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 자산도 민간에 이관…정책금융 순기능 이해 부족서 비롯
“정부가 무슨 근거로 이러한 지시를 했는지 모르겠다.”(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
“실무진에서 검토한 내용일 뿐 저는 보고받은 적이 없다.”(김주현 금융위원장)
국책은행의 우량 자산(여신)을 시중은행에 넘기는 방안을 담은 산업은행의 내부문건을 두고 지난 9월 20일 야당 의원과 금융위원장 사이에 오간 말이다. 논란은 김 위원장이 선을 그으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산업은행이 문건 유출자 색출에 나선 정황이 드러나면서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논란의 시작은 인력 감축과 자산 매각을 골자로 한 윤석열 정부의 공공기관 혁신안에서 비롯됐다. 국책은행도 예외는 아니다. 기능과 역할에서 민간과 겹치는 것은 모두 민간에 넘겨야 한다는 정부 논리가 깔려 있다. 현행법 위반, 관치금융 부활, 시중은행 특혜 시비 등 뒷말이 무성하다. 근본적으로 정책금융기관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건 작성된 배경은 기재부 혁신안”
산업은행 문건은 국책은행의 우량 거래처를 시중은행에 넘기는 방안을 담고 있다. 지난 9월 16일 문건을 확보해 공개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김주영 의원(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우량·성숙단계 여신 판별기준 시나리오’ 문건은 산은의 전체 영업자산 243조7000억원 중 해외·투자 자산 등 이관이 곤란한 137조2000억원을 제외한 106조5000억원을 이관 가능한 영업자산으로 분류했다. 이관 대상 기업과 규모별로 3개의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이중 신용도가 최고 수준인 알짜 회사만을 골라 최대 18조3000억원에 달하는 영업자산을 민간은행에 넘길 수 있다고 본 시나리오3은 시중은행에 넘길 대상 기업이 226개사에 달한다고 판단했다. 문건에 적시된 기업 중 상위 차주 기업들은 ㈜SK하이닉스, 현대제철㈜, ㈜LG유플러스, 삼성물산, 현대차 등이다. 기업은행에서도 IBK경제연구소를 비롯한 전체부서를 대상으로 ‘정책금융 역할재편’ 관련 문건 작성을 주문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김 의원은 지적했다. 김 의원은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한 공공기관 혁신이 우리 경제의 근간인 국책은행에 대한 무분별한 민영화로 추진되고 있다”고 했다.
기재부는 앞서 지난 7월 29일 전체 350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제시한 혁신 가이드라인에서 내년도 정원 감축과 경상경비 삭감, 해외사업이나 골프장 등 비핵심 자산의 매각 등을 권고했다. 또 민간과 경합하거나 지방자치단체가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기능은 축소하고 기관 간 유사·중복 기능은 통폐합하는 등 기능 조정 방향도 내놨다. 각 공공기관은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자체 혁신 방안을 마련해 8월 말까지 기재부에 제출한 상태다.
해당 문건은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금융위가 국책은행들에 압박을 넣자 산은이 마지못해 작성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국회 정무위 관계자는 “‘민간과 중복되는 사업들은 정리하라’는 기재부 방침에 따라 금융위도 ‘국책은행의 우량자산 이관’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금융노조도 “주무부처인 금융위가 산하 금융공공기관들의 목을 조르고 있다”며 공공기관 민영화와 관치금융 부활 저지 등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공공기관 혁신 가이드라인이 현행법을 위반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용우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정책금융기관이라 할지라도 산업은행법, 중소기업은행법, 은행법에 따라 영업자산 양도와 같은 중요 경영사항은 이사회 결의를 거쳐야 한다. 특히 은행업이 자산처분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부실매각을 하는 경우 등으로 규정돼 있고 우량자산을 넘길 땐 자산가치를 반영해야 하는데 이를 하지 않고 그런 지시를 하는 것도 법 위반”이라고 했다.
논란이 커지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9월 20일 국회 정무위 전체회의에서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우량자산을 일반 시중은행에 이관하는 계획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또 “제가 보고받은 바 없고 금융위 간부 사이에서 한 번도 의미 있는 주제로 논의된 바 없는 사안”이라고도 했다. 국정과제에 국책은행의 역할 재조정에 관한 안건이 담겼는데, 이를 의식한 실무진들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한 내용일 뿐 실제 추진 가능성은 낮다는 주장이다. 이런 분위기는 금융공기관 전체에 확산되는 분위기다. 김주영 의원이 지난 10월 4일 기재부로부터 제출받은 공공기관 혁신계획안을 보면, 수출입은행과 한국조폐공사, 한국투자공사, 한국재정정보원 등 기재부 산하 4개 기관은 자산 효율화를 목적으로 자산 매각 165억원, 출자회사 정리 1687억원 등 모두 1852억원 규모의 자산을 처분할 예정이다.
“계획 없다” 해명 믿어도 될까
금융위원장 해명에도 여진은 계속됐다. 산업은행이 문건 유출자를 색출하기 위해 부서별 면담을 추진한 정황이 드러나면서다. 산업은행은 10월 7일 ‘내부문서 외부유출 관련 면담 요청드립니다’ 제목의 e메일을 발송해 우량여신 이관 시나리오를 외부로 유출한 직원을 찾기 위해 면담을 시도했다. 면담자들이 개인정보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아 이뤄지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의원은 이날 “산업은행은 우량여신 이관 검토를 요구한 금융위원회에 항의를 못 할망정 내부자 색출에 나섰다”며 “지금 산업은행이 집중해야 할 것은 정부의 잘못된 민영화에 기여하고 직원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책은행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 논란을 두고 여러 뒷말이 나온다. 산은 안팎에서는 차제에 산은이 거래하던 우량자산을 시중은행에 넘기면서 일부 중소기업 지원과 구조조정 기능만을 남긴 채 부산 이전을 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정책금융기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국책은행은 우량자산 거래로 남긴 자금을 중소기업에 다시 정책자금으로 지원하는 순기능이 있음에도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김 의원은 “국책은행은 민간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자금을 수혈한다. 국책은행의 규모와 안정성이 떨어지면 국제사회에서의 우리나라 경제 안정성이나 신용도 평가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박홍배 금융노조 위원장은 “(금융당국에서도) 부서별로 (이관에 따른) 리스크를 검토했다는 점에서 실무진 검토에 불과하다는 금융위원장 해명이 와닿지 않는다. 논란과 반발에 밀려 정부가 이런 (민간으로의 기능과 자산 이관) 기조를 바꿀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조금 잠잠해지면 유사한 방식의 개편을 다시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