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각광 받는 ‘한국인의 매운맛’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코로나 블루’를 ‘코리안 레드’로 이겨봅시다.”

코로나19 재확산 사태가 국내에서도 더욱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점차 열기를 더해가는 ‘챌린지’가 있다. 유명 유튜버들이 ‘한국인의 매운맛’으로 이목을 끌고 있고, 다양한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유행하고 있는 ‘매운맛 챌린지’의 중심에는 한국산 매운 음식들이 위용을 뽐낸다. ‘먹방’으로 유명한 국내 유튜버들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저마다 ‘맵부심’ 하나는 자신 있다는 이들이 ‘핵불닭볶음면’을 먹고 눈물을 흘리며 욕설을 뱉는다. 반대로 미국에서 수입된 신흥 강자 ‘캐롤라이나 리퍼 칩스’도 있다. 토르티야 칩 하나를 먹고 음료 없이 버티는 ‘원칩 챌린지’에 국내의 고수들이 무너지기도 한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연구원들이 강한 매운맛을 내는 미국 캐롤라이나 리퍼를 비롯해 41개국 448개 고추의 유전자원을 선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연구원들이 강한 매운맛을 내는 미국 캐롤라이나 리퍼를 비롯해 41개국 448개 고추의 유전자원을 선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파이어 누들 챌린지’ 통해 알려져

국경을 넘어 유행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처럼 매운맛 역시 세계적인 유행 대열에 오른 모습이다. 사실 코로나19 대유행 전부터 매운맛이 격렬한 음식에 도전하는 모습은 방송은 물론 유튜브 같은 영상 공유 플랫폼에서도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던 콘텐츠이긴 했다. 하지만 굳이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지는 않더라도 일반 이용자가 ‘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식생활에 새로운 변화를 가미할 수 있는 매운맛 간편식에 관심을 보이는 현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매운 음식이 불러오는 기분전환 효과와 맞물려 색다른 시도를 해보는 만족감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해외에서는 생소한 편이었던 한국식 매운맛은 대표적으로 ‘파이어 누들 챌린지’를 통해 알려지고 있다. 특히 해외 이용자들도 구입과 조리를 쉽게 할 수 있는 라면이 주요 소재로 자리 잡은 것이다. 기존의 제품 ‘불닭볶음면’보다 매운맛만 2배 강화한 ‘핵불닭볶음면’을 비롯해 코로나19 유행과 출시 시기가 맞아떨어진 ‘불마왕라면’ 등이 주목을 받는 제품들이다. 특히 불마왕라면은 현재 시중에 출시된 인스턴트 라면 중 매운 정도를 수치화한 스코빌지수가 1만4444로 가장 높은 점을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마니아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미 국내에서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집 밖을 나서는 소비자가 줄면서 간편식품 수요가 늘면서 대형 할인마트 등에서 라면 품귀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이 해외로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 자료를 보면 올 상반기 라면 수출액은 3억207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7.4% 증가했다. 2018년 상반기 대비 2019년 상반기 수출 증가폭이 1.7%에 그쳤던 점과 비교하면 증가율이 20배 이상 크다. 삼양식품은 불닭볶음면 수출 확대에 힘입어 1분기 해외 매출액이 작년 동기 대비 49% 성장했다. 전체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49%로 증가하면서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농심의 신라면 역시 미국 시장 공략에 성공하며 작년 상반기와 비교해 올 상반기 동안 매출을 25% 늘렸다.

이러한 시장의 흐름을 반영해 업계에서 내놓는 신제품들도 주로 매운맛을 강화한 버전에 초점을 맞췄다. 농심이 기존 ‘너구리’보다 세 배 더 매운 ‘앵그리 너구리’를 선보였고, 오뚜기는 매운맛을 강조한 ‘진비빔면’을 출시했다. 삼양 역시 ‘불타는 고추비빔면’을 새롭게 선보였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매운맛을 받아들이는 기준이 높아졌다는 판단에 따라 점차 강도를 올리는 시도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라면뿐 아니라 매운맛 소스류의 수출·판매량도 늘었다. 한국 음식의 매운맛을 대표하는 고추장의 수출액은 올해 8월까지 3320만달러를 기록하며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5.6% 늘었다. 국내에서는 캡사이신 소스의 판매량과 신제품 출시도 늘었다. 2004년 국내에선 처음으로 캡사이신 소스를 출시한 청우식품이 최근 캡사이신 소스 판매 증가세를 겨냥해 1회 사용분으로 재포장한 4g짜리 ‘캡사이신 매운맛 소스 미니’를 출시하는 등 소스류에도 신제품 출시가 이어지고 있다.

반대로 해외에서 수입되는 매운 음식의 대표주자로는 ‘원칩 챌린지’에 쓰이는 ‘캐롤라이나 리퍼 칩스’를 들 수 있다. 맵기로 소문난 과자로, 스코빌 지수가 최고 220만에 달하는 고추의 일종인 ‘캐롤라이나 리퍼’를 핵심 재료로 사용했다. 국내에서 매운맛을 대표하는 청양고추의 스코빌 수치가 1만2000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부 유튜버들이 원칩 챌린지에 도전했다가 실제로 응급실에 다녀왔다는 경험담도 과장이 아닐 수 있다.

매운맛 소스·고추장 수출도 급증

혀가 타는 듯한 매운맛에 고생하면서도 도전과 음미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매운맛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사실 매운맛은 미각이 아니라 촉각의 일종인 통각으로 감지되는데, 고통을 느끼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분비되는 엔도르핀과 아드레날린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묘한 쾌감과 각성효과를 선사한다. 특히 한국 음식에서 매운맛의 기본이 되는 고추 등의 캡사이신 성분은 비휘발성이라 혀에 오래 남아 효과를 길게 남기는 점이 특징이다.

과학자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효과 외에도 인류가 신체에 유해한 물질을 피하려 오랜 기간 학습을 거치며 ‘매운맛이 나는 음식 재료는 비교적 안전한 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점을 제시한다. 매운맛을 내는 음식은 몸의 감각기관 중 온도 수용체를 자극해 뜨거운 열감을 느끼게 하는데, 오랜 과거의 언젠가부터 인류는 매운 음식은 유해 세균이나 진균 때문에 상했을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매운맛을 선호하게 됐다는 것이다. 폴 셔먼 미국 코넬대 생물학과 교수 등 연구진은 세계 곳곳 36개국의 요리법을 분석한 결과 더운 지방일수록 향신료를 많이 쓰는데, 그 배경에도 식재료가 고온에서 더 빨리 부패하는 현상과 이를 감지한 인류의 인식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셔먼 교수는 “음식을 말리거나 훈연하고, 양념해 조리하는 모든 행위가 미생물의 위협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행위였다”고 분석했다.

한편 매운맛을 이겨내려 인류가 노력해온 역사를 보면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 유독 매운맛을 찾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포유류가 고추를 먹지 않는데, 인류는 오히려 고추의 매운맛을 강화하기 위해 품종개량까지 거듭하며 매운맛을 탐닉해 왔다. 폴 로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 점에 착안해 피실험자들에게 견디지 못할 때까지 점점 더 매운 고추를 먹도록 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실험 이후 면담에서 참가자들의 응답을 토대로 ‘견딜 수 있었던 가장 매운 단계의 고추를 가장 선호’하는 경향이 발견됐다. 로진 교수는 이 결과를 두고 “인류는 선천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을 즐기는 유일한 포유류”라며 “신체는 괴롭다는 신호를 보낼지라도 심리적으로는 아직 위험한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에 이를 즐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이미지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오늘을 생각한다
대한민국 최정예 겁쟁이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아들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죄책>에는 포로의 목을 베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관동군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도미나가 쇼조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후베이성에서 포로를 베는 ‘담력’ 교육 도중 한 초년 병사가 “불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명령을 거부했다. 불교도로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던 이 병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 임무를 거부하고 총기를 반납한 나치 대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 101예비경찰대대 빌헬름 프라프 대대장은 유대인 학살 임무에 투입되기 직전 병사들에게 “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10명 남짓 병사가 앞으로 나왔고, 그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했다. 그 병사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각 부대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병사와 장교들이 속출했지만, 나치 독일의 가혹했던 군형법은 이들에게 명령불복종죄를 비롯한 어떠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