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인 대신한 동남아 여인의 삶… ‘아메리칸 드림’ 허상 버리고 ‘돈벌어 귀향’ 소망
동두천 기지촌에는 한국 여성들을 거의 볼 수 없다. 그 빈 자리는 대부분 동남아 여성들이 메웠다. 1988년 올림픽 이후 한국 여성들의 ‘몸값’이 오르면서 생긴 현상이다. 한때 조선족 여인들, 러시안 걸들이 상당 수 유입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필리피노’가 대부분이다. 요즘 페루비안(페루인)들이 부쩍 늘고 있는 것도 두드러진 변화다. 값싼 노동력을 찾는 자본의 논리가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동두촌 기지촌의 어지러운 성문화는 이제 과거사가 됐다. 한때 공식 통계로만 6000명에 달하던 이곳 기지촌 여성들의 숫자는 500명으로 줄었다. 대부분 외국인이고 철저하게 미군들만 상대하기 때문에 동두천의 상징으로 ‘기지촌 여인’들을 연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성병을 예방하기 위한 시 당국의 관리도 철저하다.
한 달 200만원 벌어 80만원 저축
기지촌 여성들이 줄어든 이유는 9·11테러, 여중생 사망 사건 이후 미군의 자체 통제가 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두천 제2사단의 여군 비율이 40% 정도로 늘었기 때문이라는 ‘이색적인’ 분석도 있다. 군 내부 커플이 증가해 상대적으로 성의 소비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지촌 미군 클럽에서 일하는 외국인 여성들의 삶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열악하다. 동두촌 보산동에서 만난 필리피노 제이미(19)는 고국에 세 살 난 아들을 하나 둔 어머니다. 필리핀의 조혼 풍습 때문에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여성이 이곳엔 많다. 제이미는 “2만 달러를 벌어 고국에 돌아가 아들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이제 2년 정도만 고생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 “절대 임신하지 않고, 미국 병사에게 사사로운 정을 주지 않는 것”이 그녀의 철칙이다. 왜냐하면 고향에 그를 기다리는 아들과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미군 병사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들을 배신하는 행위로 생각한다. 미군 병사와 결혼해 ‘아메리칸 드림’을 소망했던 과거 한국 여성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곳 클럽에는 1명의 매니저가 10명 정도의 여성들을 관리한다. 한 달 기본급은 40만 원. 그 다음부터는 그들의 능력에 달렸다. 가능한 한 비싼 술을 많이 팔아야 하고 자신을 원하는 병사들과 외박을 나가는 경우도 물론 있다. 한 달 수입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제이미의 경우 200만 원 정도가 평균이다. 아끼고 아껴 이제는 매달 70만~80만 원을 저축한다.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면 한이 없다. 그런 생각은 단칼에 끊어버려야 고향에 가는 길을 단축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고귀하게만 살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철학이 됐다. “고귀한 자는 고귀하고 비루한 자는 비루하다, 그래서?(Noble is noble, humble is humble. So what?)”라고 그녀는 반문한다. 많은 경우 고귀한 자들은 비루한 자들의 피와 땀으로 살아간다.
인간 각성 종용하는 ‘하나의 성지’
과거 동두천의 한국 여성들은 위대한 일을 해냈다. 그들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렸다. 오직 자신의 몸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형제 자매를 가르쳤다. 1967년 보산동 26개 미군 전용 클럽이 벌어들인 돈은 40만 달러였고 그해 우리나라의 수출 총액은 4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과거 동두촌 경제의 활황도 사실은 그들에게 빚진 측면이 많다. 그들이 먹고 입고 마셨던 소비의 총량이 이곳 경제를 지탱했다.
이곳 보산동의 페루 여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기 아이를 데려 온다. 아이를 고향에 두고 오는 필리핀 여성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들 역시 미군과의 사랑을 통한 ‘아메리칸 드림’보다 아이를 키우고 돈을 모으는 데 더 열성이다. 이런 여인들을 경멸하고 욕하려면 굉장한 근면과 양심이 필요한데 그런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보산동에서 ‘다비타 공동체’를 운영하는 전우섭 목사(47)는 그런 역설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밍크 코트를 두른 귀부인과 기지촌 여성들이 전혀 다르지 않다.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한 인간’일 뿐이다.
“왜 우리가 이런 더러운 자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 더러움을 우리 모두가 만들었기 때문이오.”
기지촌의 홍등은 우리가 합작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은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고 자본의 농간이기도 하며, 무력을 키우기 위해 젊은이들을 한데 모아 닦달하는 어리석음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 세계의 실상이라면 그 실상에 대해 책임 없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그는 묻는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느끼는 착잡함은 이런 종교적 인식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을 찾기까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일상적 진리 앞에 전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희생을 치르는 자에게 휴식을 권하자고 주장한다.
“성매매여성은 그 사회가 낳은 희생자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니 한번 사창가에 발을 들여놓으면 평생 빠져나갈 수 없다. 술과 마약, 포주의 폭행으로 심신이 붕괴된 여성이 재활할 수 있는 쉼터를 만들어야 한다.”
성매매는 하루 아침에 근절할 수 없다. 한 지역을 단속하면 다른 지역으로 흘러간다. 한강 이북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한강 이남 주둔지 인근에서 성매매가 늘어나게 돼 있다. 그가 전국 단위의 쉼터운동을 조직하고 있는 것도 성매매 근절이 법률적 강제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기지촌의 여성들의 존재는 많은 이들에게 도덕적, 정치적 각성의 기회를 부여해왔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혼혈아 문제, AIDS 문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 유린의 문제, 주한미군 주둔의 정당성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제기되곤 했다. 동두천은 그런 의미에서 기지촌이 아니라 인간의 각성을 종용하는 하나의 성지로 기억될지 모른다.
동두천/글·사진 한기홍 〈객원기자〉 glutton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