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 족벌 경영 폐해, 막을 수 없나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경영권 분쟁으로 대한항공 실적 악화… 한진그룹 기업가치 하락

‘그룹 총수 약점 대응(Weakness Handling)’ 지난 1월 5일 기업분석업체 한국CXO연구소가 발표한 ‘5W로 살펴본 올해 국내 재계 이슈’에서 언급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다. CXO연구소는 ‘최근 총수들의 나이가 낮아지며 경영 리더십이 완숙하지 못하다는 점이 재계 불안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오너리스크(경영자의 부적절한 처신으로 기업이 피해를 입는 현상)가 국내 경제의 약점이라는 의미다. 오너리스크는 최근 3세 경영 체제로 전환한 국내 기업에서 두드러진다.

서울 중구 대한항공 서소문 사옥/연합뉴스

서울 중구 대한항공 서소문 사옥/연합뉴스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총수 일가의 세습 경영 폐해를 막겠다며 재벌개혁을 약속했다. 여당 등 정치권도 동참했다. 상법개정안 등 이른바 재벌개혁법안이 쏟아져 나왔다.

야당, 상법개정안 등 개혁법안 반대

오너리스크 안전장치는 법안에 그치지 않는다. 2016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상장사 이사회가 최고경영자(CEO) 승계 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지난해 12월에는 국민연금이 ‘경영참여 목적의 주주권행사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주주권행사를 통해 경영진의 일탈을 막겠다는 게 목적이다. 정부와 국회, 공공기관에서 법과 가이드라인 등 여러 안전장치를 마련했지만 오너리스크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안전장치는 왜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2014년 이른바 ‘땅콩회항’으로 촉발된 한진그룹의 오너리스크는 그룹 3세 간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지난해 12월 23일 동생인 조원태 그룹 회장이 ‘독선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며 법률대리인을 통해 문제를 제기했다. “가족들이 잘 협력해서 사이좋게 이끌어나가라”던 선친 고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의 유훈을 조원태 회장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양호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8개월여 만에 동생을 공개 비판한 조현아 전 부사장은 경영권을 건 지분 대결에 나설 것을 시사했다.

한진 일가 경영권 분쟁의 민낯은 성탄절 소동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지난해 12월 25일 조원태 회장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이명희 고문의 집에 찾아가 이 고문과 말다툼을 벌이다 꽃병 등 기물을 파손한 것이다. 이 고문이 경영권 분쟁과 관련해 조 회장의 누나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편을 들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후 조 회장과 이 고문은 공동사과문을 통해 “지난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많은 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깊이 사죄드린다”며 “가족 간 화합을 통해 고 조양호 회장의 유훈을 지킬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진 일가의 경영권 분쟁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진 일가는 지주회사인 한진칼을 통해 그룹 내 계열사를 지배한다. 한진칼에 대한 총수 일가 지분은 조원태(6.52%)·조현아(6.49%)·조현민(6.47%)·이명희(5.31%)로 거의 비슷하다. 한진칼의 지분을 보유한 행동주의 사모펀드 KCGI(17.29%), 델타항공(10.00%), 반도그룹(6.28%) 등 다른 주주와 연대 결과에 따라 경영권의 향방이 달라지는 구조다. 오는 3월 한진칼 주주총회를 앞두고 한진 일가는 물밑에서 치열한 지분 싸움을 벌이고 있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이 국제항공운송협회 제75차 연차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이 국제항공운송협회 제75차 연차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한진 일가가 경영권 분쟁을 벌이는 동안 한진그룹의 기업가치는 점차 하락하고 있다. 한진그룹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은 실적 악화에 허덕이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대한항공이 2019년 4분기 적자 전환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준영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항공화물사업 부문의 부진이 지속된 영향이 크다”며 “4분기에 293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때문에 대한항공은 인건비 절감을 위한 대규모 인력 감축 작업을 시행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단행한 단기 무급휴직에 이어 12월부터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오너리스크로 인해 경영은 악화되고 노동자는 회사를 떠나는 것이다.

오너리스크 등 잇단 악재 속에 최근 한진칼의 2대 주주 KCGI는 한진그룹의 높은 부채비율을 지적하며 재무구조 개선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신민석 KCGI 부대표는 1월 7일 유튜브 채널 ‘KCGI TV’에서 공개한 영상에서 “대한항공 부채비율은 861%(2019년 3분기 말 기준)로 코스피200 상장사 중 1위”라며 “상장사 평균 부채비율이 91.3%임을 감안하면 과도한 비율”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신 부대표는 “재무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경영진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라며 경영진의 각성을 촉구했다.

효성·대림그룹도 오너리스크 몸살

이런 가운데 지난해 12월 27일 국민연금이 발표한 ‘경영참여 목적의 주주권행사 가이드라인’은 대한항공 실적 악화·총수 일가 경영권 분쟁과 맞물려 주목을 받았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지분을 11.3% 보유한 주주로 최근 대한항공 등 한진그룹 계열사의 지분을 늘리면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번에 발표한 주주권행사 가이드라인에는 횡령·배임·부당지원·경영진의 사익편취 등으로 기업가치가 훼손될 경우 국민연금이 정관 변경과 이사 해임, 사외이사 선임 등 주주 제안을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주주권행사를 통해 기업가치 훼손 행위를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오너리스크로 인한 실적 부진 악순환을 겪고 있는 한진그룹은 해당 가이드라인에 따라 주주권행사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류영재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서스틴베스트 대표)은 “국민연금은 국민 노후자금 수탁자로 투자한 기업의 가치 제고를 위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재계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일제히 논평을 발표하고 국민연금 가이드라인을 비판했다. 지난해 12월 27일 전경련은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이 늘면 기업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결국 경제 활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같은 날 경총 역시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은 그 자체로 시장에 부정적 시그널을 줄 가능성이 크다”며 “기업 경영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보수언론 등도 국민연금 가이드라인을 비판하며 재계 입장에 힘을 실어줬다. 이른바 국민연금 ‘힘 빼기’에 나선 것이다.

총수 일가의 전횡을 막을 법안 역시 국민연금 가이드라인과 비슷한 처지다. 상법개정안 등 재벌개혁·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은 발의만 됐을 뿐 재계와 자유한국당 등 보수 야당의 반대로 벽에 막혀 있다. 기껏 만들어 놓은 안전장치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효성그룹과 대림그룹 등 3세 경영 체제로 전환한 기업들은 연일 오너리스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과 이해욱 대림그룹 회장은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총수 일가 사익편취)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총수 사익편취를 막을 실효성 있는 법과 제도가 여전히 미비한 상황”이라며 “시행령 제정으로는 한계가 있고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개혁법안 통과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