장소가 한반도다. 외국에 비해 한국의 연구는 미진한 상태다.”
연구를 하면서 인상 깊었던 자료나 안타까운 사건은 무엇이었나.
“연구를 하면서 왜 이리 민간 지역에 폭격이 심했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그것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학자 입장에서는 기쁨이고 희열이었지만 동시에 전쟁의 슬픔이랄까 참혹함을 느꼈다. 미국 국립문서보존소에 가서 10만장의 자료를 복사해 왔다. 수많은 사진도 있었다. 물론 인상적인 사진이 꽤 많았다. 당시 미국 극동 공군은 철도 폭격을 많이 했다. 사진을 보면 낙하산 달린 폭탄이 떨어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폭탄을 피해 누워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잡혀 있다. 한 번 폭탄이 떨어진 곳에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인지 포탄 웅덩이 안에 누워 있는 아낙네 사진이 있다. 그 분은 살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