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의 예제처럼 한 끗 차이로 뜻이 달라지는 단어들이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를 꼽자면, 사람들이 자주 헷갈리는 맞춤법 중 하나인 ‘개발’과 ‘계발’이 아닐까 싶다. 정말로 ‘아’와 ‘어’ 차이로 두 단어의 뜻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개발은 무언가를 발전하도록 만든다는 의미이고, 계발은 재능을 일깨운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 개발이라 알고 있는 단어는 사실 ‘자기 계발’이다. 메뉴도 ‘계발’하는 게 아니라 ‘개발’하는 것이다. 물론 개발에는 계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개발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 개발자. 이 직업 역시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제품과 사업부터 시작해 산업 기술, 부동산, 소프트웨어 등 여러 분야의 개발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개발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소프트웨어 개발자, 즉 프로그래머가 떠오른다. 인터넷과 모바일 서비스 기획자인 내가 가장 밀접하게 일하는 대상 중 하나가 그들이다 보니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IT 서비스의 최전방을 지키는 사람들
하지만 프로그래머라고 해서 다 같은 개발자는 아니다. 개발 과정에는 수많은 분야의 개발자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리고 각 분야는 기준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분류가 달라진다.
대표적인 기준점 중 하나는 사용자에게 직접 보여지는 기능을 구현하느냐, 겉으로 보이지 않는 서버나 데이터베이스 같은 시스템·인프라를 개발하느냐일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프론트엔드 개발자와 백엔드 개발자로 나뉜다. 그리고 프론트엔드 개발자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과 웹서비스 중 어느 쪽을 담당하느냐에 따라 다시 앱개발자와 웹개발자로 구분된다. 그뿐인가. JAVA나 PHP 같은 개발 언어에 따라 또 한 번 분야가 갈린다.
‘개발자의 아내가 알아야 할 97가지’라는 글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개발자의 특징을 풀어낸 글인데, 흥미로운 몇 가지를 골라본다.
개인적으로는 “조금만 더 하면”, “거의 끝났어”라는 말이 나오면 당분간 일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변수로 인해 작업시간이 길어지곤 하는 개발자 업무의 특성을 한마디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일상적인 업무가 아닌 갑작스레 문제가 생기는 이른바 ‘장애’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시작할 때는 금세 끝날 것 같지만, 막상 대응하다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며칠이 훌쩍 지나버리기도 한다. 그야말로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전화를 할 때 “자식이 죽지 않으면 부모를 죽여버려라”라는 대화를 듣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말도 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이게 웬 당당한 사이코패스인가 싶겠지만, 여기서의 부모 자식은 개발 언어 내에서 속성을 상속하는 상위·하위개념을 일컫는 것이니 무서워 마시길. 그 외에도 개발자에게 컴퓨터는 여자들의 구두나 가방과 같은 개념이니 “컴퓨터는 이미 있지 않냐”고 타박하지 말라는 팁도 재미있다.
읽다 보면 기술과 코드에 집중하고 집착하는 ‘덕후’ 혹은 ‘긱(Geek)’으로서의 특성을 읽어내는 항목이 절반, 빠듯한 일정 내에서 문제 해결을 해내야 하는 개발자 업무의 팍팍함이 절반이다. 인터넷이나 모바일 서비스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기 때문에 업계 종사자들끼리는 종종 ‘3D 업종’이라 말하는데, 그 3D의 최전방에 서 있는 사람은 아마도 개발자일 것이다. 그 고단함이 읽혀서 짠한 마음이 든다.
사업의 방향과 목표를 조종하는 조타수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업무의 끝단이자 최전방을 지키는 이라면, 반대로 업무의 시작점을 여는 개발자도 존재한다. 바로 사업 개발자이다.
사업 개발은 말 그대로 사업을 개발하는 일이다. 그런데 일전에 기획자를 소개하는 글에 사업 기획자라는 직업이 잠깐 언급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사업 기획자와 사업 개발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양쪽 다 사업을 담당하는데, 왜 한쪽은 기획이고, 다른 한쪽은 개발일까.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포착해서 그것을 실제 사업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두 업무의 성질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둘을 혼용해 사용하는 경우도 많은 듯하다.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단어 자체의 뜻에 기대 둘의 차이를 이렇게 풀이하고 싶다. 존재하지 않았던 비즈니스에 대한 밑그림과 청사진을 그리는 것이 사업 기획이라면, 그 기반 위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굴해내고 더 발전된 형태로 만들어가는 것이 사업 개발이라고.
글로벌 제약사에서 근무 중인 한 사업 개발자는 자신을 ‘약장수’라고 표현한다. “어디서 약을 파느냐”라는 말은 남들에겐 농담이지만, 제약 분야에 몸담고 있는 그에게는 직업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마법 같은 문장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약장수라고 지칭했다 해서 그가 시장에서 좌판을 벌여 고객을 직접 끌어모으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는 자신이 담당하는 약이 환자들에게 잘 쓰일 수 있도록 각 분야의 의료 전문가들과 다각화된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한다. 몸담고 있는 산업군이 제약일 뿐 다른 분야의 사업 개발자들이 그러하듯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는 약의 효과적인 유통을 위해 어떤 회사와 어떤 식으로 파트너십을 맺을 것인지에서부터 시작해 궁극적으로 어느 정도의 이익을 달성할지를 결정하는 수익모델까지 사업이 진행되는 모든 단계를 두루 고민하고 결정한다. 사업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행하는 조타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업 개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업 개발에 요구되는 소양은 무척 많습니다. 업에 대한 이해는 물론 유연한 커뮤니케이션, 문서작성,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숫자 감각에 기본적인 법률 지식까지 갖춰야 합니다. 쓸데없이 많은 스킬이 필요하다 싶을 수도 있지만 스페셜리스트라기보다는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역량이 중요시되는 것이 사업 개발입니다.”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할 만큼 수많은 일을 하지만, 그가 하는 모든 업무는 결국 ‘약을 잘 파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가 자신의 직업을 ‘약장수’라 표현한 이유일 것이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뿐 내가 공기처럼 누리는 일상의 모든 것에는 수많은 직업의 노고가 녹아 있다. 그래서 모든 직업은 소중하다. 그리고 각각의 직업은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반대로 영향을 받는다.
나는 오늘도 출근한다. 그리고 오늘도 서비스 기획자로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과 협업할 것이고, 때로는 실랑이를 하며 언성을 높이기도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분야의 개발자들이 만들어낸 유무형의 결과물을 소비하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문득 ‘개발자들이 있어 나의 일상과 하루가 보다 풍요로워지는 것이었구나’ 깨닫게 된다. 오늘은 함께 일하는 개발자들에게 좀 더 상냥한 기획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장지희 작가·서비스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