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도 웃는 사람들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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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립스틱·소주·담배·게임기 등 잘 팔려…명품·고급차도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복권·립스틱·소주·콘돔·담배·게임·라면….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많이 팔리는 이른바 ‘불황형 상품’이다. 불황기엔 변하지 않는 법칙들이 있다. 실용적 소비 성향이 짙어진다. 최대한 덜 쓰면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려는 소비 유형이다. 명품 매출이 늘거나 일확천금의 심리도 강해진다. 올해도 고물가·고금리 영향으로 내수시장엔 찬바람이 불 전망이다. ‘불황의 속설’이 통할까.

지난해 복권 판매액은 6조4292억원으로 전년(5조9753억원)보다 7.6% 증가했다. 복권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더 많이 팔렸다. 연도별로 2017년 4조2000억원, 2018년 4조4000억원, 2019년 4조8000억원으로 4조원대를 기록하다 코로나19가 확산한 2020년 5조4000억원으로 뛰었고, 2021년과 2022년에도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불경기일수록 복권이 많이 팔린다’는 속설이 어느 정도 입증된 셈이다.

지난해는 특히 고물가와 고금리 영향으로 하반기로 갈수록 내수시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19일 발표한 ‘11월 소비동향’에서 소매판매액지수는 전월 대비 1.8% 감소하며 3개월 연속 뒷걸음질했다. 가계 형편도 어려워졌다. 지난해 11월 17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3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486만9000원으로 1년 전보다 3.0% 늘었지만, 물가 변동분을 제거한 실질소득은 2.8% 줄어 전년도 2분기(-3.1%) 이후 5개 분기 만에 감소세로 전환했다. 지난해 3분기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5.9% 올랐다. 분기 기준 상승률로는 1998년 4분기(6.0%) 이후 가장 높았다. 골목상권 경기도 얼어붙긴 마찬가지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자영업자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지난해 12월 12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자영업자 중 68.6%는 매출이 1년 전보다 줄었다고 답했다.

복권을 산 사람 중에선 중산층 이상 소득자가 많았다. 지난해 복권 구매 경험자를 가구소득 5분위별로 나눠봤더니 상위 20~40%에 해당하는 4분위(월소득 466만~673만원)가 39.0%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소득 5분위(674만원 이상) 비중은 10.9%였다. 과거엔 소득이 낮은 사람들이 주로 복권을 사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중산층 이상 소득자들이 복권을 가장 많이 구매하는 셈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저소득층의 복권 구매 여력이 줄었거나, 경기 불황에 일확천금을 노린 중산층이 많아진 것으로 풀이된다. 직업별로도 사무직(화이트칼라) 비중이 32.1%로 가장 높았다. 자영업(20.2%), 전업주부(18.9%), 생산직(블루칼라, 17.9%)이 뒤를 이었다. 무직이나 은퇴자 비중은 5%에 그쳤다.

경기 성남시의 한 화장품 매장에 립스틱이 진열돼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기 성남시의 한 화장품 매장에 립스틱이 진열돼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한 백화점의 명품 매장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한 백화점의 명품 매장 / 경향신문 자료사진

담배도 불황기에 호황을 누리는 대표적인 품목이다. 연초로 불리는 궐련 담배 판매가 소폭 줄어든 반면 궐련형 전자담배 판매는 크게 늘었다.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7월 말 내놓은 ‘2022년 상반기 담배시장 동향’을 보면 지난해 상반기 국내 전체 담배 판매량은 모두 17억8000만 갑으로, 전년 동기(17억5000만 갑) 대비 3000만 갑(1.9%)이 더 팔렸다. 궐련 담배는 15억2000만 갑이 팔려 전년 동기 대비 2000만 갑(1.0%)이 덜 팔린 반면 같은 기간 궐련형 전자담배 판매는 5000만 갑(22.5%) 많은 2억6000만 갑이 팔렸다.

술 판매량도 크게 늘었다. 소주의 경우 하이트진로의 소주 참이슬 후레쉬가 지난 10년간 연평균 약 5%씩 매출이 늘었는데, 지난해는 전년 대비 9%나 뛰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조금씩 완화되면서 코로나19 이후 매출이 줄었던 유흥업소에서 판매량이 23%나 올랐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지난 1월 17일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를 보면 지난해 와인 수입액은 5억8126만달러(약 7187억원)로, 전년 5억5981만달러 대비 3.8% 증가했다.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돈을 아끼려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집에서 여유롭게 술을 즐기는 혼술(혼자 마시는 술)과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 문화가 하나의 대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올해는 전반적인 경기 불황의 영향으로 이러한 흐름이 더 확산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불황의 속설’ 뭐가 있나

대표적으로 ‘립스틱 효과’가 있다. 경기가 불황일수록 립스틱과 같은 저가 화장품이 많이 팔리는 현상을 일컫는다. 빨간 립스틱 하나만으로 화장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1930년대의 미국 대공황기에 대다수 상품의 매출이 떨어졌지만, 립스틱 매출은 오르는 기현상을 보고 경제학자들이 붙인 용어다.

경기침체 우려가 커지는 미국의 경우 방역 완화 효과와 맞물려 립스틱 매출이 크게 늘었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해 11월 24일(현지시간) 프랑스 화장품 기업 로레알 최고경영자(CEO) 니컬러스 이에로니무스를 인용해 “2022년도 3분기 자사 매출이 코로나19 관련 규제로 인한 중국 판매 둔화에도 불구하고 전년 동기보다 9.1% 증가했다”고 밝혔다. WSJ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지난해 1~10월 전체 립스틱 판매 실적이 전년 동기 대비 37%나 늘었다. 올해 국내 화장품 시장 전망도 이와 다르지 않다.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는 지난 1월 12일 “과도한 소비보다 패션 소품 등으로 스타일링 효과를 누리는 ‘불황 속 나를 위한 소비’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실내에서 마스크를 벗게 되면 립스틱과 같은 색조 화장품 판매가 크게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불황형 상품 중 하나인 콘돔은 속설과 반대로 매출이 줄었다. 콘돔은 경기가 나쁠수록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출산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해져 평상시보다 잘 팔린다고 알려졌지만,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적인 불황기엔 판매가 오히려 감소했다. 세계 최대 콘돔 생산업체인 카렉스의 고 미아 키앗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월 10일 닛케이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년간 콘돔 판매량이 40% 감소했다”고 밝혔다.

불황에는 사치재로 불리는 명품이 더 각광받는다. 해외 패션 명품 브랜드인 에르메스는 지난 1월 4~5일 가방 제품인 가든파티36을 기존 498만원에서 537만원으로 7.8%, 에블린은 453만원에서 493만원으로 8.8% 각각 인상했다. 시계 H아워(에르 H 워치·스몰·카프스킨·금장)는 398만원에서 456만원으로 14.6% 인상했다. 스위스의 명품시계 브랜드 롤렉스는 지난 1월 1일 대표 인기 모델인 서브마리너와 데이트저스트 등의 가격을 2~6% 올렸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프라다도 일부 제품 가격을 5~10% 인상했다. 명품 주얼리 브랜드인 크리스챤 디올은 1월 12일부터 파인 주얼리 가격을 평균 10% 이상 올렸다.

대당 가격이 수억원인 초고가 차량은 불황기에도 불티나게 팔렸다. 벤틀리는 지난해 국내에서 775대가 판매돼 전년(506대) 대비 53% 늘었다. 람보르기니는 2019년 173대, 2020년 303대, 2021년 353대, 지난해 403대 등 코로나19 확산 이후 오히려 판매 실적이 크게 늘었다.

경기가 나쁠 때 명품 가격이 오르고 잘 팔리는 현상을 가리켜 흔히 ‘베블런 효과’라고 부른다.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평론가인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에서 따온 베블런 효과는 가격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줄지 않고 되레 증가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기업들이 사람들의 과시욕을 자극하기 위해 한정판이나 리미티드와 같은 수식어를 붙여, 수량은 적게 판매하되 가격은 높게 책정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한다.

서울 종로 재래시장의 한 상가에 점포 임대문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 김창길 기자

서울 종로 재래시장의 한 상가에 점포 임대문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 김창길 기자

2009년 호황 누렸던 수입품은

과거 불황기엔 어땠을까.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엔 담배와 화장품, 고급 시계와 스마트폰 등이 주목을 받았다. 관세청이 2010년 5월 발표한 ‘2009년 불황을 잊은 10대 수입 소비상품’은 스마트폰, 커피 원두, 고급 생수, 담배, 사케(일본 청주), 비디오 게임기, 중소형 디젤 승용차, 화장품, 악기, 고급 시계 등이었다.

이중 담배는 전년 대비 17.5%(중량 기준)나 증가했다. 금연초와 금연껌 등 담배 대용품 수입이 전년 대비 중량 기준 6.4%, 금액 기준으로 18.6%나 증가해 눈길을 끌었다. 경기침체 시기에 흡연 인구도 증가했지만, 동시에 담배 대용품을 통해 금연을 하거나 흡연량을 줄여보려는 인구가 증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불황기엔 돈이 많이 드는 야외활동보다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기 수입이 크게 늘었다. 닌텐도 위(Wii),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비디오 게임기 수입이 전년 대비 48% 증가해 총 수입액이 1억600만달러에 달했다. 향수 수입액은 전년보다 4.5% 증가한 7459만달러, 고가 악기인 색소폰 수입은 전년보다 7.9% 늘어난 1168만달러, 스위스산 손목시계 수입은 전년보다 20.5% 증가한 1억6000만달러로 각각 집계됐다. 2500cc 이하 중소형 디젤 승용차 수입액도 2억698만달러로 43% 증가했다. 특히 휴대전화 수입액은 1억3704만달러로 전년보다 무려 149%나 증가했다. 2008년 11월쯤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수입액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이들 품목은 웰빙과 가치 중시, 젊은층 주도 소비 등 당시의 소비 트렌드를 이끌며 관심을 받았던 제품들이다. 금연초와 금연껌 등 담배 대용품이 크게 늘어난 것은 경기가 어려울수록 ‘건강’을 중시하는 소비 성향이 두드러진 결과로 해석된다. 또 고급 생수와 악기, 고급 시계 등의 수입이 늘어난 것은 ‘가격’보다는 제품에 내재된 ‘가치’를 중요하게 고려하면서도 문화와 명품 이미지를 동시에 취하려는 소비 유형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스마트폰, 커피, 사케, 중소형 디젤차, 화장품 등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각광을 받았던 대표적 품목이다. 상대적으로 소득은 많지 않지만, 유행에 민감한 20~30대 젊은층의 소비 성향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해 10월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라면 제품들. 라면은 불황기에 호황을 누리는 제품 중 하나다. /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라면 제품들. 라면은 불황기에 호황을 누리는 제품 중 하나다. / 연합뉴스

올해 내수 전망은

올해도 고물가와 고금리 영향으로 내수시장 전망은 어둡다. 지난해 여름 이후 켜진 ‘경기 둔화’ 경고음이 최근 들어 그 수위를 높이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1월 13일 발간한 ‘경제동향(그린북)’ 1월호에서 “내수 회복 속도가 완만해지고 수출 감소와 경제 심리 부진이 이어지는 등 경기 둔화 우려가 확대됐다”고 했다. 지난해 6월 그린북에서 언급한 이후 연말까지 계속 유지한 경기 둔화 ‘우려’를 1월엔 둔화 ‘우려 확대’로 더 암울하게 진단했다.

소매업계 분위기도 좋지 않다. 지난 1월 15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소매유통업체 500곳을 대상으로 올해 1분기 소매유통업 경기전망지수(RBSI)를 조사한 결과 전망치가 64로 집계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2009년 1분기·73)와 코로나19 확산 시기(2020년 2분기·66)보다 낮다. RBSI가 100 이상이면 ‘다음 분기의 소매유통업 경기를 지난 분기보다 긍정적으로 보는 기업이 많다’는 의미이고, 100 이하면 그 반대다. RBSI는 지난해 2분기 99에서 3분기 84, 4분기 73, 올해 1분기 64로 하락하며 3분기 연속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 대한상의는 “새해에도 고물가, 고금리, 자산가격 조정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해소되기 어렵다”며 “각종 공공요금 인상 등으로 높은 물가 수준이 지속되고 이를 잡기 위한 고금리 기조 유지가 불가피해짐에 따라 소비 회복이 어려우리라는 우려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해당 조사에선 업태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경기전망치가 좋지 않았다. 대형마트(83)가 상대적으로 선방했지만 나머지 백화점(71), 온라인쇼핑(65), 편의점(58)은 ‘한파’를 맞을 것으로 봤다. 고소득 이용객이 많은 백화점의 경우 자산가치 하락과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에 따라 매출 감소폭이 커질 수 있다. 온라인쇼핑은 높은 가격 경쟁력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경기 하락세를 피하지 못할 것으로 분석된다. 특이한 점은 편의점이다. 통상 불황기에 매출이 늘어나는 업태 중 하나지만 올해는 이례적으로 부진을 겪을 것으로 전망됐다. 염민선 대한상의 유통물류진흥원 박사는 “1~2월 겨울철은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데다 비수기여서 매출 체감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이후 경기전망치까지 낮은 것은 경기 불황이 예고된 상황에서 편의점 간 치열한 경쟁과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부담이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고 했다.

이수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불황기에는 구독서비스와 같은 고정 비용 지출이 줄어드는 반면 한 번에 대량으로 사면 할인이 되고 오래 두고 쓸 수 있는 치약과 샴푸 등 대용량 제품과 1인 가구가 즐겨찾는 소용량 제품의 매출이 늘어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자산 버블을 경험하면서 단순히 아껴서 지출을 줄이는 방식이 아닌 플랫폼에서 내가 매출까지 낼 수 있는 방법, 예컨대 온라인 중고 마켓을 통해 실속형 구매를 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물건을 올려 이익을 거두려는 소비 유형도 늘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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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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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