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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창을 위한 변론’ 책 펴낸 송기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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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변호사로 성공하는 게 소망”

[인터뷰]‘곱창을 위한 변론’ 책 펴낸 송기호 변호사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미국 사료조치 관보의 오역과 한국 농림부 고시의 오류를 입증하며 <100분 토론>에서 전 국민의 관심을 모은 송기호(45) 변호사. 그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따른 광우병 파동으로 전국이 촛불로 일렁일 때, TV와 신문 등 각종 매체의 인터뷰와 기고를 통해 정부의 잘못을 빈틈없이 지적한 통상전문가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를 궁금해했다. TV에 수시로 나와 논리적으로 열변을 토하는 그가 정작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최근 <곱창을 위한 변론>(프레시안북)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를 일방적으로 추종한 결과 우리의 농업, 먹을거리가 얼마나 위기에 처했는지 고발하고 있다. 그가 대표 변호사로 있는 서울 교대역 부근의 수륜법률사무소. 마른 체형의 송기호 변호사는 말투나 태도에서 예의 진지함과 꼼꼼함이 여실히 배어나왔다. 인터뷰는 그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 논리적 입증
그는 1963년 바닷가와 접한 전남 고흥의 농가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고사리손으로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한 어린시절을 그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광주로 나가 공부한 그는 광주일고를 거쳐 1981년 서울대 사회대(당시 단과별로 모집)에 합격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목격한 광주민주화항쟁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에 왜 그런 모순이 생기는지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년 후 경제학과를 선택하라고 종용한 아버지의 뜻에 반해 사회학과를 고집한 그는 결국 타협안으로 무역학과에 들어갔다.

“사회학과를 선택하지 않는 조건으로 졸업 후 제가 무엇을 할지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어요. 또 무역학과를 선택한 데는 집에서 원하는 것처럼 졸업 후 제가 출세하리라는 기대는 아예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었죠.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는 졸업 후 대체로 윤택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던 데 비해 무역학과는 조금은 삐딱선을 탈 수 있는 여지가 있었거든요.”

학교와 군대를 마친 1987년 그는 농촌으로 내려갔다. 대학생활 중 농촌활동을 주도하면서 자신의 삶의 방향은 농촌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해남, 나주에서 YMCA전국연맹 농촌부 간사로 일했다. 첫 월급을 탄 날, 부모님의 빨간 내복을 사들고 고향집을 찾아갔지만 아들에 실망한 아버지는 끝내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그해 농민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대중적인 수세거부운동이 전남 나주에서 처음 시작되면서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수세거부운동이라는 본격적인 대중운동 경험이 제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대중은 어떤 경우에,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침체되고 퇴각하는지 목격하면서 제 사고가 정립됐거든요.”

하지만 YMCA 활동을 접고 영암에서 농업 노동자로, 임차농으로 살면서 그는 벽에 부딪혔다. 농민운동을 하는 동시에 객지에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는 생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이다. 결국 그는 1991년 농촌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와 취직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미 서른이 된 나이로 응시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어쩌다 면접까지 가도 농사를 짓다가 나이를 먹었다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한결같이 운동권 출신일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을 던졌다. 1년 가까운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1992년 동창회 명부를 뒤져 얼굴도 모르던 학교 선배를 찾아갔어요. 국민은행 입사시험을 앞두고 국민은행에서 일하시는 서울 상대 출신을 찾아낸 거예요. 필기시험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어요. 국민은행이 정부투자기관이다보니 필기시험 결과만 좋으면 합격은 문제 없었거든요. 하지만 전 나이 제한에 걸려 시험을 볼 수 없는 처지였어요. 결국 선배 덕분에 은행에 들어가 국제영업부에서 근무할 수 있었지요.”

“정부의 통상법 악용에 모멸감”
취직과 함께 결혼도 했다. 하지만 피라미드 구조의 말단 행원으로서 그는 생계 문제를 해결한 이상의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2년 만에 사표를 냈다. 당시는 학생운동 출신 중 일부가 학원가로 흘러들어가고, 또 일부가 대학으로 돌아가 사시를 준비하는 흐름이 있었다.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3년 만에 합격했다.

그런데 운명이었을까. 사법연수원 시절, 통상법이 흥미로워 전공으로 선택한 그는 통상법의 핵심 분야가 농업통상 분야임을 알게 됐다. 다시 농업 문제로 귀착한 것이다. 변호사가 돼 로펌에서 일하던 2002년 어느 날, 사무실에 마늘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찾아왔다. 중국산 마늘 수입이 급증해 피해를 보자, 농민들이 중국산 마늘에 우리 정부가 2000년 발동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연장해달라고 무역위원회에 요청했으나, 무역위원회는 피해조사조차 거부한 것이다. 알고 보니, 우리 정부가 중국산 마늘에 대해 세이프가드를 연장하지 않겠다고 중국 정부와 오래전 약속한 것이었다. ‘이면합의’ 파동으로 번진 이 사건으로 2000년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던 한덕수씨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비서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송 변호사의 진가가 빛난 순간이다.

그로부터 1년 후 송 변호사는 로펌을 사직하고 호주에서 농업과 환경법을 공부한 후 지금의 수륜법률사무소를 열었다. 기존 로펌에서는 농업을 위주로 사건을 수뢰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5년.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그에게 쌀 협상 국정조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이 미국, 중국 등과 진행한 쌀 협상문서가 온통 영어와 중국어로 돼 있으니, 자기 대신 문서를 읽고 그 의미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흔쾌히 응했다. 그는 “당시 국회 국정조사 조사반원으로 보낸 한 달이 나의 행로를 바꾸어놓았고,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는 통상법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쌀 협상 때나 쇠고기 수입 협상 때 그를 분노케 한 것은 정부가 가난한 농민들의 운명을 통상법의 이름으로 흥정하면서도, 정작 농민들은 철저히 따돌렸다는 사실이다.

“1993년 우르과이라운드(UR) 협상으로부터 20여 년 간 저는 한국 정부가 WTO(세계무역기구)나 FTA(자유무역협정)의 이름으로 농민들의 일상과 꿈을 짓밟는 것을 목격했어요. 정부가 통상법으로는 잘못된 게 없다고 거짓말하는 것을 보며 견딜 수 없었죠. 통상법을 돼지에게 주는 먹이처럼 정부가 악용하는 데 큰 모멸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통상법 전문가인 제가 나선 거예요. 게다가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문제는 저와 제 가족의 문제이기도 해요. 특히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국민의 삶을 공포에 가까운 혼돈 속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판단했어요.”

그의 소망은 “대기업이나 대형 은행, 땅부자 등 우리 사회에서 이미 많이 가진 자들을 대리하지 않고, 농민이나 소비자를 대리해도 변호사로 성공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고 한다. 수륜법률사무소는 수출입과 농업, 식품 등과 관련한 소송을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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