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5월 사회당 리오넬 조스팽 후보를 물리치고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우파 드골주의자 자크 시라크는 수년 동안 중단된 핵실험을 재개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1996년 2월까지 모두 여섯 차례 단행된 핵실험은 국내외의 비난과 반발을 무릅쓰고 강행됐다. 프랑스 정부는 자국의 장기적 이익과 국민들의 안위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6월 18일 보수단체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 앞에서 ‘천안함 서한’과 관련한 참여연대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 참석자가 참여연대에 삿대질을 하고 있다. |뉴시스
세계 최대의 초국적 평화운동단체 그린피스는 직접 행동으로 프랑스 핵실험에 대한 저항을 주도했다. 그린피스 소속 대형 선박 두 척과 요트 두 척 및 수십 척의 고무보트 등이 탑재된 장비 및 승선한 활동가들과 함께 프랑스 군대에 의해 나포됐지만 이들의 저항은 핵실험 기간 내내 지속됐다.
이 저항에 참여한 그린피스 소속 활동가들의 상당수는 프랑스 국민이었다. 이들에게 쏟아진 프랑스 내부의 일부 비판 여론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명료했다. 자신들의 활동은 세계평화라는 대의를 위한 것이며, 평화운동이야말로 핵실험보다 프랑스와 국민들의 안위를 지키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해 안보리 이사국 등에 서한을 발송한 참여연대에 쏟아지는 정부와 보수 언론, 관변단체 등의 비판과 공격은 10여 년 전 프랑스 정부 및 일부 보수 언론이 ‘철없는’ 프랑스 평화운동가들에게 가하던 비판을 연상시킨다. 참여연대는 서한 발송의 근본 취지를 한반도 평화에 두었다. 평화야말로 인류 보편의 가치이며, 대한민국 국익과 한민족 전체의 안위에 직결되는 고귀한 가치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반도 긴장 최대 피해자는 남북한
천안함 사건의 진상을 둘러싼 논란에 가담하려는 것은 이 글의 의도가 아니다. 참여연대의 이번 행동은 시민운동이 지향하는 공동선의 가치에 부합하는 정당한 행동임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 행동은 환경과 생명의 고귀함을 환기시키기 위해 단식투쟁을 하고, 삼보 일배를 하고, 심지어 소신공양까지 마다하지 않는 환경과 생명 지킴이들의 활동과 궤를 함께한다. 이들의 행동이 인류 보편 가치에 입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태어난 조국과 동족을 위한 봉사임을 믿는 것과 같다.
실제 천안함 사건 이후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강화하자 남북한은 최대 피해자가 되고 있다. 북한의 중국에 대한 종속화는 무섭게 가속되고 있다. 한국 역시 미국과 일본을 위시한 우방국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처지가 됐다.
지난 반 세기에 걸쳐 선진 민주국가에서 성장해 온 시민운동은 의회, 정당, 선거로 대표돼 온 대의민주주의의 기제와 더불어 참여민주주의를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했다. 평화, 인권, 환경, 양성평등 등 시민운동이 발전시켜 온 핵심 의제들 가운데 가장 폭발적인 동원력을 과시하며 전체 시민운동을 주도해 온 주력운동은 단연 평화운동이었다. 유럽에 배치된 핵무기 철수라든가 미국의 이라크 전쟁 등에 반대해 유럽 전역에 조직되는 동시 시위에 수백만 명의 인파가 참여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됐다. 그만큼 평화는 오늘을 살아가는 세계 시민들의 보편 가치다.
지난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직된 총선시민연대가 유권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이래 한국 시민운동을 주도해 온 것은 정치개혁운동이었다.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정치개혁운동의 동력은 현저히 약해졌다.
이명박 정부의 민주 결핍성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은 2년 전 촛불시위가 보여 주듯 평소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의 순간적인 동원과 저항으로 표출되는 경향을 보여 준다. 참여연대의 이번 행동은 새로운 주력운동을 모색해 오던 우리 시민단체가 선진국 시민운동의 흐름에 크게 다가섰음을 보여 준다. 평화운동이 한국 시민운동의 주력운동이 될 조짐을 뚜렷이 했기 때문이다. 안보리에 서한을 발송한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참여연대를 지원하는 회원 규모가 10% 이상 늘어났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해 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도통 모르는 이명박 정권과 이를 지지하는 관변단체들이 역설적으로 평화운동의 성장과 정착을 열심히 돕고 있다.
김수진<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