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근거로 무장한 ‘대정전 위기설’ 시민 불안 증폭시켜
올해 전 세계를 덮친 기후위기의 대표적 증상은 ‘열돔(Heat Dome)’이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리턴(Lytton) 지역은 사상 최고 기온인 49.5도 폭염에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캘리포니아대학(UCLA)의 기후학자 대니얼 스웨인은 이런 온난화의 수치가 “최고치가 아닌 최저치에 가깝다”며 갈수록 더 큰 재앙이 닥칠 것을 경고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8월 5일, 그린피스는 한국의 고온 지역 면적이 9년 사이 2배로 증가했다는 분석결과를 발표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7월 4주 최대 전력 수요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7월 1일 발표한 ‘여름철 전력수급 전망 및 대책’을 통해 코로나19 영향과 이른 폭염에 대비한 전력수급 안정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 발표 직후부터 약 한달간 전력 비상상황으로 대정전이 올 수 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한국전력거래소가 지정한 전력 비상상황은 전력 예비력 5.5GW(전력 예비율 약 8%) 미만임에도 불구하고, 전력 예비율이 10% 이하로 떨어지면 위기상황이라는 보도가 반복됐다. 또한 전력 예비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질 경우, 이는 탈원전 정책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2024년 총 원전 설비율 최대를 기록하고, 2085년까지 원전을 유지하는 탈원전 정책이 오늘날의 전력수급 위기를 부추긴 정책으로 호도된 것이다.
‘전력수급 위기와 탈원전’ 토론회
특히 원전 3기 재가동 결정 소식이 전해진 7월 19일, ‘탈원전으로 인한 대정전 위기설은 정점에 닿았다. 다수의 언론매체는 재가동 결정 소식을 두고 ‘탈원전 정책을 고수하던 정부가 전력수급 위기에 결국 원전의 계획예방정비를 단축하고 조기 가동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더해 평균 2개월이던 정비 일수가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 반년으로 늘었다며 이 역시 탈원전 정책 때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린피스와 에너지전환포럼은 8월 2일 ‘전력수급 위기와 탈원전, 무엇이 팩트인가?’ 토론회를 열고 왜곡된 정보를 바로잡고 객관적 사실을 알리기 위한 자리를 가졌다. 이번 토론회에서, 원자력안전위원회와 한국수력원자력의 담당자는 최근 보도를 놓고 “당혹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계획예방정비는 법령에 정해진 기준과 매년 산업부와 협의해 결정한 정비계획에 따라 진행하며, 전력수급 일정에 따라 원전의 정비 일정을 임의대로 조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여름이나 겨울 혹은 특정 부하 기간에 맞춰 원전의 가동을 조정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전했다.
‘원전 정비 일정 조정’ 기사가 보도되는 동안 가려진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첫째, 일부 계획예방정비가 당초 계획보다 늘어난 원인은 원전의 안전성 문제에 있다. 조정아 원자력안전위원회 안전정책과 과장은 한빛 4호기 격납건물의 공극(구멍)이 발생한 사건, 13기의 원전에서 방사성 물질 누출을 차폐하는 격납건물 내벽 철판(CLP·Containment Liner Plate) 부식이 9998건이나 발견된 것, 시험성적서 위조 사건에 따른 점검을 진행하다 보니 정비가 늘어난 것이라고 밝혔다.
둘째, 원전은 전력망 안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토론회에 참석한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2016년 대형 원전인 디아블로 캐니언 1·2호기를 수명 연장 없이 폐쇄한 사례를 소개했다. 태양광 발전량이 증가함에 가변적인 전력의 수요 공급량을 경직성이 큰 원전이 맞추지 못해 불시 정지의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원전의 폐쇄 결정 원인은 전력망에 엄청난 충격을 일으켜 대정전이 발생할 수 있다는 기술적 판단이었다.
한국과 유사한 전력 계통을 가진 영국은 지난해 재생가능에너지 발전량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고 전력 순수요가 줄어 사이즈웰-B 원전의 출력을 약 5개월간 50% 감발했다. 석광훈 박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영국의 사례가 한국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 이는 이미 당도한 과제다. 태양광 발전 비중이 약 6% 수준으로 증가해 지난해부터 연휴 기간 중 신고리 3·4호기 원전의 출력을 20%씩 줄인 바 있다. 원전이 전력망에 미치는 부담이 가시화된 것이다. 이는 원자력 업계가 신규 건설을 촉구하는 신한울 3·4호기뿐만 아니라 현재 가동 중이거나 건설 중인 대형 원전들이 이미 전력수급 안정에 큰 과제가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탈원전으로 인한 대정전 위기’ 없어
셋째, 태양광 발전은 전력수급 안정에 상당히 기여했다. 정응수 한국전력거래소 계통운영처 처장은 최대 전력 피크가 기록된 7월 27일, 예비력은 11%로 안정적인 상황이었으며, 총 20.3GW의 태양광 발전량이 전력수급과 공급 능력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시간으로 계량되는 약 5GW 이외에 전력구매계약(PPA), 자가용 태양광 등 약 15GW의 비계량 발전량이 전력 수요 감축 효과로 나타났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낮인 14~15시에 머물던 전력 피크 시간을 17시로 지연시키는 역할을 했다.
산업부는 8월 4일 브리핑을 통해 비계량 발전량을 추계한 결과, “7월 중 기온이 높은 한낮의 태양광 발전 비중이 총 수요의 11.1%를 차지한 것으로 추산됐다”고 밝혔다. 7월 동 시간대 평균 전력 수요가 9만1164MW(메가와트)였는데, 태양광 발전량이 이중 1만118MW를 충당한 것이다.
토론에 참석한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김선교 부연구위원은 “탈원전은 장기 계획이고 전력수급 관리는 단기 계획이기에 두 문제는 서로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현재의 전력 예비력은 전력 비상수급 첫 단계인 5.5GW의 약 2배인 10GW에 달해 대정전 가능성을 논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으며, 태양광과 유연성 에너지원의 확대로 이제는 불확실성에 대처할 능력이 더 커졌다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 8월 2주로 예상되는 또 한 번의 폭염에도 예비력 부족 상황은 없을 것이며, ‘탈원전으로 인한 대정전 위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외면하고 잘못된 근거로 무장한 ‘대정전 위기설’은 시민의 불안과 불편을 증폭시켰다. 잘못된 정보가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는 근거가 됐다. 전력이 부족해 대량의 설비가 필요하며, 대정전이나 전력수급 불안을 막기 위한 ‘만병통치약’이 원전이라는 사고방식은 구태일 뿐 아니라 위험하다. 지금은 전력 부족이 아니라 전력 과다로 인한 안정적인 전력망 구축이 시급한 상황이다.
<장마리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캠페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