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가야 할 길은 사람과 교육에 있다”
![[아주 특별한 인터뷰]끝나지 않은 ‘교육실험’ 김영길 한동대 총장](https://img.khan.co.kr/newsmaker/768/14_a.jpg)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NASA(미 항공우주국)에 취직한 한국인이 있었다.NASA에서 발명상을 두 번 받고, 미국 저명과학자 인명사전인 ‘미국의 과학자’에 한국인 최초로 수록되기도 했다. 평생 연구실밖에 모르던 그가 어느 날 그곳을 뛰쳐나와 한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한동대학교 김영길(69) 총장 이야기다.
한동대를 포항에 있는 작은 대학이라고 얕보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삼성, LG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이 학교 졸업생들을 앞 다투어 뽑아갈 만큼 위상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커리큘럼과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도덕성 교육으로 김 총장은 한동대를 단기간에 명문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연구 중심의 대형 대학이 아닌 ‘교육중심’ 대학의 모델을 실험 중인 그를 만나러 포항으로 갔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포항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이 채 안 됐다.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 한산한 포항공항에서 자동차를 타고 내달리니 포스코공단과 죽도시장을 지나 오른편으로 북부 바다와 죽천 바다가 푸른 빛을 내뿜으며 출렁인다. 사람과 건물과 자동차가 빽빽한 서울과 비교하니, 포항이라는 도시가 주는 여유로움에 잠시 시샘이 난다. 왠지 포항 시민들은 매일 이 푸른 바다를 보고 밟으며 낭만을 느낄 것 같은 착각에서다. 어디에 살건 사람 사는 모습이야 오십보백보인 것을, 마음가짐에 따라서도 매사 개인차가 크다는 것을 찰나 망각했던 것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만나는 한동대학교는 서울의 여느 대학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우선 캠퍼스에 오가는 학생이 눈에 띄지 않는 게 이채롭다. 일제히 강의를 듣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학교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강의시간이 끝나자 학생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캠퍼스 곳곳에 학생들이 낮게 걸어놓은 플래카드도 한동대의 특성을 말해준다. 종교적인 구절 일색이다. 한동대학교는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해 설립된 학교다. 하지만 단순히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대학으로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NASA 연구실에서 연구에 심취해 있는 모습(왼쪽). 미국을 유학하기 위해 출국 전 공항에서. 비쩍 마른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방의 작은 대학이지만 매년 삼성과 LG를 비롯한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앞 다투어 이 학교 졸업생들을 뽑아간다(졸업생 취업률 70%, 대기업 취업률 30%). 실무능력과 인성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다. 무전공 무학부 무계열로 입학해 2학년 때 자신의 적성에 따라 전공을 선택하는 한동대 학생은 누구나 영어와 한문 그리고 컴퓨터에 능숙하다(졸업 필수조건이다). 교수 한 명이 서른 명 정도의 학생을 맡아 후견인 역할을 하도록 돼 있는 팀교수제도나 무감독 양심시험으로 대표되는 정직성 교육은 한동대만의 강점이다. 게다가 교과목의 30% 이상을 영어로 진행하고 외국인 교수 비율도 30%에 달한다. 2002년 30여 명의 입학생과 함께 시작한 한동국제법률대학원은 현재 16개국에서 온 20여 명의 외국인 학생을 포함해 100여 명이 재학 중인 아시아 최초의 미국식 로스쿨이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한동대는 수능시험 성적도 상위 3% 내 학생들이 입학하고 있다.
김영길 총장의 첫인상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는 것이다. 희기보다는 약간 푸른 기운이 도는 은발이라고 표현해야 적합할 것 같은 모발, 주름이 보이지 않는 서글서글한 얼굴, 꼿꼿한 자세와 힘찬 발걸음, 게다가 소년 같은 천진한 웃음까지. 누가 그를 칠순노인이라고 말할까 싶다. 권위나 위엄은 찾기 어렵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허물없이 쏟아내는 모습에서 이해타산이 가득 찬 세상과는 담을 쌓은 순수한 학자의 잔영이 느껴졌다.
그는 총장이 되기 전 과학자였다. 그것도 NASA(미 항공우주국)에서 근무하며 발명상을 두 번 수상하고, 1994년 미국 저명과학자 인명사전인 ‘미국의 과학자’들에 한국인 최초로 수록된 인물이다. 1997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전기발행센터의 ‘20세기의 뛰어난 사람 2000’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과학자가 된 것은 어린 시절 우연히 본 비행기 때문이다.
“경북 안동군 길안면 지례동이 제 고향이에요. 아버님이 산골인 그곳에 길산초등학교를 세워 교장을 하셨죠. 전 어렸을 때 자동차보다 비행기를 먼저 봤어요. 책을 찾아보니까 프로펠러 모형 비행기가 있어요. 그걸 만들어보겠다고 강가에 나가 미루나무를 잘라 바싹 말린 다음 숫돌에 갈아서 날카롭게 만들어 잘게 잘랐어요. 프로펠러가 잘 꼬여야 잘 돌거든요. 줄기차게 만들어냈는데 이상하게도 고무줄을 감아 땅에 놓으면 비행기가 날지 않고 땅에서만 왔다갔다하는 거예요. 그때 형님이 비행기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재료라고 말씀하셨어요. 훗날 제가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들어간 것은 비행기를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아버지, 형과 안동 집에서 포즈를 취한 장면.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형 고 김호길(왼쪽) 포항공대 초대 총장과 함께. 한동대 전경.(왼쪽부터 시계방향 순)
김 총장과 6살 터울인 형은 세계적인 물리학자이자 포항공대 초대총장인 고(故) 김호길 박사다. 김 총장은 형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김 총장은 경북의 3대 명문인 안동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했다. 500점 만점에 316점을 받아 꼴찌에서 네번째(커트라인은 304점)로 간신히 들어갔다고 한다. 1학년 1학기에는 낙제점을 받았다.
“당시 형님은 서울대에 다니시면서 국립중앙관상대(기상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계셨어요. 여름방학 때 성적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형님을 찾아갔죠. 형님은 ‘넌 머리가 나쁘지 않으니 지금부터 공부하면 된다’고 하시면서 출근하실 때마다 수학 문제를 내주셨어요. 특히 논리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기하 문제를 10개씩 내주신 후 퇴근 후 제가 틀린 문제에 대해 설명해주셨죠. 재미있었어요. 덕분에 2학기 때부터 수학만큼은 학교에서 제일 잘했어요.”
1959년 서울대사범대부속고등학교인 고계고등학교(지금의 장충고)에 입학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교내 온실로 사용하던 공간의 시멘트 바닥에서 살았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4년 내내 대한양회(현 대한유화공업) 이정호 회장(당시 전무) 집에서 입주 과외를 했다. 당시 서울대 등록금이 3만 원이었는데 이 회장은 그의 등록금뿐 아니라 생활비까지 대줬다. 군 제대 후 미국 미주리대로 유학 갈 때도 여비를 댔다. 김 총장은 “이정호 회장은 당시 내게 가장 큰 도움을 준 분”이라고 회고한다.
1967년 유학길에 오른 김 총장은 다행히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었다.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은 그는 석사과정을 밟고 6개월 후 뉴욕 RPI공대 박사과정에 합격해 초내열합금의 권위자인 스톨로프 박사 밑에서 수학했다. 그의 꿈은 오직 성능이 뛰어난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것. 그 꿈은 그를 NASA로 인도했다.
“제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어서 NASA 취업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미국 금속학회에서 제 박사학위논문을 발표하게 됐는데 마침 그 내용이 NASA에 꼭 필요한 연구라며 NASA 측에서 영입 제의를 한 거예요. 6개월간의 신원 조회 후 1974년 NASA 연구원으로 취직했죠.”
그런 가운데 결혼도 했다. 박사 과정을 밟던 1970년의 일이다. 결혼 전 이화여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 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던 아내 김영애(64)씨와 김 총장을 중매한 이는 김 총장과 친척인 김종길 고려대 교수다.
“편지로 왕래했어요. 편지에 부모님이 결정하시면 결혼하겠다는 전제하에 제 소개를 했어요. 두 달 뒤에야 답장이 왔는데 자기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거예요. 그때 제 형님은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로 계셨는데 마침 소련핵물리학회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하기 전 서울에 일주일간 머문다면서, 바쁜 저 대신 신붓감을 보고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다녀오시더니 좋다고 하시더군요. 전 한 번도 교회에 가본 적이 없지만 신이 정말 존재하는지 연구해보겠다고 편지를 보냈어요. 그렇게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약혼을 했고 이듬해 신부 측에서 보내준 양복을 입은 채 귀국해 결혼 2주 만에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1979년 국가의 부름을 받고 영구 귀국해 홍릉에 있는 한국과학원(현 대전 KAIST) 재료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리고 귀국 1년 만에 ‘과학기술부 특성화과제 1호’를 연구했다. 그의 연구는 반도체 금속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전자반도체 리드프레임 PMC-102’. 곧 제품으로 출시됐고 모토로라를 비롯해 세계 유명 반도체 회사에 수출됐다. 이 발명품으로 김 총장은 1982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15년간 한국과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가 국제 특허를 받은 논문만 25개에 달한다. 그런 그가 1994년 한동대 초대 총장이 된 것은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이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주 특별한 인터뷰]끝나지 않은 ‘교육실험’ 김영길 한동대 총장](https://img.khan.co.kr/newsmaker/768/19_a.jpg)
그러나 한동대는 설립 초기부터 학교 이사장이 바뀌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히 끊임없는 재정 위기 속에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오성연 행정부총장과 함께 기소돼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일은 그의 인생에서 또 다른 세상을 알게 된 계기가 됐다.
“재정적 어려움이 늘 있었는데 특히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가장 힘들었어요. 은행에서도 돈을 빌려주지 않아 교수 월급을 3개월간 주지 못했죠. 마침 교육부에서 교육개혁특성화 최우수 대학으로 한동대를 선정하면서 12억 원의 돈이 장려금으로 나왔어요. 원래 그 돈은 학교 시설을 위해 쓰라는 것이었는데 전 그것으로 교수들 월급을 줬어요. 그게 국고금전용죄가 된 거예요. 2001년 포항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면서 경주교도소에 53일간 수감돼 있었어요. 당시 언론에서는 현직 총장이 법정 구속됐다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죠. 당시 제가 들어간 감방에는 서른다섯 명이 수감돼 있었는데 감방장이 6하 원칙에 의해 저를 신고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어제까지 대학 총장이었는데 지금은 고무신 신은 수감자가 돼 있구나. 하지만 예수님은 내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했으니 내가 겪고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요.”
감방장은 김 총장의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문 앞에서 자게 할 수는 없다며 그를 안쪽에서 8번째 자리에 눕게 했다. 수감자들은 누운 상태에서 순서대로 어떻게 감방에 들어오게 됐는지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김 총장의 차례가 왔다. 김 총장은 “할 말이 없으나 내 차례가 왔으니 노래를 하겠다”고 말한 뒤 ‘고향의 봄’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수감자들이 한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김 총장은 “우리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총장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또 범죄자나 구분하지 않고 이렇게 나누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가 하는 감회에 가슴이 뭉클했다”도 회고했다.
수감된 지 나흘째인 5월 15일 스승의 날. 1500여 명의 학생과 교수, 학부형 300여 명이 손에 카네이션을 든 채 교도소를 찾아왔다. 질서정연하게 교도소 앞에서 ‘스승의 노래’를 부른 후 허밍으로 김 총장이 가장 사랑하는 곡인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잔뜩 긴장해 있던 경찰이나 교도관들은 학생들의 성숙한 태도에 놀랐다. 학생들이 돌아간 뒤 김 총장을 부른 교도관은 커피를 대접하며 “요즘 다른 대학들은 학생들이 총장실까지 점거하던데 한동대는 어떻게 교육하기에 학생들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독방에 가겠느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김 총장은 거절했다. 감방 동료들과 그 사이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 총장은 감방 동료들에게 일일이 주기도문을 써줬고 식사 때마다 같이 기도를 했다.
그해 7월 김 총장과 오 부총장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또 12월 대구고법 형사2부는 두 사람에 대한 항소심 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각각 벌금 2000만 원과 1000만 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1997년도 회계전출 및 불법 기채 등의 혐의는 유죄가 인정되지만, 98년도 회계전출 부분 등은 무죄”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감방장이 제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반가워 학교로 오라고 했죠. 그는 자기 집에 같이 가줄 수 있느냐고 하더군요. 그 집에 가서 감동을 받았어요. 잘 차린 상을 앞에 두고 중학교 1학년 학생인 감방장의 어린 딸이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고요. 아버지에게 교회에 같이 나가자고 했는데 말 안 듣더니 결국 죄 짓고 교도소에 갔다는 거예요. 감방장은 출소 후 제가 써준 주기도문을 가지고 교회에 나가고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자꾸 눈물이 나는데 이유를 모르겠대요. 전 ‘당신은 축복받은 형제’라고 말해줬어요. 전 감옥에 가기 전엔 세상의 밝은 면만 봤는데 감옥에 감으로써 어두운 면도 체험했어요. 아주 값진 경험이에요.”
김 총장은 한동대를 통해 탁월한 실력과 인성을 함께 갖춘 균형 잡힌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교육 중심’ 대학의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그동안 국내 대학들은 정부의 지원과 다른 대학과의 경쟁 탓에 천편일률적으로 ‘연구 중심’의 ‘대형 대학’을 지향해왔지만, 김 총장은 생각이 다르다. 그는 “결국 답은 사람과 교육에 있다”며 “이것이 한동대의 성공 키워드”라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학생들에게 특히 당부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고 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꿈은 보이지 않는 현실이에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아끼고, 고난을 만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도전하는 거예요. 결국 꿈은 자기 희생을 통해 이루어져요. 자기 희생이란 내 욕심을 챙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손해도 보다 보면 결과적으로 그 경험이 꿈을 이루는 중요한 계기가 돼요. 자기가 잘 되는 것으로 모든 게 됐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자기가 잘 됨으로써 다른 사람도 잘 되는 길을 찾으세요.”
김 총장과의 인터뷰는 3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긴 여운을 남긴 각별한 인터뷰였다.
“대학서 21세기 국제적 인재 육성해야” 교육 중심 대학을 강조하는 이유는. 한동대에 제3세계 학생이 많은 이유는. 한동대는 국제화 교육에도 공을 들이는데 이는 새정부의 교육정책과 맞닿아 있다. 정부에 바라는 점은. ●약력 1964년 서울대 금속공학과 졸업 1969년 미국 미주리대 캔자스시티교대학원 1972년 미국 뉴욕 RPI공대 재료공학 박사 취득 1974년 NASA 연구원 1978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재료공학과 교수 1994~ 현재 한동대 총장 |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