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업체들 지자체와 협약 입주 채비… 대기업 의존 않는 중소기업 중심 생태계 희망
‘쿵쿵, 탕탕, 촹….’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공장을 울린다. 내연강판을 찍어내리는 프레스 소리는 육중했다. 전북 군산의 공장지대에서 접하기 어려워진 소음이다. 현대중공업과 한국지엠이 잇따라 공장을 철수시키면서 이 지역 부품업체의 가동률은 30% 미만으로 내려간 상황이다. 공장이 굴러가는 소리는 이제 생존을 알리는 소리가 됐다.

지난 7월 2일 찾은 전북 군산시 자유로에 있는 옛 한국지엠 군산공장의 정문이 한산하다. 자동차 부품업체 명신은 지난 6월 28일 지엠 측에 군산공장의 마지막 인수잔금을 치르고 소유권을 이전받았다. 명신은 이곳에 전기차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생산을 위한 공장 설비를 갖추고 자체 완성차 플랫폼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센터도 열 계획이다.
지난 7월 2일 찾은 군산의 자동차 차체용 부품 생산업체 ㄱ사의 공장 기계들도 절반 이상 멈춰 있었다. 5년 전 212억원을 기록했던 매출은 지난해 97억원으로 절반 이상 떨어졌다. 104명이었던 직원은 40명으로 줄었다. 공장 한편엔 쓸모없어진 금형들이 재활용을 기다리며 쌓여 있었다. ㄱ사 대표는 “2차 협력사 8곳이 우리 회사에 물량을 몰아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며 “우리 같은 업종은 이제 몇 개 안 남았다. 생태계가 무너졌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지엠 떠난 곳에서 전기차 SUV 만든다
군산 장산로에 있는 한국지엠 군산공장으로 갔다. 차량 수백 대는 족히 주차할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한 경비원은 “하루에 화물차만 1000대씩 오가는 곳이었다”며 “정문은 오가는 승용차로 분주했고, 북문으로는 화물차가 들락거렸다”고 설명했다. 북문 건너편 공장 철망에는 공장 폐쇄 철회를 요구하는 지입차주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군산공장의 빈 자리는 컸다. 2017년 현대중공업 군산공장의 가동 중단에 이어 지난해 5월 한국지엠 군산공장의 폐쇄로 전북지역 협력업체의 일자리 감소를 포함해 17만여명이 직장을 잃었다. 불황은 공장지대의 식당가로, 도심으로 번졌다. 군산산업단지 오식도동 식당가에서는 점심때 줄서기가 일상이었지만 이젠 맛집도 빈자리 찾기가 어렵지 않다. 이곳 현대옥의 점장 안형갑씨(66)는 “군산에서 제일 큰 회사 둘이 무너지니 하청업체들도 같이 깡그리 무너지고 단골손님도 다 끊겼다”며 “시내에 대도시 부럽잖은 좋은 집(아파트)이 차고 넘치는데 들어갈 사람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체감하지 못하지만 최근 군산시로 속속 전기차 업체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실제 전기차 제조사, 부품회사들이 최근 전라북도와 군산시,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중진공)과 새만금개발청 등 지자체, 공공기관 등과 협약을 맺고 군산에 입주할 채비를 하고 있다. 오식도동의 한 부동산 중개사도 “최근 전기차 관련 업체 사장이 직원들이 머물 원룸을 구하고 갔다”며 “사람이 많이 늘었다고 할 정도로 고용이 창출된 건 아니고 준비하려고 사람들이 들어오는 단계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지엠 군산공장도 새 주인을 맞았다. 현대자동차의 1차 협력사인 명신과 모기업 엠에스오토텍을 중심으로 한 컨소시엄이다. 명신 등은 이곳에서 전기차를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생산할 예정이다. 연간 생산목표는 2021년 5만대, 2025년 15만대로 잡았다. 명신의 군산공장은 국내에서 처음 생기는 전기차 전용 생산공장이 된다.
박호석 명신 부사장은 “3개월 동안 지엠의 생산시설을 빼고 저희 장비를 순차적으로 들여올 예정이다”라며 “연구·개발본부를 어디에 세우고 차체 생산라인은 어떻게 배치할지 개념을 잡는 단계”라고 말했다. 명신은 현대차와 같이 자체 브랜드를 가진 완성차 업체가 되기보다는 우선은 글로벌 업체들과 협력해 완성차 조립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박 부사장은 “초소형 전기차가 아닌 승용차, 특히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먼저 보고 있다”고 말했다.
군산국가산업단지와 여기에 맞붙어 있는 새만금산업단지 1공구가 전기차 클러스터로 조성된다. 전기버스를 생산하는 에디슨모터스와 최근 우정사업본부 초소형 전기차 시범사업 업체로 선정된 대창모터스, 에어서스펜션과 피스톤 등을 만드는 자동차부품회사인 코스텍, 골프카를 만드는 엠피에스코리아 등 4개 업체도 여기에 참여한다. 이들은 새만금산업단지에 입주한다. 김제 소재 차량부품기업인 아이티엔지니어링과 중국의 전기차 제조사와 손잡은 나노스, SNK모터스도 군산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7월 2일 군산의 구도심인 월명동의 한 교차로에 “친환경 전기자동차 메카로 거듭나는 군산(새만금)”이라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전기차는 국내 수요가 낮아 수출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군산은 수출항이 있고, 중국에서 부품을 들여와 가공한 후 다시 중국이나 동남아로 수출하기에 유리하다. 부품을 수입한 후 가공·수출할 때까지 관세를 유예해주는 종합보세구역이라는 장점도 있다. 중국 업체들 역시 이런 장점을 노리고 군산에 진출하고 있다.
군산에서 만난 김근영 중진공 전북서부지부장은 “새만금부지가 임대가 안 돼서 새만금청이 만날 찾아와 분양업체를 찾아 달라고 사정했다”며 “근데 요즘 갑자기 전기차를 하겠다는 업체가 모이면서 갑을병정의 병에서 갑이 됐다”고 말했다. 임병익 새만금개발청 산업진흥과 사무관은 “1공구와 2공구를 합해 100만평(4.5㎢) 정도를 대상으로 투자를 유치했는데 상당 부분이 찼다”며 “현재 사업계획서를 검토하는 기업들 이후에 들어오려는 기업들에게는 임대용지를 확보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안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새만금개발청은 전기차 클러스터가 새만금 방조제 하부도로에서 가능해진 자율주행시험과 상용차 부품 주행시험장 가동 등과 함께 새만금을 미래 모빌리티 산업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새만금 투자 유치도 활기
ㄱ사를 비롯한 군산지역 자동차부품회사들도 전기차 바람에 올라타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ㄱ사 대표는 “전기차로 가면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강철에서 알루미늄으로 소재를 바꿔야 한다”며 “출근할 때마다 소재산업으로 연구하고 도전해야 하는지 고민한다”고 말했다. 다만 “군산에 입주하는 업체들이 중국에서 들여오는 부품을 조립하는 수준에 그치고 지역 업체가 합류하지 못하는 구도라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군산은 군산 산업이 중소기업 중심으로 재편되길 희망하고 있다. 대기업에 당할 만큼 당했고, 이제는 전기차나 차량 재제조 사업 등으로 대기업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길을 가겠다는 뜻이다.
한국지엠의 1차 협력사였던 창원금속공업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정부 인증품 사업에 진출했다. 차량의 원래 부품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성능을 발휘하는 인증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어느 회사에도 종속되지 않고,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높은 이윤을 얻고 팔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 회사의 이종선 대표는 “현대차나 기아차가 조단위로 이익을 내지만 1차벤더들은 몇천억 원씩 매출을 내던 회사도 매물로 나온다”며 “원가절감을 위해 강제로 코드 입력하듯 가격을 후려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원청이 원하는대로 맞추다 보니 피동적이 되고 우리가 독자적으로 성장할 여력이나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며 “협력사라는 굴레에서 다시는 허우적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지역 부품업체들은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해 공동 활용하는 협동화 방식을 택한 협의회를 꾸렸다. 이를 통해 대기업 중심의 불공정한 원·하청관계를 중소기업 간 수평적·상생협력 모델로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언제까지 현대·기아차만 바라보고 살 순 없지 않습니까. 네이버나 다음이 큰 기업으로 성장한 것처럼 자동차 업계에서도 그런 사례를 만들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새만금에 입주하려는 한 전기차 업체 관계자의 말이 이를 대변한다.
<글·사진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