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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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세종로 네거리에서 생각하는 4월 혁명과 촛불집회

<Weekly 경향>은 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역사적 사건들의 현장을 찾아 그 의미를 짚어 보는 2010년 연중기획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를 연재한다. 2·28 대구 의거와 3·15 마산 의거가 예비한 혁명의 기운은 마침내 1960년 4월 19일 혁명의 불길로 치솟았다. 50년 전 그날 학생과 시민으로 이뤄진 시위대는 세종로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정권으로 하여금 결국 시민권력의 힘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박태균 교수에 이어 김호기 교수가 세종로를 찾아 ‘거리의 사회학’ 관점에서 4·19 혁명의 현재적 의미를 반추했다. <편집자주>

1960년 4월혁명 당시 국회 건물로 쓰인 서울시의회 건물 앞으로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1960년 4월혁명 당시 국회 건물로 쓰인 서울시의회 건물 앞으로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몇 년 전 세종로 지역의 복원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을 때 이에 대해 모 일간지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당시 내 견해는 역사의 복원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세종로 일대가 서울시민, 나아가 우리 국민 전체의 역사적 자산이라면 치밀한 준비와 개방적 토론에 기반한 문화 거버넌스를 통해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세종로 네거리와 ‘거리의 사회학’
이 칼럼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칼럼이 실린 날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전화를 걸어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그는 전문가답게 세종로 지역의 복원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찬찬히 설명했다. 다른 하나는 이 칼럼에 내가 좋아하는 옛 가요 한 가락을 인용한 점이다. ‘울어라 은방울’이다.

“은마차 금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사랑을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1948년에 장세정씨가 부른 노래다. 당시 서울 거리에 은마차, 금마차가 다녔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열 여덟 재수생 시절 이 지역에 진출한 이래 이 노래에 나오는 세종로는 이후 내 삶에서 중심 공간의 하나를 이뤄 왔다.

거리는 안토니오 그람시에 따르면 시민사회의 한 구성 요소다. 거리는 우리 일상이 진행되는 현실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의식이 내면화되는 상징의 공간이기도 하다. 더욱이 내가 공부하는 사회학의 분석 대상인 사회는 바로 이 거리들로 연결돼 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진정한 사회학은 다름 아닌 ‘거리의 사회학’이라는 다소 치기 어린 주장을 하기도 했다.

지난 4월 6일 오전에 광화문 광장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바로 이 ‘거리의 사회학’이었다. 제법 말쑥하게 정리된 광화문 광장을 둘러보면서 이 광장을 걸어갔거나 이 주변을 서성거린 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에도, 2008년 촛불집회에도 세종로 네거리는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거리의 사회학’ 관점에서 이 지역이 우리 현대사의 주요 공간으로 등장한 것이 4월 혁명을 통해서였다. 정확하게 50년 전인 1960년 4월 19일 시위대는 남쪽에 있는 시청으로부터 북쪽의 중앙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경무대로 가기 위해 효자동에 도달한 오후 1시 20분에 돌연 시위대를 향한 발포가 이뤄졌고, 순식간에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

기록을 보면 4월 19일 하루에만 183명의 사망자와 63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제1공화국이 종언을 고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날을 기점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었다.

4월 혁명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혁명 당시부터 계속 토론해 온 문제다. 그리고 이 쟁점은 4월 혁명의 진행 과정을 단기적 사회운동, 아니면 장기적 혁명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4월 혁명을 시민혁명 또는 민중혁명으로 볼 경우 혁명은 의당 5·16 쿠데타에 의해 부정될 때까지 지속됐다고 볼 수 있는 반면에 정치봉기로 볼 경우 과도 정부가 수립되면서 끝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월 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4월 혁명은 과연 혁명인가, 정치봉기인가. 당시 진행된 역사적 사실, 무엇보다 학생·지식인·도시 주변층이 혁명의 주도 세력이었고 이들의 핵심적 요구가 이승만 정권의 퇴진에 있었다는 점을 돌아볼 때 4월 혁명을 혁명으로 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는 듯하다.

김호기 교수가 광화문 광장에 서 있다. 김 교수는 2008년에 있은 촛불시위가 4월혁명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말한다.

김호기 교수가 광화문 광장에 서 있다. 김 교수는 2008년에 있은 촛불시위가 4월혁명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말한다.

일각에서는 당시 혁명적 분위기는 존재했지만 혁명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해 민중항쟁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혁명이 정치·경제적 구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변화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4월 혁명을 혁명으로 명명하기는 사실 어려울 것이다. 이에 따라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엄밀한 개념화를 고려할 때 혁명보다는 오히려 정치봉기 내지 민중항쟁이 더 적합한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점에도 4월 혁명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혁명이라 부르는 것은 4월 혁명에 담긴 역사적 의미가 심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단체제 성립과 한국전쟁을 통해 일시적으로 단절된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열망이 다시 집단적으로 분출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혁명적 사회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지난 20세기 후반의 우리 현대사에서 4월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전환점을 이뤘다. 시민사회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시작한 4월 혁명은 연이은 정치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분출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4월 혁명이 지니는 의의는 아래로부터의 시민사회 저항이 성공한 최초 경험이었다는 데 있다. 이것이 성공한 사회운동인 만큼 이후 사회운동에 계속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4월 혁명의 주도 이념인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반독재·반외세 사회운동의 이념적 지반을 제공했고, 4월 혁명에 대한 집합적 기억은 이후 시민사회의 저항에서 정서적 공감대의 원천을 이뤄 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4월 혁명은 현대 우리 사회의 주요 과제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 새로운 변화를 창출해 내지는 못한 내재적 한계를 안고 있기도 했다. 1960년 당시 우리 사회의 역사적 조건을 고려할 때 4월 혁명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 이상의 것을 성취하기란 사실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4월 혁명의 현재적 의미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이란 시각에서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은 4월 혁명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6월 민주화운동은 주도 세력과 이념에서 4월 혁명을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개 과정 또한 유사한 경로로 진행됐다.

분단체제 성립과 한국전쟁으로 결빙된 시민사회가 4월 혁명을 통해 다시 해빙하기 시작했다면 6월 민주화운동을 통해 이 시민사회는 부활하고 더욱 성숙해 왔다. 이러한 자유와 민주주의, 평등에 대한 열망은 1987년 6월로 끝난 것은 물론 아니었다.

4월 혁명 당시 국회로 쓰인 서울시의회로 가기 위해 시청 방향으로 걸어갔다. 청계 광장을 지나고 한국프레스센터까지 가자 가까이 서울 광장이 눈에 들어 왔다. 자연스레 2년 전 촛불집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촛불집회는 민주주의의 살아 있는 현장이었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적잖은 글을 썼다. 그 가운데 가장 아끼는 글은 2008년 6월 27일 경향신문 정동칼럼으로 쓴 ‘촛불이 전하는 말’이다.

촛불이 전하는 말

우리 현대사에서 민중의 집단적 저항은 언제나 세종로에 집결해 분출됐다.

우리 현대사에서 민중의 집단적 저항은 언제나 세종로에 집결해 분출됐다.

“어느 날 그가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다. 처음에는 소녀들과 함께 왔다. 그리고 나이 든 어른들과 어린 초등학생들이 더불어 왔다. 어떤 이들은 유모차를 끌고 왔고, 다른 이들은 예비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처음엔 청계천이 시작되는 곳에, 이어선 덕수궁 대한문이 보이는 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를 들고 북악산이 바로 보이는 광화문을 향해 곧바로 걸어갔다.

촛불이었다. 2008년 5월 우리를 성큼 찾아 온 그는 촛불이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아 왔다. 세계화라는 움직이는 타깃을 어떻게 조준해야 할지 몰라 어떤 이들은 우리의 생명, 기품, 위엄까지도 시장에 모두 맡겨야 한다는 무모한 궤변을 내놓았고, 다른 이들은 개방이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황당한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촛불은 이런 궤변과 억지에 대한 거부이자 비판이자 저항이었다.

촛불이 가리키는 길은 열려 있다. 촛불은 대의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게 아니다. 주인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는 오만한 대리인을 책망하고 바로잡으려는 것, 시민행동의 참여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의 시민불복종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정직하게 보면 우리 사회에서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나 있었던가.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 사회가, 우리 민주주의가 걸어온 길 가운데 처음이지 않은 길이 어디 있던가.

촛불은 여름 밤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었다. 장마가 잠시 그친 밤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이 환히 서울을, 이 땅을 비추고 있다. 도윤아, 너는 기억해야 한다. 2008년 봄 우리를 성큼 찾아 온 촛불을. 너와 내가 세종로 언저리에서 함께 서성거리며 들었던 촛불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을.

우리는 보았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이 천천히 내려와 우리 모두 마음속 생명의 불꽃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음을. 도윤아, 너는 말해 줘야 한다. 2008년 봄에서 여름까지 거리에서, 광장에서, 자기 방에서 때로는 함께 때로는 홀로 타오르던 촛불의 의미를, 촛불이 전하는 자유와 평등과 생명의 간절한 소망을 언젠가 태어날 네 아이에게 말해 줘야 한다. 촛불이 가르쳐 준 민주주의를 자랑스럽게 말해 줘야 한다.”

도윤은 민주주의를 공부하는 당시 조교를 맡은 제자다. 촛불이 가득하던 세종로를 함께 걸으면서 우리는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관계, 우리 민주주의에서의 사회운동이 지니는 의미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거리의 사회학’이다.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배우고, 민주주의를 토론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게 우리 현대사이지 않은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세종로 네거리로 혼자 걸어왔다. 바로 앞 북악산이 보이고 그 옆 인왕산이 눈에 들어왔다. 열 여덟의 내가 이제 오십이 됐듯이 이 거리에는 우리의 역사와 나의 역사에 대한 기억들이 서로 교차해 겹겹이 쌓여 있다. 결코 바랠 수 없는 과거의 기억들이 오늘의 나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시간대에 쏟아져 나오는 시민들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글·김호기 연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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