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제조사에 원인 규명 책임 부여” 법안 봇물
직장인 A씨는 최근 차량 블랙박스를 차량 앞과 뒤 그리고 가속페달 부분까지 세 곳을 녹화하는 3채널 제품으로 교체했다. 그는 “한 동영상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 장면을 본 뒤 이를 대비한 전용 3채널 제품이 있다고 해서 이왕 교체하는 김에 선택했다”고 말했다.
운전자들에게 급발진 사고는 ‘막연한 두려움’ 같은 존재다. 분명 의심되는 사고가 발생하는데도 아직 원인이 명확히 규명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그나마 해볼 수 있는 게 가속페달을 밟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출하는 일이다. A씨가 3채널 블랙박스를 선택한 이유다.
급발진 의심 사고는 국내에서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숱한 논란이 있던 사안이다. 논란의 고리를 끊기 위해 최근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서 급발진 원인 규명을 위한 다양한 법안과 정책 마련을 시도 중이다. 자동차업계는 그러나 급발진이 규명된 전례가 없다는 점을 들어 법안 등에 반대하고 있다.
사고 때만 반짝 관심, 정부는 미온적
한국교통안전공단 집계에서 급발진 의심 차량 신고 건수는 2010년부터 2022년까지 모두 766건이다. 정부가 “급발진 문제를 규명하겠다”며 민관합동조사단을 꾸려 활동한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사고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00건 이상 신고가 접수되기도 했다. 해당기간을 제외하면 매년 30~50건의 신고가 접수된다. 지난해엔 15건이 접수돼 역대 가장 낮은 신고 건수를 기록했다.
급발진 의심 사고는 제작사나 차종과 관계없이 발생해 특정 업체를 지목하는 건 의미가 없다. 휘발유, 경유 등 유종에 따른 차이도 보이지 않았다. 전기차 보급이 늘면서 전기차 급발진 의심 사고 역시 접수되고 있다. 다만 수동변속기 차량(7건)이 자동변속기(무단변속기 포함) 차량보다 절대적으로 의심 사고가 적다는 점은 통계로 확인된다.
766건 중 자동차의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 사고로 인정된 사례는 없다. 대부분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급가속하는 등의 조작 실수가 원인으로 제시됐다. 이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다 보니 급발진 의심 사고 영상 등이 널리 알려졌을 때만 잠시 관심이 쏟아졌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잊히는 일이 반복됐다. 최근 급발진 문제가 다시 주목받은 배경에도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사고가 있다.
국내에서 급발진 규명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진 때는 11년 전인 2012년이었다. 당시에도 용인에서 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의심 사고 영상이 공개된 것이 발단이다. 논란이 확산하자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는 민관합동조사단을 꾸려 주요 의심 사고에 대한 검증에 나섰다.
사고 규명은 차량에 장착된 사고기록장치(EDR)의 데이터를 해석해 원인을 찾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EDR 데이터가 불충분해 애초에 규명이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실제 조사단도 “차량 결함은 못 찾았다”고 결론 내렸다. 2013년에는 국민 공모를 통해 급발진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한 공개 실험도 했다. 이 역시 문제를 규명하진 못했다. 이후 정부는 급발진 문제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재도 의심 사고 접수 시 EDR 데이터 분석을 하는 수준에서 원인 규명을 시도하는 중이다.
20여년째 차량 결함 인정 사례 없어
지난 5월 23일 춘천지법에서 지난해 12월 발생한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변론기일이 열렸다. 원고 측은 “가속페달을 밟았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EDR 검사 결과를 사고 당시 엔진의 분당회전수(RPM) 자료 등을 들어 반박한 뒤 별도의 전문가 감정을 신청했다.
강릉 사고 사례처럼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운전자들이 가장 난감해하는 건 사고 원인을 직접 규명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2만개가 넘는 자동차 부품 속에서 일반 운전자가 원인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국과수나 자동차안전연구원 등을 통해 EDR 분석이 이뤄지긴 해도 늘 결과가 같다 보니 운전자 측에서 EDR 데이터 자체를 의심하는 등 전반적으로 신뢰도가 낮다.
이에 정치권에서는 사고의 원인 규명 책임을 해당 자동차업체에 두도록 하는 법안 마련을 추진 중이다.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자동차관리법 개정안, 소비자기본법 개정안 등 법안이 여러 개 국회에 발의돼 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내용은 비슷하다. 사고 발생 시 자동차제작자가 의무적으로 원인을 조사하고, 사고에 관한 입증자료를 제출하도록 하는 게 골자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는 “EDR에 기록되는 데이터를 보다 자세하게 고도화하고, 운전자 등이 직접 EDR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도록 분석기기를 자동차제조사가 판매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기아자동차의 경우 미국에선 규정에 따라 EDR 분석기를 일반 소비자에게도 판매한다. 가격은 700만원대 전후 수준이다. 국내에선 분석기기 판매 규정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일반 판매는 하지 않고 있다.
최영석 한라대 미래모빌리티공학과 겸임교수는 “국내 차량은 사고가 나도 EDR에 저장되는 시간이 충돌 전 단 5초뿐인데, 이는 미국 포드자동차의 25초에 비해 한참 짧은 수준”이라며 “사고 기록 저장시간을 늘리고, 데이터에 조향각 정보를 추가하는 등 데이터를 고도화해야 원인 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자동차업계가 법안 마련에 반대하고 있어 난항이 예상된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 관계자는 “아직 전 세계적으로 규명된 적 없는 급발진을 제조업체가 규명하라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가속페달 오조작 등을 방지하기 위한 급가속방지장치, 차선이탈경고장치 등 첨단 안전장치를 장착하도록 유도하거나, 정부 지원을 통해 사고를 예방하는 정책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