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탄소국경조정제 확대 전망 속 미국 청정경쟁법 추진
수출 위해 탄소중립 인프라 시급한데 정부는 원전에 집중
글로벌 ‘탄소장벽’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이 탄소세 부과에 시동을 걸었고, 미국에서도 관련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일각에선 기후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자국우선주의를 강화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탄소를 배출하는 수출기업들의 어려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재생에너지를 찾아 해외로 빠져나가는 기업이 늘 것이란 우려도 있다.
CBAM 적용 대상 확대 전망도
EU가 지난 10월 1일부터 시행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골자는 2026년 본격 시행에 앞서 대(對)EU 수출 품목의 탄소배출량 보고를 의무화하는 것이다. EU에 수출하려는 기업들은 철·철강, 시멘트, 전기, 비료, 알루미늄, 수소 등 6개 제품의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산출해 분기별로 EU에 보고해야 한다. 올해 10~12월 배출량을 내년 1월 보고하는 식이다. 보고서는 각 회원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EU 역내 수입업자가 제출한다. 보고서에는 수입 상품의 수량과 탄소배출량, 신고자 신원 등과 같은 기본 정보부터 제조설비와 상품의 세부 정보까지 담는다. 기한을 지키지 않거나 보고 규정을 지키지 않을 경우 1t당 10~50유로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2025년 말까지는 전환기(준비기간)다. 하지만 2026년 1월 제도 시행 이후에는 전년도에 수출한 상품의 탄소배출량에 상응하는 배출권(CBAM 인증서)을 구매해 제출해야 한다. 인증서 매입 가격은 EU 탄소배출권거래제(ETS)에 근거를 둔다. 한국은 자체 탄소배출거래제인 K-ETS를 시행 중인데, 이에 따라 지불한 탄소 가격이 있다면 일부 차감받는다. 예컨대 A업체 수출상품의 탄소배출량에 따라 CBAM 인증서 구매 가격이 1t당 10만원으로 매겨지고, 해당 업체가 국내 탄소배출거래제에 따라 1t당 7000원을 냈다고 가정했을 때 수입업자는 나머지 9만3000원을 추가 부담하는 방식이다. 이정아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2026년 본격 시행 전까지 CBAM 시행 규칙이 13차례 정도 추가 발표될 것으로 보여 인증서 구매 가격을 포함한 일부 규정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CBAM 적용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지난 9월 27일 발간한 <EU 탄소국경조정제 Q&A 북>에 따르면 EU는 유기화학품, 폴리머 등 탄소누출 위험이 있는 기타 제품으로 CBAM 적용 범위를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강준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EU는 향후 CBAM 적용 대상 산업을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로 확대하고 밸류체인(가치사슬)을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데, 이럴 경우 화석연료에 의한 전력으로 생산된 수출상품은 EU 시장에서 가격경쟁력 하락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탄소 무역장벽이 세워질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6월 미국 상원이 발의한 청정경쟁법(CCA)은 화석연료, 석유정제, 석유화학, 비료, 수소 등 12개 수입품목에 1t당 55달러의 탄소가격을 매기는 내용이 핵심이다. 정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은 탄소가격제도가 없다. CCA는 미국 내 해당 산업 평균보다 탄소배출량이 높은 수입품 등에 탄소비용을 부과하는 것이 골자인데, 탄소배출집약도(상품에 내재된 탄소배출량)가 상대적으로 낮은 미국 기업에 경쟁 우위를 제공하려는 측면이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나 CBAM에서 알 수 있듯, 주요국들이 기후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자국우선주의를 강화하고 자국 산업의 경쟁력 확보에 주력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추세가 예상외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CBAM의 경우도 대상 품목을 확대하는 식으로 무역장벽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가격 경쟁력 약화 등 우려
CBAM이 향후 본격 시행되면 수출기업의 비용 부담 증가는 불가피해진다. 한국무역협회가 지난 9월 26일 내놓은 ‘미리 보는 EU 탄소국경조정제도 시범 시행 기간 주요 내용 및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기준 한국의 대 EU 수출액 681억달러 중 CBAM 대상 품목의 수출액은 51억달러(7.5%)다. 이중 철강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89.3%(45억달러), 알루미늄이 10.6%(5억4000만달러)로 각각 집계됐다. 철강산업은 업종 특성상 제조·공정 과정에서 사용되는 석탄으로 인해 대규모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현지에 수입 관련 자회사 영업법인을 둘 여력이 없는 수출기업들은 기밀유출 피해가 우려된다. 정훈 연구위원은 “분기별로 수입업자에 탄소 배출 정보 등을 보고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탄소 배출 정보와 기반 시설 등과 같은 기밀을 노출해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관할 당국에 직접 신고하는 것이 그나마 위험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본격 시행 전까지 일부 규정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정훈 연구위원은 “EU 집행위의 CBAM 추진 과정을 보면, 2021년 7월 CBAM 초안이 나온 후 지난해 12월 집행위 합의가 있었고, 올 8월 17일에 CBAM 전환기간 동안 적용될 이행규칙이 채택됐다. 너무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제도를 만든 EU 집행위 인사들도 정책 이해도가 높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앞으로 규정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생에너지 공급원 확대가 해법”
수출기업의 우려를 줄이기 위한 근본적인 방안은 탄소 배출 최소화다. 국제적으로 확산하는 RE100과 같은 탄소중립 달성 인프라를 확대하는 일이 중요하다. RE100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태양광, 풍력, 수력, 지열 등 재생에너지로만 충당하겠다는 글로벌 운동이다. 그러나 한국의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은 주요국 중 최하위다. 통계청이 지난 3월 발표한 ‘한국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 이행현황 2023’을 보면, 한국의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은 3.4%(2019년 기준)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중 꼴찌로, 평균(23.42%)의 7분의 1 수준에 그친다.
원전 중심의 탄소중립 정책을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는 CF100의 국제표준화를 추진 중이다. 카본프리 100%의 줄임말인 CF100은 재생에너지를 포함,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원전, 수소 등 모든 에너지원을 의미한다. 에너지원에 원전이 포함된 것이 RE100과 가장 큰 차이다. 정부는 재생에너지만으로 전사업장에 100% 전력을 공급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국내 기업들이 비용 부담이 크다는 이유를 댄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월 20일(현지시간)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무탄소에너지의 국제 확산과 선진국과 개도국 간 기후 격차 해소를 위한 열린 국제 플랫폼으로 ‘CF(카본프리·무탄소) 연합’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CF100 도입 취지 왜곡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인형 (사)푸른아시아 전문위원은 “유엔(UN)과 구글이 주도하는 CF100은 ‘24시간 7일 내내 무탄소에너지 실시간 수급(24/7 CFE)’이 핵심이다. RE100은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지 못한 부분을 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로 조달하는 게 가능하지만, CF100은 연중무휴 무탄소에너지 사용을 원칙으로 한다. 사실상 온실가스 배출량이 ‘제로’라는 점에서 RE100보다 더 엄격하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기업 부담 가중을 이유로 이러한 원칙은 배제한 채 국제사회가 (RE100보다) 더 엄격한 적용의 대가로 끼워준 ‘원전’만 추가해 ‘한국형 CF100’이란 것을 만들고, 이를 국제표준화하겠다며 밀어붙이고 있다. 전형적인 아전인수식 해석”이라고 했다.
당장 기업들의 호응도가 낮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6월 6일 국내 매출 상위 500대 기업 중 응답한 102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82.4%가 ‘CF100 캠페인에 참여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전체의 68.6%는 CF100에 대해 ‘잘 모른다’고 답했다. CF100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엔 ‘아직 구체적인 기준이나 이행방안이 마련되지 않아 불확실성이 커서’(35%)라는 답이 가장 많았다.
수출기업 경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지적이 있다. 이인형 전문위원은 “원전을 통해 생산한 제품을 글로벌 기업과 해외 소비자들이 인정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글로벌 기업이나 주요국에 수출하는 국내 기업들이 결국엔 재생에너지를 찾아 해외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국제적 흐름에 맞춘 재생에너지 공급원 확대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