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소비자원에 빗맞아도 ‘기업은 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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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20주년 빛과 그림자, 소비자 권익 향상됐지만 부당한 피해 제품 간혹 발생

소비자의 피해를 상담해주고 있는 소비자원의 상담센터. <소비자원 제공>

소비자의 피해를 상담해주고 있는 소비자원의 상담센터. <소비자원 제공>

“아무런 법적 규제가 없는 상태에서 한국소비자원이 그런 결과를 발표하면 어떻게 합니까!”
인조점토를 생산하는 중소기업 부장의 항변이다. 2006년 12월 한국소비자원(2007년 3월 한국소비자보호원에서 한국소비자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하 소비자원)은 ‘인조점토의 유해물질 모니터링’이라는 자료를 내놓았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조점토에서 인체에 유해한 프탈레이트계 가소제가 검출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자료는 지난 2월 언론에 배포됐다. 해당 업체의 제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고, 업체는 제품을 회수해야 했다.

ㅌ교재의 이모 부장은 “업체 관계자가 소비자원에 가서 회의를 한 후에 논프탈레이트계로 바꾸기로 하고 일단락된 줄 알았는데 기사가 나와버렸다”면서 “당시에도 프탈레이트계 가소제를 사용한 제품은 전체 제품의 1% 정도밖에 없었다”고 항변한다. 또한 “프탈레이트계 가소제는 인조점토뿐만 아니라 장판이나 전선에도 사용한다”면서 “우리보다 프탈레이트계 가소제를 더 많이 쓰는 제약회사, 화학회사 등은 쏙 빠지고 우리만 표적이 됐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업계가 억울해하는 다른 이유는 당시에는 프탈레이트계 가소제 사용에 대한 법적인 규제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규제도 없는 상태에서 소비자원의 발표 하나로 기업은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강력해진 소비자원의 힘을 알 수 있는 사례다.

지난 7월 1일 한국소비자원(원장 이승신)이 개원 20주년을 맞이했다. 1987년 정부가 소비자 권익 향상을 위해 소비자보호원을 설립한 후 20년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소비자원은 ‘각종 제도와 정책 연구 및 건의’ ‘안전 정보의 수집 및 평가’ ‘상품시험 검사’ ‘교육 및 연수’ ‘출판 및 정보제공’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설립 첫 해에 접수한 소비자 상담건수가 8000여 건이었는데, 2006년에는 30만9000여 건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피해구제 사건의 약 75%가 소비자원의 중재로 원만하게 합의됐다. 자동차 리콜 제도를 도입하는 데 일조한 것도 소비자원이다.

대기업과 몇 차례 소송에 휘말려

소비자원은 소비자에게 가장 친근한 기관이 됐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무척 부담스러운 기관이다. 특히 소비자원의 중요한 역할인 제품 테스트 및 결과 발표는 기업에서 항상 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이다. 언론사는 소비자원의 발표를 받아서 기사를 쓰고, 그 기사는 바로 여론이 되기 때문이다. 제품에 대해 좋지 않은 여론이 생기면 기업의 이미지와 매출에 큰 타격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소비자원과 기업 사이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긴장의 끈이 존재한다.

서초구 염곡동에 있는 소비자원의 전경. <소비자원 제공>

서초구 염곡동에 있는 소비자원의 전경. <소비자원 제공>

소비자원은 대기업과 몇 차례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GMO(유전자재조합식품) 두부 소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풀무원과 소비자원과 106억 원 소송이 대표적이다. 3년 6개월의 긴 소송 끝에 풀무원 측이 소송을 취하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리고 1992년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킨 메탄올 파동(일명 징코민 파동) 역시 소비자원을 뉴스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국내 관련법 가운데 약품에 잔류하는 메탄올의 허용기준치를 명시한 조항이 없었다는 문제 제기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한 제약회사는 3개월간 영업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삼성전자도 소비자원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2005년 소비자원은 은나노세탁기의 효능에 대해서 과장광고를 하고 있다고 발표한 후 공정거래위원회에 시정조치를 요구했다. 하지만 1년 후 공정위의 광고심의위원회에서 혐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삼성전자 백수하 차장은 “은나노세탁기의 과장광고에 대해 혐의가 없다는 것을 발표하는 것은 공정위의 소관이기 때문에 우리가 요구할 수 없다”면서 “결과가 발표되면 명예는 회복하겠지만, 그동안 받은 피해는 복구가 안 되는 것이 기업의 어려움이다”라고 밝힌다. 소비자원이 소비자를 위해서 제품을 조사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기업은 아무런 항변도 못 하고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원 홍보실 담당자는 “제품의 검사와 결과 발표는 소비자원의 임의대로 하지 않는다”면서 “조사는 원칙에 따라서 시행한다”고 답변한다. 제품조사는 소비자의 민원이 많거나, 신기술을 사용한 제품 중 소비자 민원이 감지되면 실시한다. 소비자원이 녹즙기에서 쇳가루가 나오고, 스팀 청소기를 사용할 때 화상을 입을 우려가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 이유다. 또한 담당자는 “소비자원은 정부의 예산으로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에, 소비자의 안전과 관련된 기업이나 제품은 즉각 발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소비자원 역시 부당한 피해를 보는 기업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몇 차례의 소송 경험을 통해, 소비자원은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기업과 간담회 자리를 마련한다. 소비자원의 시험 결과 중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기업의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절차인 셈이다. 하지만 소비자원의 결과가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소비자원은 “소비자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며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간담회 자리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셈이다.

서울지역 치중, 지방엔 문턱 높아

소비자원에는 250여 명의 인력이 근무하는데, 상담 및 피해 구제 파트에서는 100여 명이 일하고 있다. 즉 시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인력이 많이 부족한 셈이다. 특히 상담을 하는 인원이 22명밖에 되지 않는다. 상담을 위해 전화를 하면 계속 통화 중이고, 상담원이 불친절하다는 것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처음으로 공모제를 통해 선출된 이승신 원장은 “연간 예산규모가 225억 원 수준이다”면서 “2004년 부임 당시 예산이 150억 원 정도였으니까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지방에 거주하는 소비자에게 소비자원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서울지역 소비자의 상담 비율이 8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여전히 지방 소비자는 소외되어 있다. 물론 지방자치단체도 소비자의 피해 구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소비자원처럼 체계화된 시스템을 갖춘 곳은 드물다. 소비자원 역시 이런 문제를 알고 있지만, 예산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녹색소비자연대 이덕승 상임위원장은 “소비자원의 문제는 백화점식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면서 “소비자원의 규모는 커지는데 하는 일은 그대로 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지난 20년간 소비자원은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 기관 중에서 청렴도가 높은 기관으로 선정될 정도로, 지금까지 부정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소비자원의 자랑으로 꼽힌다. 하지만 소비자원의 힘이 강력해지면서 의도하지 않은 기업의 피해도 늘고 있다. 그리고 소비자와 가까워야 할 소비자원이지만, 예산과 인력의 부족으로 불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소비자와 기업에 모두 도움이 되는 기관으로 우뚝 설 것이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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