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전 이 지면을 통해 오래된 궁금증 하나를 공유한 적이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왜 사람이 죽고 난 뒤부터 일을 하기 시작하는가’라는 의문이었다. 누군가 죽기 전에 많은 이가 죽을 듯이 괴로워도 정치권은 웬만해선 움직이지 않았고, 2022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전세사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5명이 사망한 뒤인 2023년 5월 25일 전세사기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당시 이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정부와 여야 정당이 합의한 사항이 6개월마다 보완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보통 법을 만들 때 ‘보완’을 명시적으로 약속하는 경우는 드물다. 방금 만들어진 법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세사기 특별법은 처음부터 ‘보완’을 약속했다. 당시 쟁점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일단 빨리 시행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거주하는 주택이 경매와 공매로 넘어가면서 길거리로 쫓겨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경·공매 유예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 문제의 공론화 역시 죽음에서 비롯됐다. 2023년 2월 21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한 청년이 “미추홀구에서 집이 경·공매로 넘어가면서 피해 세입자들이 거리로 쫓겨나고 있습니다. 정부가 당장 경·공매를 중단시키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고, 당시 정부 측 토론자는 “현행 제도로는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난 2월 28일 이 질문을 한 청년은 ‘정부 대책이 실망스럽고,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망했다. 이후에 윤석열 대통령이 4월 18일 ‘피해자 거주 중인 주택의 경매 중단’을 언급했고, 국회에서도 역사상 최초로 ‘경·공매 유예’가 담긴 법률인 전세사기 특별법이 제정됐다.
처음부터 보완을 약속한 특이한 입법
전세사기 특별법은 처음부터 미진한 법률이란 비판을 받았다. 한 달 동안 진행된 특별법 논의가 국회에서 더디게 진행됐음에도 쟁점들이 충분히 정리되지 못했다. 법 통과 막판까지 ① 피해자 범위 ②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의 공공 매입 여부 ③ 최우선변제금 보전 방안 등 세 가지 쟁점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정부와 여야의 합의는 ① 피해자 범위를 좁히고 ② 보증금 반환 채권의 공공 매입은 하지 않고 ③ 최우선변제금도 보전하지 않는 대신에 피해자가 ④ 새로 전세를 얻을 경우 최우선변제금만큼 무이자 대출을 지원한다였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피해자의 요구가 거의 반영되지 않은 합의안이었고, 그나마 타협된 안이 현실에서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도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여야는 처음부터 6개월마다 점검과 보완을 약속한 것이다.
물론 법에 ‘보완’을 명시하진 않았다. 하지만 당시 특별법 제정 직후에 여야는 보완을 분명히 언급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전세사기특별위원장인 맹성규 의원은 “(국토부로부터) 6개월마다 추가 보완 사항을 보고받기로 했다”고 했고,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였던 박광온 의원은 “법 제정 과정에서 다루지 못했거나 추가로 드러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민주당이 책임지고 보완입법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여당 쪽 간사인 김정재 국민의힘 의원은 “(법안 통과 이후) 저희가 수정해야 하는 사항이 발생하면 얼마든지 개정할 수 있다. 6개월마다 1번씩 (국토부가 보완 사항을) 보고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특별법은 5월 25일에 제정됐고, 6월 1일부터 시행됐다. 약속한 6개월이 다가오지만, 정부는 아직 국회에 특별법 보완 사항 보고를 하지 않았다. 예정된 일정도 알려진 바 없다. 약속은 온데간데없는 상황이다.
야당 의원들은 개정 법안을 발의했다. 맹성규·김병욱·장철민·김경만·허종식 더불어민주당 의원,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각각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대부분 피해자 범위를 넓히는 내용이 담겼고, 일부는 선구제 후회수 방안인 보증금 반환채권의 공공매입, 최우선변제금을 못 받는 피해자에 대한 지원 대책 등도 담았다.
문제는 정부와 여당이다. 올 4월 전세사기 피해에 대한 정부의 지원 여부에 대해 “주가조작·보이스피싱도 전례 없다”며 반대했던 원희룡 장관의 국토교통부는 전세사기 특별법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에도 10월 5일 저리 대환대출 요건 완화 정도의 미온적인 보완책을 내놓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여당은 혁신위 출범, 김포시 서울 편입 등 정치적 의제들을 요란하게 띄우곤 있지만, 부산과 대전에서 새로운 전세사기 사건이 표면화되는데도 불구하고 특별법 개정을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한국도시연구소의 충격적인 실태조사 결과
특별법이 이미 충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개정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문제는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이례적인 일인데, 이 정도의 사회 문제가 불거지면 정부가 나서서 실태조사를 하든가, 혹은 국회가 특별법을 제정할 때 실태조사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 특별법엔 제13조로 ‘전세사기 피해자로 판정하기 위한 조사’ 정도가 명시됐을 뿐이다. 그나마 국토부가 10월 5일 미진한 보완 대책을 발표하면서 공개한 자료를 통해 그동안 피해자들이 몇 명이나 지원을 신청했고, 이중 몇 건이나 피해자로 인정됐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피해자의 지원 신청 건수는 총 7092건이고, 이중 피해자로 인정받은 건(가결)은 6063건, 인정받지 못한 건(부결과 적용 제외)은 총 1029건이다.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예상했던 대로 피해자의 범위가 협소하게 규정됐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지원받은 건수의 세부 통계를 따져보면 특별법의 효력은 심각할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다. 경·공매 유예나 정지가 적용된 건은 709건이었고, 특별법의 핵심이라고 했던 대환대출 지원 건수는 불과 391건에 불과했다. 또 다른 핵심 대책이었던 우선매수권을 부여받은 이는 38명뿐이다. 우선매수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지원한 대출 중에 올 한 해 가계부채의 주범으로 꼽힌 특례보금자리론도 있는데 불과 12건 33억8000만원의 대출이 집행됐다. 올 한 해 특례보금자리론의 대출 규모가 41조7000억원에 달하는 것에 비춰보면, 고소득층에게도 퍼줬던 저리 대출이 전세사기 피해자에게는 인색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정부가 하지 않은 실태조사와 보완 대책 마련에 나선 이는 민간 싱크탱크인 한국도시연구소다. 한국도시연구소는 11월 7일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 가구 실태조사 및 피해 보상과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 연구보고서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총 8명의 한국도시연구소 자체 연구진, 2명의 외부 연구진(이강훈 변호사·임재만 세종대 교수)이 연구에 참여했다. 주거권네트워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공동 기획했으며 한국도시연구소 후원 회원들의 회비로 수행한 연구임을 밝히고 있다. 한국도시연구소는 온라인조사, 전화조사, 대면면접조사를 병행해 1579가구를 설문조사했고, 조사 대상 가운데 1490가구의 등기부등본을 모두 열람해 조사 자료와 연계했다. 총 240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를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일독해보길 권한다.
이 글에서 일부만 소개하면 응답자의 42.8%만 정부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았고, 피해자 신청을 한 비율은 전체의 66.3%였다. 피해자 중엔 거주 주택에 이미 저당 잡힌 부채(선순위 근저당)가 있어 후순위 임차인인 경우가 1443가구 가운데 68.6%에 달했다. 이중 지역마다 일정 금액으로 정해진 ‘최우선변제금’조차 받지 못하는 대상이 전체의 48.6%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피해자의 절반 가까이가 전세 보증금 가운데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인 셈이다. 지역마다 피해 양상도 다르다. 서울·경기 지역의 조사 응답자 가운데 최우선변제금도 못 받는 비율은 19.9%였으나, 인천 34.0%, 대전 80.9%, 부산 74.4%에 달했다. 후순위 임차인에게 ‘선순위 저당권이 있는데도 왜 전세계약을 체결했는가’라는 질문에 ‘공인중개사 등 제3자의 설득·기망’을 87.6%가 답으로 꼽았다. 40.9%는 ‘선순위 근저당권이 설정되지 않은 집을 찾을 수 없어서’, 40.7%는 ‘정확한 매매가와 전세가 시세를 알 수 없어서’라고 답했다(복수 응답 가능).
6개월 전 이 연재(정책과 딜레마 (22) ‘전세사기 피해자의 최우선변제권 보장’)를 통해 최우선변제권의 법률과 시행령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후순위 임차인이 최우선변제금을 받는 기준(소액임차인 여부)이 임대차 계약 시점이 아닌, 선순위 근저당이 설정된 시점이어서 이번 전세사기 피해자의 다수가 보증금 전액을 잃는 것을 지적한 내용이었다. 풀어서 설명하면 최우선변제금을 받는 자격인 소액임차인의 기준이 한국의 부동산 시세 따라 지속적으로 바뀌었고, 자신의 계약 시점엔 법률상 최우선변제금을 받을 수 있는 소액임차인이었어도 주택 소유자가 담보 대출을 받은 시점의 소액임차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의미다. 이런 디테일한 법률 조항을 대다수 세입자는 물론 상당수의 법률가조차 알지 못했다. 지난 4월 17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30대 여성은 임대인의 요구로 2019년 7200만원이던 전세보증금을 2021년 9000만원으로 올려줬는데, 이 증액이 생사를 갈랐다. 임대인이 담보 대출을 받은 2017년에 소액임차인의 기준은 8000만원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임대인은 등록임대사업자였고, 법에 따라 보증보험 가입 의무와 5% 이내 임대료 인상 적용 대상이었는데도 이를 지키지 않았고, 피해는 온전히 임차인이 떠안았다. 법률과 시행령에 임차인의 권리가 명시되지 않았고, 불명확한 조항으로 여러 피해자를 양산한 문제가 분명히 있다.
필자가 속한 민간 싱크탱크 LAB2050은 해당 법률과 시행령의 유권해석을 법제처에 의뢰하고, 대안 입법과 정책을 마련하는 활동을 전개해나갈 예정이다.
<윤형중 LAB2050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