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금융안정계정이 진짜 무기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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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국회 정무위원회에서는 정부가 지난해 12월 21일에 제출한 예금자보호법 개정안 심의가 진행 중이다. 일부 독자들은 이 개정안의 주요 내용이 한동안 언론에 회자됐던 예금보험의 일인당 보호한도를 상향 조정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이 개정안에는 “금융안정계정의 설치”라는 매우 전문적이고 어려워 보이는 내용이 들어 있다.

예금보험공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예금보험공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금융안정 혹은 금융시스템의 안정은 금융감독과 통화정책의 중요한 목표다. 우리나라도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를 겪은 후 한국은행법 제1조에 제2항을 신설해 한국은행에 물가안정 외에 금융안정의 책무를 부여했다. 예금보험공사(예보) 역시 예금자보호법 제1조의 규정에 따라 금융 제도의 안정성 유지 책무를 부담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예보에 금융안정계정을 설치하자는 이번 개정안은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개정안은 금융시스템의 체제적 위기에 써먹을 수 없을 정도로 겉만 번지르르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금융위원회(금융위)의 감독 실패를 은폐하는 등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거나 관치금융을 조장할 가능성만 높일 뿐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정부의 제안 이유에 따르면 금융안정계정은 “금융시장이 급격하게 변해 다수 부보금융회사의 유동성이 경색되거나 자본 확충 등이 필요한 경우에” 사용해 “금융회사의 유동성 지원과 자본 확충”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기존 예보의 자금지원은 부실(우려) 금융기관에 한정되는데, 금융안정계정을 통한 자금지원은 “멀쩡한” 금융기관에 지원하는 것이며, 이때 “최소비용의 원칙”과 “공평한 손실분담의 원칙”도 적용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유동성이 경색되거나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고 인정되기만 하면 최소비용이 아니어도, 또 공평한 손실분담이 없이도 멀쩡한 금융기관에 돈을 넣어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추가로 금융기관들로부터 예금보험료를 걷는 것도 아니다. 예보채를 발행하거나 부실 발생에 대비해 쌓아놓은 예금보험기금에서 돈을 빼내 오겠다는 것이다. 흠. 그럼 정작 금융기관이 부실화되면 무슨 돈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인가?

금융위가 예보 돈 쌈짓돈처럼 쓰겠단 뜻

이처럼 원칙을 마구잡이로 허무는 의사결정 과정은 또 어떠한가? 별것이 없다. 예금보험위원회가 결정하고 사안에 따라 금융위가 승인한다. 예보가 금융위 통제하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 금융위가 예금보험 돈을 자기 맘대로 쌈짓돈처럼 쓰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미 금융위가 관장하는 유사한 제도가 있다.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제23조의2에 정책금융공사(현 산업은행)가 관장하는 ‘금융안정기금’이 있다. 조문도 사실상 똑같다. 그런데 왜 또 만들자는 것일까?

벌써 장난질의 악취가 심각하게 올라온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이 제도는 금융감독의 원리나 해외의 유사한 금융안정 장치 운용 사례와 너무 차이가 난다.

우선 금융감독의 원리부터 살펴보자. 금융회사 또는 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생길 때 개입할 수 있는 기구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보, 다른 하나는 한국은행 그리고 마지막은 기획재정부다. 기획재정부는 최후의 보루라고 일단 제외할 경우 예보와 한국은행 간의 역할 분담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때 교과서의 대원칙은 “지급불능 위기는 예금보험기구가 대처하고, 유동성 위기는 중앙은행이 대처”한다는 것이다. 지급불능 위기는 결국 당해 금융기관이 부실 금융기관이라는 뜻이므로 예금보험기구가 예금자를 보호하면서 해당 금융회사를 정리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고, 유동성 위기는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므로 중앙은행이 해당 금융기관의 자산을 담보로 긴급 유동성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이런 기본 원칙의 시각에서 보면 이번 개정안은 문제투성이다. 왜 유동성 위기라서 지원이 필요하다면서 한국은행을 제치고 예보가 별도로 계정까지 만들어 가면서 앞장서야 하는가. 한국은행법 제80조를 보면, 심각한 금융시스템의 위기 시에 한국은행이 비은행 금융기관에 유동성을 지원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결국 금융위가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해외의 운용 사례’뿐이다. 이 주장은 그러나 더더욱 어불성설이다.

예금보험기구에 금융안정계정을 신설하자고 할 때 유사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운용하는 ‘채무보증프로그램(DGP)’이다. 이 두 제도는 의사결정 주체와 감시의 강도의 측면에서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미국은 서브프라임 위기를 거친 후 도드-프랭크법을 제정해 금융시스템의 체제적 위기에 대한 대응 장치를 많이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위 채무보증프로그램인데 이것은 도드-프랭크법 제1105조(연방법률 분류 기준상 12USC§5612)에 규정돼 있다. 이에 따르면 이 채무보증프로그램을 적용하려면 먼저 재무부 장관이 연방예금보험공사와 연준에 현 상태에서 이 프로그램을 동원해야 할 정도의 유동성 위기가 존재하는지를 살펴보도록 주문한 후, 두 기구의 이사회가 각각 3분의 2의 의결로 유동성 위기가 있다는 점을 서면으로 결의해야 한다. 이 경우 채무보증프로그램을 활용할 수는 있으나 이는 자본 확충에는 사용할 수 없고, 또 예금보험기금으로부터의 차입은 금지된다. 그리고 재무부 장관은 대통령과의 협의를 거쳐 채무보증의 상한을 정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결정은 모두 미 의회에 통보된다.

이대로는 ‘금융위의 장난감’ 불과

금융안정계정은 위에 비하면 그냥 ‘금융위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대통령, 기재부 장관, 한은 총재는 전혀 보이지 않고 금융시스템의 위기라면서 정부 차입도 없다. 그 대신 부실을 대비해서 쌓아둔 예금보험기금 돈을 빼돌려 쓰겠다는 것이다. 정말 금융시스템의 위기라면 기재부와 한국은행의 협조 없이 이를 돌파할 수 있단 말인가.

금융안정 장치의 정비는 필요하다. 그리고 이왕이면 위기 시가 아닌 평상시에 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좋다. 다만 꼼수로 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하려면 우선 기재부 장관, 예보 사장, 한은 총재, 금융감독기구의 수장들과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가칭 금융안정협의회 같은 기구를 만들어 여기서 위기 판단과 대응 방식을 논의하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의 책임과 국회의 감시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연히 원칙적으로 최소비용의 원칙과 공평한 손실분담의 원칙이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또 지금 금산법에 규정돼 있는 금융안정기금은 금융안정계정으로 통합해야 한다. 지금처럼 장난감을 가지고선 금융시스템의 위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정무위원회의 심도 있는 논의를 촉구한다.

<전성인 홍익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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