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한국 사회를 읽는 키워드는 ‘불안’이다. 그간 언론 보도의 단골 메뉴이던 가공식품 위생불량 사고가 올해도 끊이지 않더니, 5월 들어서는 광우병과 조류인플루엔자가 밥상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안적인 먹을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고조되고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생활협동조합이다.

경기 안양시 바른생협 매장에 진열된 친환경 농산물. <정원식 기자>
국내 221개 생협, 조합원 수 40만
안양 지역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바른생협 오승현 상무이사는 “올해 들어 매달 80~90여 명의 조합원이 가입하고 있고, 3월과 4월에는 180여 명이 가입했다”고 말했다. 회원 수 15만으로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진 친환경농산물 직거래 조직 한살림도 올해 4월 신규 회원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4% 증가하여 1900여 명에 달했다.
생협은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비영리 조직이다. 공동 출자, 공동 운영, 공동 이용을 원칙으로 한다. 마트나 시장을 이용할 경우 소비자는 구입하는 물품의 가격만 치르면 된다. 생협을 이용하려면 일단 조합원으로 가입해야 한다. 생협마다 금액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2만~3만 원가량의 출자금을 내면 조합원으로 등록된다. 주문은 인터넷이나 전화로 가능하고, 매장을 직접 찾아가서 구입할 수도 있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경우에는 대개 주 1회로 한정되는데, 보통 주문한 지 3일 후에 물품이 도착한다. 2007년 5월을 기준으로 국내에는 221개의 생협이 있고, 조합원 수는 약 40만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생협 조합원들이 생협을 이용하는 이유는 안전한 먹을거리와 건강에 대한 관심이 첫째다. 주부 김미자(39·제주시)씨는 2002년 가을부터 생협을 이용했다. 그해 5월 새집으로 이사하면서 당시 2살이던 둘째 아이에게 아토피 증상이 생긴 것이 계기였다. 아이의 아토피 증상으로 고민하던 김씨는 생협을 이용하던 이웃 언니의 조언을 받고 생협에 가입했다. 생협 물품이라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안전성을 확신하지는 않았다.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생산지 방문에 빠짐없이 참석한 뒤에야 믿음을 갖게 되었다. 김씨는 “생산지에 직접 가서 내가 먹는 식품들을 어떻게 재배하는지 보니 신뢰와 함께, 내 밥상에 올라오는 것이 농민들의 땀이 밴 것들이구나라는 감동과 고마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씨가 생협 물품을 구매하는 데 지출하는 돈은 월 평균 40만 원가량이다. 생협에서 가져온 물품이 떨어지더라도 일반 마트에서 파는 식품은 사지 않는다. 아이의 아토피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김씨는 주위 사람들에게 생협 이용을 권하는 생협 전도사가 됐다. 그는 “처음에는 내 아이와 내 가족만 생각해서 시작한 것이지만, 지금은 생협을 이용하는 것이 자연과 땅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생산지 직접 가보니 신뢰 생겨”
일반 마트나 시장에서 파는 식품에 비해 생협 물품은 다소 비싼 편이다. 두부 한 모가 1900~2000원이다. 올해 초부터 생협을 이용한다는 안양의 박모(42·여)씨는 “생협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엄마들은 많지만 비용 부담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매달 생협을 통해 40만 원 정도의 식품을 구입한다는 박씨는 “그렇지만 나는 비용 부담이 있더라도 장기적으로 생각한다. 나중에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지출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가격 차이는 감수할 수 있다. 게다가 생산지를 방문해서 생산자의 얼굴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신뢰를 준다”고 말했다. 분당에 사는 우미숙(46·여)씨도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는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는다”면서 “같은 친환경 식품이라도 마트는 훨씬 더 비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생협전국연합 이재욱 사무총장은 “생협은 가격이 비싼 대신 안전성이 보장되고, 생산자와 조합원 사이의 계약에 따라 가격을 조정하기 때문에 물가변동에 관계없이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15일 고양 파주 두레생협 사무실에서 축산 농민들과 조합원들이 토론하고 있는 모습. <정원식 기자>
생협과 대형 마트의 가장 큰 차이는 생협의 경우 ‘얼굴이 보이는 관계’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지난 15일 오후 2시쯤 고양시 일산동구에 위치한 고양파주 두레생협 사무실. 구릿빛 얼굴의 중년 남성 6명과 가정주부 11명이 서로 마주 앉았다. 사무실이라고는 하지만 방이 셋 딸린 일반 주택 2층이다. 남성들은 강원 화천의 축산농민들이고, 여성들은 두레생협 조합원들이다. 이날 사무실에서는 생산자 초청 송아지 입식기금 설명회가 열렸다.
두레생협은 2006년 7월 조합원들이 먹는 한우를 자체적으로 조달한다는 목표 아래 원주 및 화천 지역 축산농민들과 함께 ‘두레축산’을 설립했다. 지난해 5월 1차 입식기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마련한 돈으로 송아지 107마리를 샀다. 한우는 약 2년 동안 사육해야 출하할 수 있기 때문에 지난해 조합원들이 축산농가에 지원한 돈의 상환기간을 연장해달라는 것과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송아지를 추가로 입식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게 이날 설명회의 안건이었다.

10일 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촛불 집회 모습.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허용 방침으로 먹을거리 안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강윤중 기자>
두레생협 연합회 장순재 축산팀장과 축산농민들이 지금까지의 성과와 설명회 취지를 설명한 후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조합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원주와 달리 화천의 경우 황소 비율이 더 많은 건 무엇 때문인가” “배합사료와 조사료의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 “한우 사육 기간이 2년이라면 올해 자금상환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점을 미리 예측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등 민감한 질문이 쏟아졌고, 한 조합원은 광우병 위험과 관련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설명회는 “늘 어려운 부탁만 드린다. 소를 잘 키워서 질 좋은 쇠고기를 먹게 해드리겠다”는 김남영 화천 축산농민 대표의 다짐에 대해, 조합원들이 “먼 길 와주셔서 고맙다. 함께 대안을 만들어가는 분들이라 언제 뵈어도 좋다”고 화답하는 것으로 끝났다.
비용 부담 때문에 주저하기도
생협은 이처럼 생산자와 조합원 사이의 인간적 신뢰 관계를 밑절미로 삼아 움직이는 조직이다. 이를 위해 조합원들은 주기적으로 생산지를 견학하거나 생산지에서 아이들을 위한 캠프를 열고, 일손이 달리는 시기에는 수확을 돕기도 한다. 생협에서는 생협에서 거래하는 물품을 ‘생활재’라고 부르고 ‘배달’이라는 용어 대신 ‘공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단순히 물질적인 이해 관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의 양식을 만들어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 생협 생활재에는 단순히 가격이나 생산지만 표시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의 얼굴까지 보인다. 생협 물품의 유통 과정을 ‘얼굴이 보이는 물류’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에는 외연을 확장하여 설탕이나 커피 같은 물품을 원산지 주민들로부터 직수입하여 공정무역을 하는 생협들도 생겨났다. 해외 생산자들과의 국제적 연대까지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고양파주 두레생협 박경희 이사장은 “생협은 생명가치를 살려내는 운동으로 이제 먹을거리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문화를 포함한 생활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소비자들은 늘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지출할 것을 요구받는다. 생협은 그 지배적 질서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며, 대안적 삶의 영토를 꾸준히 확장해가고 있다.
일본의 식육(食育) 기본법 친환경적 먹을거리 분야에서 일본은 한국을 한참 앞서 가고 있다. 고베 시 시민 10명 중 7명이 생협회원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을 정도다. 친환경 먹을거리에 대한 일본 사회의 관심은 ‘식육기본법’의 제정으로까지 이어졌다. 법 제정의 배후에는 이제는 정부 차원에서 국민들에게 먹을거리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이 깔려 있다. 식육기본법 제정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은 2001년 일본에서 발생한 광우병 때문이다. 이후 O-157 식중독 및 식품 위장포장 사고 등이 터지면서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이 한목소리로 먹을거리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이에 일본 정부는 2005년 6월 17일 체계적인 먹을거리 교육을 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식육기본법을 공포했다. 법은 전문과 부칙, 33개 조문으로 이뤄져 있다. 일본 정부는 식육기본법을 추진하기 위해 내각부내 특명담당 대신을 식육대신으로 임명하고, 식육기본법에 의거하여 2006년 3월 식육추진기본계획을 작성했다. 이 기본 계획을 토대로 일본 정부는 일본의 전통적 식생활을 기준으로 ‘식사 밸런스 가이드’를 만들어 현재 40% 수준인 식량자급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2006년 9월 현재까지 330명의 영양교사를 전국 학교에 배치하여 아이들에게 먹을거리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고 올바른 식습관을 익히게 하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한살림 조완형 상무이사는 우리 정부는 먹을거리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전무한 상황이라면서 “먹을거리 안전, 식량자급률, 농업 문제 등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식육기본법과 같은 법률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 1인당 쌀소비가 1㎏ 줄어들면 농지 1만㏊가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전통적 식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면서 우리 농업을 살린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지적하면서 “광우병 문제나 온실가스 감축 문제도 먹을거리에 대한 접근방식을 바꿔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생협전국연합 권순실 회장도 정부가 “장기적으로 식량자급률을 높이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이 식탁 불안을 가져왔다”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정책을 선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