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국장 면세점’ 가능성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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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이용객 84%가 “설치 필요하다”… 문 대통령도 검토 지시

직장인 ㄱ씨(37)는 해외출장을 갈 때면 귀국길 기내면세점에서 코냑이나 위스키 같은 주류를 한 병 구입하곤 한다. 파손 우려가 있는 유리병에 담긴 데다 무게 약 2㎏으로 가볍지 않은 주류 제품을 출국장 면세점에서 구입하자니 일정 내내 들고다니는 게 번거롭기 때문이다. 외국 공항의 웬만한 면세점은 인천국제공항에 비해 규모나 다양성, 가격에서 만족스럽지 않다보니 그의 선택은 기내면세점으로 귀결되곤 한다.

지난 8월 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면세구역이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8월 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면세구역이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다./연합뉴스

올해 18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면세점 시장에서 ㄱ씨 같은 소비자들이 솔깃할 논의가 최근 본격화됐다. 바로 입국장 면세점이다. 그간 출국장에만 있던 면세점이 입국장에도 생기면 여행객들은 해외로 출국할 때 면세품을 구매해 입국할 때까지 갖고 다녀야 하는 불편을 덜 수 있게 된다. 무거운 화장품이나 부피가 큰 가방류 등도 오는 길에 살 수 있어 소비자 편의성이 높다.

관세당국과 항공사 반대로 지지부진

15년간 지지부진하던 입국장 면세점 논의에 갑자기 탄력이 붙은 것은 지난 13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도입을 검토하라고 지시하면서다. “해외여행객 3000만명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입국장 면세점이 없어서 (관광객들이) 시내나 공항 면세점에서 산 상품을 여행기간 내내 휴대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간 입국장 면세점 도입을 위한 관세법 개정안은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03년 16대 국회를 비롯해 총 6회 발의됐지만 회기만료 등으로 폐기됐다. 지난 7월 바른미래당 이태규 의원 등 10인이 발의한 게 7번째다. 이번에 성공한다면 ‘6전7기’가 된다.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관세당국과 항공사들이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일단 관세청은 판매물품을 해외에서 사용할 경우에만 세금을 뺀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는 원칙을 그간 고수해 왔다. 출국 때 산 면세품을 다시 국내에 반입하지 않는 게 원칙인 것이다. 입국장 면세점을 통해 탈세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이를 위해 관리·감독 인력을 지금보다 더 늘려야 한다는 점도 관세청으로서는 부담이다. 입국장의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대형 항공사들은 매출 감소를 우려한다. BNK투자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입국장 면세점이 개점된다면 기내면세품을 판매하고 있는 항공사와 출국장 면세점을 운영하고 있는 업체 매출에 타격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게다가 기내면세점 매출은 출국장 면세점 변수를 제외하더라도 이미 감소추세다. BNK증권은 “2018년 기내판매점 예상 매출액은 2867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2.1% 역성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입국장 면세점’ 가능성 높아졌다

반면 인천국제공항공사에 있어 입국장 면세점은 2001년 문을 연 이래 숙원사업 중 하나였다. 입국장에 면세점이 신규 설치되면 그만큼 추가 임대수익을 거둘 수 있어서다. 인천공항공사는 2002∼2017년 공항 이용객 2만여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84%가 여행객 편의 증대를 이유로 입국장 면세점 설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내놓고 있다. 일찌감치 1터미널에 190㎡(약 57평) 넓이의 ‘터’ 2곳을 1층 수하물 수취지역에 비워놨고, 2터미널 1층에도 326㎡(약 100평) 자리를 잡아놨다. 규모로 보면 출국 면세점에 비해 협소한 편이다.

팽팽하던 균형추가 갑자기 ‘도입’ 쪽으로 기운 것은 최근 대형 항공사들의 정치적 입지가 취약해진 가운데 소비를 국내로 돌려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조현민 전무의 ‘물컵 갑질’ 사건 이후 오너 일가가 탈세와 노동법 위반 등의 혐의로 전방위 조사를 받는 중이고, 아시아나항공은 ‘기내식 파문’ 여진이 계속되면서 체면을 구겼다.

정부, 중견·중소기업에 허용하기로

특히 최근 국내 소비가 탄력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해외 소비만 늘자, 면세점 입국장을 설치해 해외 소비를 국내로 돌려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렸다. 지난해 4분기 거주자의 해외 소비 지출액은 8조4000억여원으로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18.9% 껑충 뛰었다. 국내 소비 지출액이 2.4% 증가한 데 비춰보면 폭발적인 증가세다. 소비가 부진한데 나라 밖으로 빠지는 외화만 늘어난 셈이다. 소득주도 성장을 추진해온 정부로서는 장독대에 금이 간 형국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입국장 면세점’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힘을 실어주고자 하는 정부의 정책기조와도 맞아떨어진다. 과거 관세법 개정안 논의과정에서 입국장 면세점에 중견·중소기업만 들어올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새로운 사업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다. 인천공항공사가 신규사업자 공고를 낼 경우 다수의 사업자가 입찰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입국장 면세점은 전세계적으로도 증가추세다. 가장 큰 이유는 자국민의 외화유출을 막기 위해서다. 입국행 항공편에 탑승하는 외국의 면세점에서 소비를 할 게 아니라 자국 내 면세점에서 소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일본은 지난해 9월 나리타공항에 입국장 면세점을 개점했고, 중국은 2016년 2월 공항과 항만에 면세점 19개를 신설하는 방안을 승인한 데 이어 향후 13개 공항에도 면세점을 늘린다는 계획이다. 전세계적으로 운영 중이거나 설치 예정인 곳은 73개국 137개 공항으로 알려졌다.

기존 대형 면세점 업체들은 시큰둥한 반응이다. 굳이 신규 면세점을 입국장에 만들 게 아니라 출국 때 구입한 물건을 귀국할 때 ‘픽업’할 수 있는 인도장만 입국장에 설치해도 소비자들의 불편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입국장 면세점 면적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도 오히려 혼잡이 가중될 수 있다는 의견에 힘을 싣는다. 구매객은 몰리는데 찾는 물건은 없고 결제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번에는 ‘입국장 면세점’이 도입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이유들이 마침 맞아떨어져서다.

<최민영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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