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국가보안법 잊을 만하면 또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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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중에 10명 구속… 인권단체 “보안기관서 실적용으로 만들어낸다”

지난 4월 19일 비무장지대와 미군기지 인근에서 사진작업을 해왔던 사진작가 이시우씨(40)가 서울 옥인동 대공분실 형사들에게 연행됐다. 이어 22일 서울지방법원은 국가보안법 제5조(반국가단체 자진 지원 등)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이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이 내세운 구속 사유는 이씨가 ‘미군에 의한 한반도 전쟁방지 활동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국군 및 주한 미군부대의 현황 등을 계획적으로 관찰하여, 북한 등 반국가단체가 알아볼 수 있게 인터넷에 공개했다’는 것이다.

이씨의 변호인들은 “이씨가 촬영한 강화도 고려산의 미군 통신시설 등 미군부대는 이미 언론보도 등을 통해 공개된 것이라 기밀성이 없는 창작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군사시설보호법 위반혐의 역시 촬영 당시 부대장·정훈장교의 허락을 받고 진행한 작업으로 이에 대해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고려산’이라는 이름만 입력해도 이씨의 작품보다 더 적나라한 장면들이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현재 판매 중인 서적도 이적표현물

국가보안법상 기밀유출을 목적으로 한다는 혐의가 적용된 이시우 작가의 작품사진.

국가보안법상 기밀유출을 목적으로 한다는 혐의가 적용된 이시우 작가의 작품사진.

이시우씨는 비무장지대와 대인지뢰에 관한 한국 최고의 민간전문가이자 평화운동가이며 사진예술가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의 사진과 명상이 담긴 책 ‘민통선 평화기행’은 한국을 대표하는 100권의 책에 선정,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출품됐고, 이씨는 지난 6월 8일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인권위원회로부터 박종철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구속 직후부터 “국가보안법을 끌어안고 죽겠다”며 단식을 시작한 이씨는 6월 6일에서야 48일간의 단식을 끊고 현재 회복 중이다.

지난 5월 3일에는 경기도경이 인터넷 서점 미르북 대표 김명수씨를 국가보안법 7조 1항, 5항(이적표현물 취득·소지·판매죄) 위반이라며 연행해 구속했다가 15일 구속적부심에서 불구속으로 석방했다. 경찰 당국은 2003년 10월부터 2007년 4월까지 미르북에서 책을 구입한 사람 60명의 이름, 주소, 주문 도서명, 주문도서 권수 등 자세한 인적사항을 구속영장 별지로 첨부해 놓고 구입한 사람들도 처벌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상태다.

문제는 경찰이 “북한 체제를 찬양·고무”하고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선전”하는 책으로 부각한 ‘꽃 파는 처녀’ ‘민중의 바다(피바다)’ 모두 북한의 대표적 가극이자 영화여서 북한 당국이 북한을 방문한 남한 정부 관료들에게도 자주 보여준 것으로, 국회도서관에서도 소장하여 누구나 볼 수 있는 책이라는 점. 또 경찰이 ‘이적표현물’이라고 제시한 172권을 보면 ‘공산당 선언’ ‘자본론’과 같은 세계적 베스트셀러는 물론,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해방전후사의 인식’ ‘철학에세이’ ‘경제사 학습’ 등 1980년대 이후 사회과학 입문서로 인기리에 소개되거나 대중적으로 널리 읽힌 책이 다수 포함돼 있다. 지금도 교보문고 등 대형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서적들이다.

네이버에선 ‘강화도 고려산’ 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해 찾아낸 고려산 미군기지 사진들. 이 사진들은 대부분 강화도를 방문한 등산객들과 고려산 진달래축제 관람객들이 찍어 개인 블로그에 올린 것이다.

네이버에선 ‘강화도 고려산’ 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해 찾아낸 고려산 미군기지 사진들. 이 사진들은 대부분 강화도를 방문한 등산객들과 고려산 진달래축제 관람객들이 찍어 개인 블로그에 올린 것이다.

최근 국가보안법의 망령이 다시 출현하고 있다. 지난 6월 11일 2005년 경기남부총련 의장이었던 경기대 최승회씨가 국가보안법 위반(한총련 대의원. 이적단체 활동) 혐의로 체포됐고, 8년간 수배생활 끝에 지난해 공소시효가 만료된 이무진씨(36)가 다시 경찰에 연행됐다. 6월 18일에는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박준의씨(건대 92)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보안수사대에 연행되자 이른바 ‘학생운동 배후조직’ 사건이 터지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일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의 한용진 사무총장은 “조직표를 그려놓고 이른바 ‘한총련 배후조직사건’을 만들고 있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고 말했다. 경찰 보안수사대 측에서는 약 10여 명을 대상으로 수사를 펼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올해 들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람은 6월 말 현재 모두 10명. 2003년에는 78명, 2004년에는 38명, 2005년에는 13명으로 줄어들던 국가보안법 관련 구속자 수는 2006년 16명으로 다시 늘어났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10명에 이른다.

보안수사대 예산 삭감 압력 면피용?

이에 대해 인권운동사랑방의 박래군 상임활동가는 “최근 늘어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들은 대부분 공안기관들이 실적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6월 7일 한국진보연대(준)와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가 공동 주최한 토론회에서 박씨는 “경찰 보안수사대의 경우 매년 정기국회 때 예산·인원 축소 압박이 들어와 존재 이유를 증명할 필요가 있다”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보수세력의 입지 강화를 시도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측의 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118명 중 정기국회를 앞둔 7~10월 4개월간 구속된 사람이 절반에 가까운 54명에 달했다.

현재 국가보안법을 바탕으로 수사를 펼치고 있는 곳은 경찰청 보안수사대와 국정원, 기무사 등 3곳. 특히 각 지방경찰청에 소속된 전국 35개의 보안수사대는 국가보안법 사건을 집중적으로 ‘만들어내는’ 기구라는 게 이들 단체의 주장이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경찰청 보안수사대는 소속 인원 2232명, 1년 예산집행액은 인건비를 제외하고 277억 원(2005년)가량이다. 경찰에서도 2005년 보안 분실과 외근 보안수사 인력을 줄이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과잉 공급’ 상태로, 이 가운데 57%인 20곳에서 2년 동안 보안사범을 한 명도 검거하지 못했다.

박씨는 공안부서들이 담당하는 사건의 88.6%가 노동관계법 위반으로 대부분 고용주의 임금체불 사건”이라며 “보안수사대의 역할이 2007년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미미한지’ 짐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용진 사무총장은 “대선에서 국가보안법을 이슈화해 이의 철폐에 대한 후보들의 동의를 이끌어낼 것”이라며 이와 함께 “보안수사대를 비롯해 국가정보원, 검찰 공안부와 같은 공안기관을 적극적이고 집중적으로 감시해 그 실체를 드러내고 문제를 제기하는 작업을 펼쳐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관별로 과거에 저질렀던 범죄백서를 작성하고, 이를 통해 과거부터 인권유린을 자행해온 기관들이 이름만 바꾼 채 여전히 존속하고 있음을 폭로한다는 계획이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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