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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 충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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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범국민대회 이후에도 각계 시국선언과 대규모 집회 이어질 전망

6·10범국민대회가 열린 10일 시민들이 서울광장을 가로막고 있던 경찰을 몰아내고 있다. <남호진 기자>

6·10범국민대회가 열린 10일 시민들이 서울광장을 가로막고 있던 경찰을 몰아내고 있다. <남호진 기자>

‘6·10범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9일 서울광장에는 아침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지난달 29일 이곳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의 열기가 막 열하루를 넘긴 날이었다. 이날 아침 많은 언론은 ‘충돌 우려’라는 제목을 뽑았다. 서울광장을 ‘사수’하기 위해 1박2일 노숙투쟁을 결의한 민주당은 오후 4시쯤부터 광장에 천막을 쳤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날 밤 4개조로 나눠 오후 6시부터 2시간씩 돌아가면서 서울광장을 지켰다. 경찰이 차벽을 설치할 경우 의원들이 곧바로 모이기 위해서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서울광장을 가두었던 차벽이 언제든지 둘러쳐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서울광장에서 치를 예정인 범국민대회에 대해 일찌감치 집회금지를 통고했다. 한국자유총연맹 서울시지회가 먼저 신고한 ‘승용차 자율 요일제 캠페인’ 집회와 겹친다는 게 이유였다. 서울시도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조례에 문화활동, 여가 선용에만 사용할 수 있다고 돼 있으므로 원칙을 준수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대로를 사이에 둔 ‘2개의 민주주의’
경찰과 서울시 모두 서울광장의 상징성을 알고 있다. 서울광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당시 노제와 지난해 촛불집회의 역동성이 꿈틀대는 공간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급속히 등을 돌린 민심이 서울광장이라는 공간과 ‘화학작용’을 일으킬 경우 상당한 폭발력을 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가 ‘광장 공포증’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이유는 경찰과 서울시가 내세운 군색한 변명만으로도 충분했다.

범국민대회가 열린 10일, 아침부터 광장은 시끄러웠다. 서울광장에서 밤샘 천막농성을 한 민주당 의원들은 오전 8시쯤부터 경찰과 한 차례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민주당 보좌진과 시민 등 300여 명이 무대장치를 실은 트럭이 광장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트럭을 끌어내려는 경찰 견인차가 다가오자 오전 8시 55분쯤부터 두 번째 충돌이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대한문 앞에서 7일째 단식농성 중이었던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견인차 앞에서 끝내 쓰러져 강북삼성병원으로 옮겨졌다.

두 차례 충돌 이후 정복을 입은 경찰이 서울광장 주변을 빙 둘러싸 지켰다. 광장 주변에는 진압복을 입은 경찰들이 대기했다. 행사 구조물을 실은 트럭이 다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후 몇 차례 트럭 진입을 둘러싸고 드잡이가 벌어졌다.

한낮에는 조용했다. 본격적인 행사는 오후 7시부터였다. 소강 상태에서 강연과 문화제가 이어졌다. 서울광장에 세워진 천막 앞에 마이크를 잡고 6·10항쟁의 의미를 전하는 강연을 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22년 전 이 자리에서 호헌 철폐와 직선제 쟁취를 외쳤다”며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민중가수 손병휘씨는 일찍 광장에 나온 시민들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을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충돌은 광화문을 향하는 대로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고 있었다. 야4당과 시민사회 진영이 어렵게 지켜낸 광장에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외치고 노래부르고 있을 때 길 건너 세종문화회관에서 또 다른 민주주의에 대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정부 주관 제22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이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민주주의가 열어놓은 정치 공간에 실용보다 이념,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가 앞서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도 우리가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고 말했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집회시위의 자유 등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되레 시민사회에 민주주의 후퇴의 책임을 돌린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대통령이 얘기하는 ‘민주주의’와 길 건너 시민들이 한 입에 올리는 ‘민주주의’는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왕복 12차선 대로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민을 내쫓기 위한 경찰의 폭력
이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고 언급한, 서울광장을 가득 메운 ‘이기적 집단’은 역설적이게도 이명박 정부 하의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했다. 1987년 이전의 독재 시절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서울대·중앙대 교수들을 시발점으로 수많은 대학이 시국선언을 이어온 터였다. 서울광장에서 만난 수많은 시민도 그 뜻을 같이했다. 박영호씨(39·회사원)는 “87년에는 5공화국이 일종의 사과를 했다”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광장으로 나와야 이명박 정부가 사과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권은숙씨(43·여·출판업)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후퇴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나왔다”며 “각계 각층의 시국선언이 더 이어져 세상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딸과 함께 나온 권기자씨(40·주부)는 “87년 대학생, 시민들이 피를 흘리면서 지켜낸 민주주의가 발전은 못할망정 후퇴하고 있다”며 “상위 1%만을 위한 정책만 남았다”고 말했다. 자신보다 공동체를 걱정하는 이 시민들을 이 대통령은 ‘이기적 집단’이라고 했다.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날 대회는 서울광장뿐 아니라 부산·대구·광주 등 전국 24곳에서도 동시에 진행됐다. 서울에선 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진보신당·사회당 등 야5당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민생민주국민회의, 4대 종단 등 시민사회단체 및 각계 인사들과 시민들 5만여 명이 서울광장을 메운 가운데 저녁 7시 30분부터 범국민대회가 시작됐다. 친구·회사 동료·가족 등과 함께 나온 시민들은 서울광장 잔디에 앉아 이명박 정부의 국정 기조 변화를 외쳤다. 청소년 3000여 명의 시국선언을 모아서 인쇄한 종이를 줄에 이어 붙여 나온 학생들은 덕수궁 돌담길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걸었다. 녹색연합도 “운하 반대”라는 글귀를 적은 초대형 플래카드를 태평로 가로수 사이에 걸어뒀다. 광장에서 만난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는 방명록에 “청와대, 방 빼!”라고 적었다.

6·10범국민대회가 열린 10일 서울광장에 많은 시민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다. <남호진 기자>

6·10범국민대회가 열린 10일 서울광장에 많은 시민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다. <남호진 기자>

야당 정치인들의 목소리에는 모처럼 힘이 담겨 있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범국민대회 본행사에서 “오늘 민주개혁 진영 전체가 하나가 됐다. 민주개혁 진영이 모두 하나가 되면 민주주의 후퇴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는 “6월항쟁으로 직선제 쟁취 안 했으면 이명박 대통령 당선도 없었다”며 “동의하지 않는 분이 있을지 몰라도 이명박 정부를 만들어낸 아버지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국민”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아버지에게 칼부림하고 죽여버리려는 패륜무도한 놈이 있습니까?”라고 분노를 표했다.

해가 넘어갔다. 광장에는 1년 전 그때처럼 다시 촛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6·10정신 계승하여 민주주의 회복하자”고 입을 모아 외쳤다.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대통령 사과와 강압통치 중단,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국정기조 전환과 반민주·반민생·반인권 악법 추진 중단, 부자 편향 정책 중단과 서민경제 살리기 정책 최우선 시행, 남북의 평화적 관계 회복을 위한 정책 시행 등 4개항을 요구했다.

‘제2의 촛불’ 가능성 배제 못해
전경버스로 만든 차벽을 포기했던 경찰이 서울광장을 내준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밤 10시 30분쯤, 범국민대회가 끝났고, 직후인 밤 11시 8분쯤 강제 해산을 시작했다. 그 시각 도로에는 비를 맞으면서도 현장을 지킨 대학생들의 깃발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경찰은 서울시의회 앞 도로에 있던 시민들을 밀어내 20여 분 만에 서울광장까지 장악했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서울에서 24명, 부산에서 23명 등 모두 47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뒤로 빠지는 시민의 머리를 방패로 가격했다. 또 당시 현장을 촬영하던 진보신당 ‘칼라TV’ 리포터를 강력범과 맞섰을 때 사용하는 호신용 장비인 ‘삼단봉’으로 폭행했다. 시민들은 경찰이 광장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폭력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경찰은, 서울시는, 이명박 정부는 다시 서울광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서울광장을 향한 충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범국민대회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각계의 시국선언이 계속되고 있고 서울에선 주말에 대규모 도심 집회와 파업도 이어질 전망이다. 범국민대회를 진행한 준비위는 조만간 다시 모여 10일 발표한 ‘4대 요구안’의 실현을 지속적으로 촉구할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참여연대 안진걸 사회경제국장은 “준비위는 당분간 현재 구성대로 운영되면서 이명박 정부의 총체적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계의 하투(夏鬪)도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형성되고 있는 반정부 기류와 맞물릴 경우 폭발력이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13일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고 박종태 열사 투쟁 승리 및 쌍용차 구조조정 분쇄 결의대회’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었다. 같은 날 2002년 주한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미선양의 7주기 추모제도 열렸다. 민주노총 등은 25∼26일에는 ‘최저임금 국민임금 인상 투쟁’, 27일에는 민주노총 총력투쟁 결의대회 등도 준비하고 있다.

광장 충돌을 해결할 열쇠는 이명박이 대통령이 쥐고 있다. 기념사에서 밝힌 것처럼 이명박 정부의 독선적인 국정 운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집단 이기주의와 이념 과잉으로 몰아붙이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을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하는 무리로 이해한다면 문은 열릴 수 없다.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계속 귀를 막을 경우 잠재된 불만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터져나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화와 타협을 밀어내고 독주를 계속 이어갈 경우 정치는 실종되고 ‘제2의 촛불’이 밝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화여대 학생으로 87년 6월항쟁에 참여했던 유혜선씨(43·여)는 “경찰력에 의지해 국민의 목소리를 막으려는 정권의 말로가 좋지 않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심문희 사무총장(42·여)은 “이명박 정부가 일방 독주를 계속해서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며 “이 대통령은 10%도 안 되는 사람이 거리로 나오고 시국선언한다고 하는데 그건 자기합리화를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광장’에 나오는 이들이 부르짖는 국정 쇄신이 필요하다는 이들이 70%를 넘는 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금기는 욕망을 부른다. 광장을 막은 차벽은 언젠가 열릴 수밖에 없다. 급한 불만 끈다고 불씨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학습 현장인 서울광장마저 허용하지 않고 있다”며 “소통이 안 되는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 때문에 불만이 표출되고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 정부의 정책 기조에 대한 열망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당분간 야당과 시민사회 진영이 유기적으로 협력·연대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회부·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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