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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도 새도 모른 ‘이건희 차명계좌’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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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4000억원에 대한 납세 여부 논란 속 대규모 사장단 인사 단행

적은 돈도 아니고 왜 국감 전까진 아무도 몰랐을까. 자그마치 4조4000억원이다. 올 5월 재벌 회장들의 집 인테리어 비용 관련 의혹을 보도한 한 TV 시사프로그램을 보던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도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명의변경이든 실명전환이든 이 정도 돈이 금융권에서 움직였다면 재계에 하다못해 소문이라도 났어야 한다. 그런데도 8년이 지나도록 몰랐다. 국감에서 논란이 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재산 얘기다.

박 의원이 정무위 국감에서 “이 회장이 2008년 삼성특검으로 드러난 1199개의 차명계좌(총 4조5373억원)에서 주식과 예금 대부분인 4조4000억원을 이미 찾아갔다”고 밝히면서 3년 넘게 병석에 있는 이 회장에게 전국민의 이목이 다시 집중되고 있다. 국민이 놀란 건 두 가지다. 회자되는 사실이긴 하지만 이 회장의 차명재산이 이렇게 많았었다는 점과 차명계좌를 해지해 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과징금을 제대로 내지 않은 의혹이 있다는 점이다. 국감을 통해 차명재산 문제가 제기되기까지의 과정도 흥미롭다.

삼성은 “당시 규정과 절차에 따라 돈을 찾았고 세금도 다 냈다”는 입장이지만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분위기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당시 드러난 차명재산에 대해 “증여세도 제대로 냈는지 봐야 한다”며 협공하는 등 여당에서는 당론으로 이번 의혹을 규명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정부도 “계좌 해지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의 차명계좌 의혹 해소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원활한 경영승계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부분이다.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는 이 회장이 가진 삼성생명 등 각종 계열사 지분에 기대고 있는 측면이 크고, 논란이 되고 있는 이 회장의 차명재산 중 일부는 이 부회장이 향후 상속받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인 2014년 초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으로 출근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헤럴드경제 제공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인 2014년 초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으로 출근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헤럴드경제 제공

‘엉뚱하게’ 불거진 차명계좌 논란

이 회장이 임원 486명의 명의로 된 1199개의 차명계좌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이미 삼성특검 결과 발표 때 모두 공개가 됐고, 이 회장은 삼성특검 직후 입장표명을 통해 차명계좌를 모두 실명전환하겠다고 밝히고 “차명재산 중 일부 주식 등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사회에 전부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삼성특검 후 이 회장이 조세포탈 혐의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으며 차명계좌 논란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8년 넘게 수면 아래에 있던 이 회장의 차명계좌 문제는 올 들어 대기업 회장들의 이른바 ‘인테리어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재벌 총수들이 자택을 수리하거나 인테리어를 새로 하는 과정에서 회삿돈을 유용했다는 혐의가 하나둘씩 드러난 것이다.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의 경우 평창동 자택 인테리어 공사비를 회삿돈으로 지불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이 회장의 경우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진행된 한남동 자택 수리비용이 문제가 됐다. 시민단체와 일부 언론이 수리비로 지급된 100억원가량의 돈이 출처가 불분명하다며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은 “이 회장 개인 비용으로 지출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번엔 이 ‘개인 비용’의 출처가 문제가 됐다. 삼성이 “2008년 밝혀진 차명재산을 실명전환한 돈”이라고 밝히자 참여연대는 “이 회장이 불법 차명거래를 했다”며 검찰에 이 회장을 고발했다. 이 회장이 임원을 통해 ‘대리 구매’한 것으로 알려진 논현동 빌라의 구매대금 역시 차명재산의 일부라는 의심을 사고 있다.

이 같은 사건으로 이 회장의 차명재산이 회자되자 국감을 앞두고 있던 의원들이 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알고나면 모두가 궁금할 일이지만, 누구도 알아보지 않아 몰랐던 사실, ‘그때 그 차명재산은 지금 어떻게 됐는가’다. 그러자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이 회장이 2009년에 이미 차명계좌에 있던 재산 대부분을 실명전환해 찾아갔던 것이다.

국감에서 내역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정말 아무도 몰랐다. 여러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심지어 삼성특검 때부터 매년 이 회장의 차명재산 문제를 거론했던 경제개혁연대도 몰랐다. 경제개혁연대 역시 당시 차명재산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궁금해했고, 최근까지 정부에 관련 내용 확인을 질의하기도 했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금융정보의 경우 민감한 개인정보라 금융당국이 공식적으로 확인해주기까지는 알 수가 없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결과를 놓고보면 시민단체들은 이미 이 회장이 다 찾아가서 현재는 없는 과거의 차명재산을 놓고 의혹 제기를 해온 셈이다.

특검에서 밝혀진 차명재산 중 4조1009억원은 계열사 주식들이었다. 경제개혁연대가 당시 각 계열사 주식 시세와 장외거래 가격 등을 감안해 추정한 것에 따르면 이 중 삼성생명 지분이 2조3119억원, 삼성전자와 삼성SDI 주식이 1조1558억원 규모로 가장 덩치가 컸다. 삼성은 삼성특검이 끝난 2008년 말부터 2009년 초까지 이 회장이 보유 중이던 차명 계열사 주식을 명의전환했다고 공시했다. 차명으로 있던 주식이 명의전환되면서 자연스럽게 이 회장은 차명재산을 찾아가는 모습이 됐다. 차명재산이 밝혀지기 전까지 전 세계 부호 순위에서 600위권이던 이 회장은 이후 순위가 100위권으로 급등한다.

“세금 내라” VS “내라면 내겠다”

일각에서는 이 회장이 돈을 찾아가면서 세금을 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경제개혁연대가 2008년 삼성특검 당시 이 회장 측 변호인이 재판부에 제출한 ‘양형참고자료’를 토대로 추정한 결과를 보면 이 회장은 차명재산의 실명전환 과정에서 약 4800억원의 증여세를 냈고,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양도소득세 등으로 1748억원을, 법원 확정판결에 따른 벌금으로 1100억원 등을 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당시 이 회장의 차명계좌 1199개 중 1021개 계좌가 금융감독원의 조사를 받았다. 이 중 20개가 1993년 실시된 금융실명제 이전에 만들어졌고, 나머지 1001개가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만들어졌다. 대다수의 계좌가 금융실명제 이후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회장의 차명계좌 대부분이 금융실명제법 위반 논란을 피해갔다. 결과적으로 차명계좌이긴 해도 절차상 임직원 본인의 실명 확인을 거쳐 만든 계좌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게 삼성특검의 판단이었다. 당시 금융위도 “이 회장의 차명계좌가 금융실명제법상 실명전환 대상인가”라는 경제개혁연대의 질의에 유권해석을 통해 “실명전환 대상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10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종합감사에서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차명계좌 재점검 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10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종합감사에서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차명계좌 재점검 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은 당시 이 회장의 차명계좌를 실명전환 대상이 아닌 걸로 판단한 금융위에 잘못이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금융위는 “당시나 지금이나 판단은 실명전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금융실명제법상 검찰 수사 등으로 차명계좌 사실이 드러난 계좌의 경우 추가로 이자수익 등에 대해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점이 지적되자 “추가로 당시 과세에 문제가 없었는지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박용진 의원은 조사를 통해 최소 1000억원 이상의 추가 과징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 중이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이 회장의 차명계좌가 2003~2004년에 삼성증권 등에 집중 개설된 점을 들어 추가로 증여세 부과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감에서 지적이 잇따르자 금융위는 이 회장의 차명계좌들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힌 상태다. 조사 결과에 따라 이 회장에게 부과될 과징금이나 추가 과세는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일단 전수조사를 통해 계좌의 입금내역이나 잔액, 비자금 여부 등 계좌의 성격부터 명확하게 규명이 돼야 한다”며 “결과에 따라 추가로 과징금이나 증여세 부과가 가능할 수도,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삼성은 조사 결과를 보고 “더 내야 할 게 있으면 내겠다”는 입장이다. 이 회장의 차명계좌 문제가 재차 문제가 된 마당에 깨끗이 문제를 털고 가는 게 좋다는 판단에서다. 삼성 관계자는 “당시 차명계좌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법적으로 문제 없이 절차가 이뤄졌다는 게 일관된 입장”이라면서도 “논란이 된 이상 이번에도 명확하게 문제를 털지 못하면 향후 또 논란이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세금을 더 내든 내지 않든 명확하게 문제가 정리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최근 사장단 인사로 그룹 장악력을 높여가고 있는 상황이라 경영권 확보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부친의 차명재산 문제가 이참에 정리되는 게 향후 이 부회장의 승계작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마이웨이’ 가는 이재용

이 회장의 차명계좌 논란 속에서도 이재용 부회장은 대규모 사장단 인사를 단행하며 친정체제를 본격화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2일 사장단 인사에서 50대 부사장 7명을 사장으로 승진시키며 지난 10월 권오현 전 부회장의 자진사퇴를 통해 화두가 된 ‘세대교체론’에 힘을 실어줬다.

그간 이 부회장은 “변화 속 안정”을 강조하며 사장단 인사를 최소화하고 이 회장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임원들도 꾸준히 중용했다. 하지만 이번 인사에선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이 부회장의 연배와 비슷하게 사장단 전체 연령이 50대로 낮아졌고, 이 회장 측근 임원들은 경영 2선으로 후퇴했다. 재계에서는 정현호 전 미래전략실 인사지원팀장(사장)의 복귀를 본격적인 이 부회장 친정체제 구축의 신호탄으로 보고 있다.

정 사장은 이 부회장과 같은 미국 하버드대 동문으로 경영지원팀장도 경험한 바 있어 이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이 부회장의 최측근에서 각종 경영과 인사업무를 보좌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 사장은 이 부회장이 수감되고 미전실이 해체되자 다른 미전실 팀장들과 함께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났다. 이후 9개월가량 개인사무실을 내고 활동하다가 이번 인사를 통해 부활했다.

더욱이 정 사장은 이번 인사와 함께 신설된 삼성전자 ‘사업지원태스크포스(TF)’를 이끄는 중책을 맡았다. 삼성전자는 “전자계열사 간 공통 이슈에 대한 대응과 협력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 TF를 신설했다”고 밝혔지만, 재계에서는 TF가 삼성전자의 재무·인사·전략 등을 총괄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TF를 ‘미니 미전실’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내년 3월부터 이사회 의장으로 내정된 이상훈 사장과 함께 정 사장의 TF가 이 부회장의 핵심 참모세력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친정체제 구축과 함께 사퇴의사를 밝혔던 권오현 전 부회장, 윤부근·신종균 사장 등을 모두 승진시킨 점도 특징이다. 권 전 부회장은 사내 선행기술 연구조직인 종합기술원 회장으로, 윤부근·신종균 사장은 각각 CR 부회장과 인재개발담당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모두 이 회장의 측근들로 분류되는 임원들이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친정체제 구축으로 인한 내부 파장과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구 조화’의 상징 차원에서 권 회장 등을 우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세 분 모두 실무를 담당하는 자리는 아니다”라며 “공로도 큰 분들이고, 회사가 여전히 혁신의 위기에 있는 점을 감안해 자문으로 계속 회사에 공헌해달라는 차원”이라고 밝혔다.

사상 최대 실적을 낸 반도체 부문에서는 4명의 사장 승진자가 나왔다. 진교영 부사장은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 메모리사업부장, 강인엽 부사장은 DS부문 시스템 LSI사업부장, 정은승 부사장은 DS부문 파운드리 사업부장으로 각각 승진했다. 반도체부문 출신인 황득규 부사장도 중국삼성 사장으로 승진했다. 삼성 고유의 ‘성과주의’가 명확히 반영된 인사다. 팀 백스터 부사장의 경우 순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북미총괄 사장으로 승진했다. 사장 승진자의 평균 나이는 55.9세로 이전 사장단의 평균 나이인 63.3세보다 대폭 젊어졌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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