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시스템 키친의 원조 ‘프랑크푸르트 키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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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한국의 전통부엌은 난방과 조리를 동시에 하는 공간이다. 아궁이와 부뚜막을 중심으로 벽과 바닥이 흙으로 마감돼 안채에 붙여졌다. 아궁이에 땐 불은 구들을 데워 방의 난방을 도왔다. 전통부엌은 공간 사이의 높낮이가 다르고 동선이 불편했지만, 농사일과 집안일을 병행하던 당시의 생활양식에 적합했다.

오스트리아 빈 응용예술미술관에서 재현해 선보인 프랑크푸르트 키친의 모습 / 8linden FRANKFURTER KUCHE

오스트리아 빈 응용예술미술관에서 재현해 선보인 프랑크푸르트 키친의 모습 / 8linden FRANKFURTER KUCHE

1960년대 들어 국내 모든 산업문화가 현대화를 부르짖고 나올 때 부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전히 일부 가정에서는 가사노동 환경이 열악했어도 설비의 보급이 순차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가스레인지가 도입되고 찬장 같은 수직적 수납개념이 생기며 개수대와 조리대가 마련됐다. 또 난방과 취사의 독립으로 공간 사이의 높낮이 차이가 사라져 완전한 내실화가 이루어졌다.

최소 규격 공간과 최대 공간 활용

한편 1970년대 중반 무렵이 되면 도시를 중심으로 서구식 주택 개념인 아파트 건축이 활발해졌다. 서구식 주택은 입식 생활을 기본으로 부엌은 다른 공간과 평면적으로 배치됐다. 효율과 위생이 고려되면서 본격적으로 공장제 입식 주방시설이 도입됐다. 타일로 만들어졌던 개수대가 스테인리스 싱크대로 바뀌고, 수납을 최대화하는 수납장과 함께 한묶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부엌은 주방을 넘어 ‘시스템 키친’으로 진화했다.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냉장고, 전기밥솥 등 작업의 능률화를 위한 가전제품들이 부엌 한편을 차지했고, 색채개념이 도입돼 아름답게 꾸며졌다. 나아가 거실의 연장선에 자리 잡고 가정의 상징적 중심이 됐다. 예전과 달리 개방적으로 변모했고 온 가족이 함께 일하는 공간으로 쓰임새가 진화했다.

‘프랑크푸르트 키친(Frankfurt kitchen)’은 바로 이 현대 시스템 키친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 여성 건축가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1897~2000)가 고안한 이 건축 브랜드 없이는 부엌의 혁신 역시 없었을지도 모른다.

1916년 빈 응용미술 아카데미 건축과를 졸업한 그는 혁신적인 근대 건축가로 널리 알려진 아돌프 로스의 사무소에서 설계를 맡았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미국의 경영학자 프레데릭 테일러의 노동표준화 이론인 테일러리즘에 관심이 많았다. 테일러는 노동자 동선 연구의 창시자로 공장에서 부품과 공정, 노동 등의 표준화를 통해 노동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테일러리즘이 주택 건축에서도 가능하다고 믿었던 쉬테-리호츠키는 본격적인 부엌 규격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그는 주부의 가사노동을 기능주의적으로 합리화시키겠다는 원칙에 입각한 설계안을 지속적으로 고안했다. 400명 이상의 손님을 위한 요리가 이루어지는 기차 식당칸의 부엌을 모티브로 1927년에 열린 국제무역박람회에 새로운 개념의 부엌 견본을 출시했다.

그의 부엌은 부엌일을 합리적인 동선에 따르게 이끄는 명료한 디자인과 비용 절감 요소를 조화롭게 구현한 혁신적 모델이었다. 이후 1920년대 말 프랑크푸르트에 건설된 공공주택에 대대적으로 8000세트나 설치됐다. 프랑크푸르트 키친이 본격적 발걸음을 내디딘 동시에 현대 시스템 키친의 역사도 시작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키친은 최소 규격 공간과 최대 공간 활용을 동시에 목표로 했다. 주요 구조를 살펴보면 부엌은 폭 1.9m, 길이 3.44m의 좁고 긴 형태이고 긴 벽 쪽으론 오븐, 화덕 등의 전기제품들을 배치했다. 조리 시 발생하는 냄새와 연기를 흡수하기 위한 벤틸레이터는 화덕 위에 설치됐다.

창문이 있는 짧은 벽 아래에는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작업대가 있고, 그 아래에는 냉장고를 대신하는 음식보관함과 분리형 음식물쓰레기통이 갖춰진 커팅보드, 회전의자도 함께 설치됐다. 그 오른쪽 벽에는 2개의 개수대, 접시꽂이가 설치됐다. 또한 갈고리 모양의 걸이와 컵 거치대도 함께 설치돼 설거지한 식기를 쉽게 말리는 동시에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주부가 움직이는 동선 크게 단축

개수대 옆으론 조리도구와 그릇을 보관하는 수납장이 있고, 개당 2㎏ 정도의 콩이나 설탕 등의 음식 재료들을 보관할 수 있는 18개의 무광택 알루미늄 서랍이 붙박이장 아래에 설치됐다. 이런 붙박이 가구의 재료와 색상은 매우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연구결과에 따라 제작됐다. 밀가루 벌레의 특성을 고려해 참나무를 썼고 가구 밑을 청소할 필요가 없도록 붙박이장을 바닥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에나멜 처리된 수납장 전면은 코발트블루로 처리됐는데 이는 파리가 싫어하는 색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점도 없지는 않았다. 한사람만 일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라는 점이 대표적인 단점으로 지적됐다. 하지만 순차적으로 연결된 부엌은 주부를 둘러싸고 있으며, 모든 가구가 손에 닿는 범위 내에서 효율적으로 배치돼 한사람 손으로 충분히 조작될 수 있게 설계됐다. 그 결과 주부가 하루 동안 움직이는 동선을 90m에서 8m로 크게 단축한 장점도 동시에 가능했다. 또한 부엌에서도 자녀들을 지켜볼 수 있도록 폭이 넓은 미닫이문으로 거실과 연결하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고려했다.

쉬테-리호츠키가 만든 프랑크푸르트 키친은 명확한 목표의식의 산물이었다. 그는 가사생활 역시 공장이나 사무실 업무만큼이나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의의를 뒀다. 하녀 없이 가사생활을 하는 중산층 주부에게 최적의 해결책을 주려는 이 기획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프랑크푸르트 키친을 제외하면 쉬테-리호츠키를 상징하는 특별한 건축물이나 주택은 없다. 그는 스탈린의 ‘5개년 계획’에 참여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해 당시 소련의 산업도시들을 건설하는 일에 진력한 바 있다. 그러나 ‘대숙청’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시 소련을 떠나고,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에 따라 반나치 활동을 벌이다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가 평생 헌신한 대상이자 건축가의 ‘진짜 고객’이라고 생각한 대상은 공공주택 설계를 의뢰하는 정부의 관료가 아니라 그 안에 살게 될 주부와 노동자 같은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프랑크푸르트 키친은 아이러니하게도 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부엌은 집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갈수록 고급화됐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으면 가족 공동 식사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면서 주방은 더욱 다양한 형태로 맞춤 및 고급화 흐름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유행과 트렌드를 쫓아간다면 결코 프랑크푸르트 키친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진짜 고객’은 누구인가. 이 핵심질문에 걸맞은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영원히.

<김도환 브랜드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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