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의 계절 봄. 미국의 IT 플랫폼 기업들에는 바쁜 시기다. 대규모 개발자 행사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아마존에서 페이스북부터 시작한 행사 시즌은 금주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드와 구글의 I/O라는 초거대 행사로 그 절정을 맞이하고 있다. 6월 초 애플의 행사까지 뉴스는 마르지 않는다. 모두 참가비만 100만원을 쉽게 넘는 고가의 행사들임에도 불구, 늘 예약 개시와 함께 매진이다.
이들 행사는 여느 제품 발표회 등과는 다르다. 여기서 선보이는 내용 들은 특정 상품이라기보다도 회사의 방향성, 그리고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기술들이기에 일종의 박람회 분위기다. 동시에 콘서트 같은 느낌도 든다. 보통 어떤 기술의 창시자는 관련 기술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이처럼 일반인들은 모르는, 좁지만 깊은 팬덤을 형성한 그곳에서 개발자들은 마음을 뛰게 하는 소식을 기다린다. 마치 성지순례처럼 개발자들은 시간을 들여 그곳을 방문하고, 또 이들의 고용주들은 우수사원의 여비를 기꺼이 지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미래의 세례를 받은 개발자들은 현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만난 기술을 고려하여 각자 조직의 미래를 선택해 나간다. 현장 당사자가 미래에 대해 결정권을 가지는 것인데, 미래를 실체화하는 일은 오로지 현장에 있음을 인정하는 문화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처럼 상당수 기술자가 다단계 하청의 말단에 배치돼 있고, 구현이란 제안서에 적힌 대로, 시키는 대로 찍어내는 단순노동이라고 여겨지는 문화에서는 이와 같은 무대의 가치가 인정 받기 힘들다. 국내 기업은 잘 안하는 일이다.
동시에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최근 출시될 예정인 LG의 신형폰은 미국 언론에서 괜찮기는 하나, 가슴을 뛰게 하는 임팩트가 없다며 혹평을 받았다. 하드웨어만 뛰어난 한국 제품에 종종 뒤따르는 안타까운 수식이다. 가슴이 뛰기 위해서는 그 하나의 제품을 볼 때 미래가 그려져야 한다. IT 제품이란 그저 내가 소비할 상품일 뿐만 아니라, 내가 미래를 만들 때 필요한 부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도 LG도 자체 소프트웨어를 강화하고 운영체제를 만들고 인수하는 등 여러 노력을 했지만, 전세계 개발자의 마음을 뛰게 하는 문화적 설렘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중국도 일본도 아직은 못하고 있는 일이니 위안은 될지 모르겠다.
일종의 미국발 팝문화와 같은 것이니 하루 아침에 될 일은 아닐 수도 있다. 미국은 이 활동의 역사도 깊다. 이를 위한 조직적 기업활동을 DR(Developer Relations)이라 부른다. 인사(HR)나 홍보(PR), 혹은 대관(GR)은 익숙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낯선 개념이다. 좋은 제품의 대량생산이 번영을 가져다주는 시대는 지났다. 미래는 이렇게 미래를 꿈꾸게 하고 가슴 설레게 하는 흥분을 둘러싸고 펼쳐지고, 여기에서 새로운 기회가 싹튼다. 일종의 쇼비즈니스이기도 하다. 한류가 갑자기 터진 것처럼 어느 날 스타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류식으로 오디션이나 육성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개인의 다양성이 존중 받고 조직의 벽에 구애 받지 않는 오픈 이노베이션이 활성화될 때, 비로소 월드 스타 개발자의 싹이 트곤 하는 일이니까.
<김국현 IT칼럼니스트·에디토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