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택시기사 허세욱씨 인생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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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의 분신을 생각 못했나… 혼자 살면서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

지난 4월4일 수술실로 향하는 허세욱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보였다. <최영진 기자>

지난 4월4일 수술실로 향하는 허세욱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보였다. <최영진 기자>

“토론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 평택기지 이전, 한·미FTA에 대해 토론한 적 없다. 숭고한 민중을 우롱하지 마라. 실제로 4대 선별조건, 투자자 정부제소건, 비위반제소건을 합의해주고 의제에도 없는 쌀을 연막전술 펴서 쇠고기 수입하지 마라. 언론을 오도하고 국민을 우롱하지 마라.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은 싫다. 나는 내 자신을 버린 적이 없다. 저 멀리 가서도 묵묵히 꾸준히 민주노총과 같이 일하고 싶다.”(허세욱씨의 유서 중에서)

지난 4월1일 하얏트호텔 안팎은 부산했다. 호텔 안에서는 한·미 FTA 협상단이 막바지 타결을 위해 밀고 당기는 진통을 겪고 있었고, 밖에서는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의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다. 오후 3시50분 즈음 범국본이 협상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을 때, 전경 한 무리가 호텔 앞쪽의 골목길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한 50대 남성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전경들이 곧바로 달려들어 휴대용 소화기로 진화했지만, 그의 몸은 심한 화상을 입은 후였다. 반FTA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기도한 한독택시노조 조합원 허세욱씨(54)였다.

빈민촌 철거 보면서 ‘사회’ 깨달아

허씨는 바로 중앙대 용산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았고, 화상전문병원인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다.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전체 몸의 63%가 화상을 입었고, 그중 51%는 3도 화상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담당의사는 이 정도 화상이면 사망률이 70~80%나 된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본 허씨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의 온몸은 하얀 붕대로 칭칭 감겨 있고, 인공호흡기의 도움으로 간신히 숨을 쉴 뿐이었다. 붕대로 감지 못한 목과 얼굴 부분을 살짝 쳐다봐도 절로 눈이 감길 정도로, 화상 피해는 참혹했다. 피부는 원래색을 모두 잃어버리고, 진물로 얼룩졌다. 그리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어야만 했다. 그는 지난 4월4일 1차 수술을 받았다.

허세욱시가 쓴 유서.

허세욱시가 쓴 유서.

민주노동당, 참여연대 등이 참여하고 있는 ‘허세욱분신대책특별위원회’(이하 대책위) 측은 “가족의 동의와 대책위원회의 각서와 서명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면서 “피부 이식수술 결과는 좋은 편이며, 기관지와 폐 등 장기 상태도 대체로 괜찮다”고 설명했다. 허씨의 손과 등 부분에 나타난 괴사된 피부를 벗겨내는 수술과 함께 사체피부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집도한 한강성심병원 화상센터 김종현 소장은 “이식할 피부가 모자라 수술을 완전히 하지 못한 상태다”면서 “1주일 정도 경과를 지켜본 뒤 재수술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라고 소견을 전했다.

이번에 필요한 수술비는 약 2천만 원 정도이지만, 앞으로 치료에 필요한 비용은 약 2억 원 정도라고 대책위는 예상한다. 대책위는 허씨의 수술비와 치료비 마련을 위한 기금마련운동에 들어갔다.

허씨의 분신기도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택시기사가 왜 FTA 때문에 분신을 했나?”라는 의문을 가졌다. FTA 타결 협상안에는 택시와 관련된 사항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조차 허씨의 소식을 뉴스로 알게 될 정도로, 그의 분신자살 기도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한독택시노조 황규금 위원장은 “분신하기 전날 만나서 40분 정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그때도 분신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면서 “전화로 분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눈앞이 깜깜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한다. 또 황 위원장은 “2005년 인천에서 택시노조원이 분신자살을 했던 적이 있다. 그곳을 다녀왔을 때 허세욱씨는 ‘죽지 말고 살아서 싸워야 한다’라고 말했다”면서 “아무래도 FTA가 체결되면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한다.

허씨는 FTA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일 2교대의 빡빡한 일정에도 잠을 줄여가면서 촛불집회나 1인 시위 등에 참여해왔다. 그는 한독택시노조 관계자에게 “우선은 FTA 저지 운동에 열심히 참여해야 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면서 시위에 참여할 정도였다. FTA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FTA 타결이 사회에 끼칠 영향에 대해 극히 비관적이었던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후 가족 왕래도 뜸해

그는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어렸을 때 서울에 혼자 올라온 것으로 알려졌다. 허씨는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가파른 경사를 올라가야만 하는 4가구가 모여 있는 다세대주택의 지하 단칸방에 살았다. 주인을 잃은 방문은 잠긴 상태였다.

지난 3월 신림역에서 한·미FTA 저지를 위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허세욱씨의 모습.

지난 3월 신림역에서 한·미FTA 저지를 위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허세욱씨의 모습.

동네에서 만난 한 주민은 “뉴스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면서 “동네에서 그렇게 교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고 전한다. 지인에 의하면 “변변한 살림살이도 없었다. 비키니 옷장 하나와 앉은뱅이 책상이 덩그러니 있는 소박한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황규금 위원장은 “허세욱씨는 가족이나 사생활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면서 “그가 서울에 아주 어렸을 때 올라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고 말한다. 서울에 올라온 후에는 가족들과 왕래도 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렵게 허씨의 동생과 통화를 했지만 “우리는 일이 터진 후에야 형님이 그런 분이란 것을 알았다.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다”면서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는 서울에 올라온 후 주로 빈민촌에서 살았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데 바쁜 생활을 하느라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철거반원과 대항해 빈민운동을 하는 여자 간사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허씨는 참여연대와 나눈 인터뷰에서 “1995년 봉천6동 철거촌에 살 때였다. 그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 때였다”면서 “그런데 빈민운동을 하던 여자 간사가 용역깡패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냥 구경만 했다. 그 뒤 많은 걸 깨달았다”라고 사회참여의 계기를 밝혔다.

철거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효순이·미선이 촛불집회, 매향리 운동, 평택대추리 반전평화운동 등에 참여했다. 그리고 노조원들과 함께 관악구에 있는 시설에 ‘사랑의 김장 나누기’ ‘소년·소녀 가장 돕기’ 등의 봉사활동을 해왔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삶을 살았던 것이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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